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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과 땅 사이 쌍방소원 성취의 길>의 줄거리:
하나님 자신 말고 이왕에 다른 소원을 가졌으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불행 중 다행입니다. 혹시 그런 바람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이 반복되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소원의 대상도 하나님뿐이시고, 이 세상을 향해 소원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늘과 땅 사이 쌍방 소원 성취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쌍방 소원 성취의 길
(누가복음 23장 45절~56절)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5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53.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54.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과 땅 사이 쌍방 소원 성취의 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쌍방 소원 성취의 길’
지난 시간에는 44절에서 49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중 45절의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56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9절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중에 일어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행악자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간으로 정오로부터 오후3시에 이르는 동안 십자가를 중심으로 온 땅에 어둠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상황을 통해 낙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고, 낙원과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흑암의 상태라는 것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온 땅에 어둠이 임함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광명의 세계인 낙원과 흑암의 세계인 이 세상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낙원과 흑암이 대치되고 있는 상황에 이어서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사건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성소 휘장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는 가장 온전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의 뜰과 이스라엘 여인들의 뜰과 이방인의 뜰까지 합친 건물을 의미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지성소와 성소가 중심이 된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성소 앞쪽으로 제사장의 뜰 안에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는 휘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휘장 안쪽의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법궤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기록한 두 개의 돌판이 있었고 그 뚜껑은 속죄소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휘장으로 나누어진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성도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 즉 추구하는 마음을 상징하고, 떡상은 배부름을 상징하며, 금촛대는 만족한 마음으로부터 발산되는 기운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를 가진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하고 있었던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찢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갖는 의미란 무엇일까요? 지성소는 근본적으로 출입이 금지된 장소였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을 뿐입니다.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서 법궤 뚜껑인 속죄소에 뿌렸습니다. 이러한 지성소의 구조는 사뭇 특이합니다. 속죄소는 죄 사함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다만 죄 사함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가장 거룩한 곳에서 죄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의 의미 또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사람 마음의 구조를 형상화 시킨 것이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법궤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격자로서 존재하고 계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돌판이고 법궤입니다. 그리고 법궤는 이름을 가리킵니다. 이름이란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표식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지성소에 들어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의 마음의 구조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과 채움을 느끼는 공백이 있습니다. 지성소는 마음의 있음을 느끼는 부분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요즘 반복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기 위한 마음의 접촉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접촉되고 밀착됨으로써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이 존재합니다. 이 접촉면을 상징하는 장소가 바로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있다고 느껴지는 대상을 마음에 채워서 만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접촉면에 돈이 붙게 되면 실제로 돈을 얻음으로써 만족을 느끼고자 합니다. 마음의 접촉면에 이성이 붙게 되면 연인으로서 만족을 느끼고자 합니다. 마음의 접촉면에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면 그 자리에 올라가 만족을 느끼고자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 구조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지성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는 있음을 느끼게 되는 접촉면인데 사람은 마음에서 접촉이 일어날 때는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이름을 붙잡음으로써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고, 마음과 접촉이 일어난 대상을 통해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처럼 지성소란 있음을 느끼기 위하여 이름을 붙잡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미오의 주변에 수많은 여자가 있었지만 로미오의 마음에는 줄리엣이라는 이름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법궤가 있다는 것의 의미는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의 있음만 느껴야 되는 선택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이 생겨나게 됩니다. 지성소는 곧 소원의 장소입니다. 결론적으로 지성소는 무엇을 소원하느냐를 결정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접촉면으로 어떤 대상의 이름을 붙잡게 되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있다고 느껴지는 존재를 실제로 가짐으로써 채워져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마음에서 소원이 발생하는 지점을 상징합니다. 소원한다는 것은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의 있음을 느끼고 가지려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소원이 발생하는 지점인 지성소에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가 함께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가 없는 상태를 상상해봅니다. 법궤는 뚜껑이 없는 직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속죄소라는 뚜껑은 법궤에 속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뚜껑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장치입니다. 따라서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돌판이 소중하기 때문에 뚜껑을 만들어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소의 의미는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상징하는 말씀의 돌판을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이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지성소에서 존재하는 어떤 이름을 붙잡고 있음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라는 이름을 붙잡게 되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상태가 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돌판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뚜껑에 의해 가려진 상태이기 때문에 건강이라는 이름을 마음으로 붙잡고 건강상태를 소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죄악입니다. 즉, 죄악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져서 다른 이름을 붙잡고 있음을 느끼며 소원이 발생하게 된 상태입니다. 마음 채움을 위한 흡입력이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차마 소원이라고 말하기 힘든 티끌 같은 것일지라도 바라는 순간 죄악은 발생합니다.
죄악의 발생을 막으려면 마음의 접촉면인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다는 것은 선민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진 채로 다른 이름을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고 소원하는 죄악의 상태에 늘 있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속죄를 위해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행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의 이름을 붙잡고 존재감을 느끼고 소원하는 죄악 된 상태는 절대로 성취되어서도 안 되고 접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0억이라는 돈을 마음의 접촉면에 붙잡게 되었습니다. 10억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존재감이 크게 느껴집니다. “10억이 있어야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라는 소원이 생겨서 그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소원이 생긴 상태에서 성취를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떼는 것이 죄악입니다. 이러한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움직이지도 말고 접근하지도 말라는 것이 지성소의 출입금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행여나 하나님 대신에 다른 이름을 붙잡고 소원하게 되었다면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뿌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마음의 접촉면에 자녀의 있음을 느끼면서 형통을 소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붙드는 것이 죄악이기에 접근하면 안 됩니다. 꼼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외의 소원을 갖게 된 상태에서 해야 될 일은 오직 속죄뿐입니다. 속죄를 위해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희생제물의 피를 뿌리는 행사의 의미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성소의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성소 바깥의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추구하는 것입니다. 떡상은 그것을 가지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마음의 배부름을 의미합니다. 금촛대는 그렇게 가진 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기운을 의미합니다. 마음에 담은 대상에 의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지배되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성소는 사람 마음의 구조를 형상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힘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이라고 해서 당연시할 수는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 대한 소원이나 바람을 갖는 일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할 때에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됩니다. 그리고 이 소원은 죄가 아닙니다. 더는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이 막힘이 없고 하늘을 향하여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앞서 10억을 소원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죄악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소원을 하는 것은 쉬우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0억을 벌기란 가시밭길을 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시밭길을 다 가지도 못한 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시밭길은 힘든 길이 아니라 애초에 가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무병장수에 대한 소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소원은 가지기는 쉬우나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애초에 가져서는 안 되는 소원입니다. 이러한 소원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고 싶지 않다면 소원이 생기는 순간 속죄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마음의 접촉면을 상징하는 지성소에 접근을 금지하는 휘장이 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마음에서 세상을 소원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은 오히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은혜입니다. 무병장수의 소원 자체가 죄악이기에 죄악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원에 대한 접근은 금지되어야 하고 속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행여나 세상의 소원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불행 중 다행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속죄는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소원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하여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한 모든 소원은 가져서도 안 되고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 소원은 가져야 하는 소원이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휘장이 찢어진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은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이 있고 채움을 느끼는 공백이 있습니다.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이 마음의 지성소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있게 된 것들 중에서 특별히 마음으로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들의 이름을 붙잡고 그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형상화한 것이 성전의 지성소이고 성소입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갖는 소원과 바람이 바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휘장은 세상을 향한 소원에 절대로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의 의미입니다.
마침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나를 동일시한 상태에서 생기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갖는 소원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 소원은 마음껏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도 소원이 있습니다. 쌍방의 소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소원을 갖게 됨으로써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소원은 막히게 되었습니다. 있음과 좋음은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신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원도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져야 될 소원과 하나님이 가지시는 소원입니다. 인간이 가져야 할 소원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소원은 접근이 불가합니다. 소원 자체를 속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외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절대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지시는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향하여 소원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의 관계에 대해서 소원을 가지실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배우자에 대해 소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는 배우자에 대해 어떠한 소원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자녀에 대해 소원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 나간다고 해서 승진이나 월급에 대해 소원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의 소원은 하나님뿐이어야 합니다. 나의 삶에 대한 소원을 갖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되면 좋겠다,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면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해 소원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동안에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 또한 막힘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쌍방 소원의 성취가 바로 휘장이 찢어진 사건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사건 뒤에는 예수님의 육체가 장사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단순히 종교적인 상징적 비유적 사건이 아닌 실질적인 변화의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무덤은 십자가에서 죽음의 의미를 확고하게 해줍니다. 나의 육체가 죽은 것과 같은 효과가 마음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의 육체가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세상과의 모든 관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은 이와 동일한 효과가 마음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과의 동일시는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의 단절입니다. 마음의 접촉면인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외의 모든 대상의 이름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육체가 죽었을 때와 똑같은 효과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무덤에 장사되신 사건은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마음에서 육체로 맺게 되는 모든 관계가 중단됩니다. 세상에 대한 관계는 육체가 살아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의 일이 어떻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은 더 이상 가질 수 없습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적용시킬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사건은 내게서 육체가 죽었을 때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덤에 묻히신 주님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할 때에 내 마음에서 몸 때문에 맺어진 모든 관계는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이 괜찮은 이유는 내가 몸으로 맺고 있는 모든 관계를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고 소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의 관계, 부모자식과의 관계, 돈과의 관계, 건강과의 관계 등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소원대로 진행될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이것을 위해 내 마음에서는 육체가 죽었을 때와 똑같이 주님의 십자가의 동일시를 통하여 세상을 끊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붙잡는 목표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소원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하여 인격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의 접촉면인 지성소에 육체가 있기 때문에 만나는 대상의 이름이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소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소원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세상일이 잘 해결되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일시는 육체가 죽었을 때 육체와의 연관성에서 존재하던 모든 관계의 이름이 마음의 접촉면에서 실제로 끝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의 효과가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타나게 하려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는 동안에는 지성소의 휘장을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의 휘장이 상징하는 바였습니다. 절대로 세상 소원을 위하여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접근하였다면 그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속죄뿐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면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이어지는 소원의 길이 주님을 통해 뻥 뚫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이 세상을 향해 소원하는 바람에 이 땅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소원이 막혀있었으나 주님을 통해 내 삶에서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늘을 향하는 내 소원이 뻥 뚫려 성취가 되고 땅을 향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뻥 뚫려 성취가 되는 쌍방의 소원 성취의 길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늘을 향해 아버지를 가지고 싶어 하는 나의 소원, 땅을 향해 보시기에 좋은 것들을 이루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소원, 이 땅과 하늘 사이에 쌍방의 소원이 오늘도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동일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실제로 육체가 죽은 것과 같은 죽음의 효과가 우리의 마음에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이 분리됨으로 쌍방의 소원이 성취되는 놀라운 경험들이 시시각각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