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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활 새생명의 삶은 입장정립 차별화>의 줄거리: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면 예수님의 부활에도 연합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게 된다고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새 생명이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이 전혀 새로운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이 새롭다는 것은 지정의언행과 입장 정립의 차별화를 뜻합니다.
부활 새 생명의 삶은 입장정립 차별화
(누가복음 24장 1절~12절)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부활 새 생명의 삶은 입장정립 차별화>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부활 새 생명의 삶은 입장정립 차별화’
본문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일시함을 통하여 참여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이 세상의 삶을 새 생명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새 생명의 삶의 특징은 입장정립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 차별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 생명을 가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입장을 정립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의 삶을 사는 사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다르고 언행이 다릅니다. 다를 수 없다면 새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며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구 생명의 삶을 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언행의 움직임에 차별화가 보여야만 합니다.
예수님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구절이 있다면 로마서 6장 말씀일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음이 예수님의 죽으심과의 연합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장사되었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동일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또한 예수님의 부활에도 연합하는 동일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결과로 이 땅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새 생명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생명이란 살아있게 하는 힘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정의와 언행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의지하여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살펴보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계속해서 있음과 좋음의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있음의 느낌을 갖는 것과 그 하나님을 마음의 공백에 모셔 들여 하나 됨으로써 좋음의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입니다.
사람은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에 의하여 지정의와 언행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생명이란 곧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입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에 의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아들이 유일하게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대상이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게 하는 대상은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장님에게는 사업이 생명입니다. 사업이 사장님의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상황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 같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가 하면 상황에 따라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는 사람은 사장님의 있음을 느낍니다. 사장님이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됩니다. 궁극적인 가치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일 수 있지만 당장은 사장님 마음에 들어야겠다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됩니다. 이처럼 생명이란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이게 하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주는 대상입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의 가치들로부터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으로 지정의와 언행이 움직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상태에서 살아갈 때는 오직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식으로 붙잡아서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갈 때 하나님의 지정의와 언행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생명이 되시기 때문에 새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새 생명에 거한다는 말씀은 삶의 현장에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새 생명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는 자리는 세상을 빠져나간 자리입니다.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갔는데 몸과 의식은 여전히 세상 안에 존재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빠져나간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새 생명 가운데 살고 있을지라도 구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생명을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고, 쉬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있고, 범사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 그리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이 주어져도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어떤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 일에 대해서 의견을 취하고 입장을 정립하는 일에 있어서 완전한 차별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새 생명을 가진 자의 삶에서는 이러한 입장정립과 의견확립의 차별화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별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새 생명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부활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였다면 부활에도 참여하게 되며, 부활에 참여하였다면 구 생명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 생명을 사는 자로서 입장정립과 의견확립의 차별화를 보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새 생명의 삶에 들어가기 위한 가장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달렸던 행악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게 됩니다. 그 결과 육체가 죽음과 함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 낙원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돌아오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 사건들의 의미는 우리의 육체가 죽지 않고 살아있을 때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낙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고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다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행악자는 마음이 낙원에 가기 위하여 육체가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는 자들은 육체가 죽지 않고도 새 생명을 누리며 마음을 낙원에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악자는 낙원에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새 생명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연합하여 마음이 어둠을 탈출하여 낙원으로 진입함과 동시에 이 땅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새 생명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행악자는 육체가 죽은 뒤에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낙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연합함으로써 육체가 죽을 필요는 없으나 육체가 죽었을 때처럼 마음이 육체와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마음과 육체의 분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에 동일시할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간단히 예수님의 죽음의 효과 혹은 예수님의 무덤의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효과가 일어날 때 육체와 마음은 분리되게 됩니다. 이는 곧 육체로 맺고 있던 모든 관계가 마음에서 끊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한편 여기서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는 육체가 살아있음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육체와 끊어져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낙원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육체로 맺고 있던 모든 관계가 끊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히 말해 마음이 육체에 묶여있는 동안에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낙원에 진입해야 하나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느낌을 얻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 땅에 남아있는 육체와 의식으로 새 생명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님이 죽으셔서 무덤에 장사 되는 상태와 동일시해야 되기 때문에 육체로 맺은 관계 끊기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었다고 생각해봅니다. 죽었기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한들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시하게 되면 제일 먼저 완전히 무관심과 반응을 보이지 않는 상태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오해란 십자가 생활화와 부활에 참여함에 있어서 육체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대로 방임하고 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6장 11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의 동일시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기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과의 동일시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의 동일시는 세상에 대한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그저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은 부활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조차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나를 동일시하는 삶은 겉으로 보이기에는 세상에 대해 무관심해 보이고 방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의 동일시에는 분명히 그러한 단계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겉으로는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게 보이고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유지된다는 것은 오히려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진다면 부활의 새 생명의 특징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정말로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지고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지면 삶에서는 방관이나 방임이 아닌 입장과 의견정립의 차별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에 동일시하였다면 세상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자는 부활과 승천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만이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주시는 대상이 되십니다. 그리고 육체가 머물고 있는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있음과 좋음의 느낌에 의해 지정의와 언행은 움직여지게 됩니다. 구 생명을 살던 때와는 완벽하게 다른 입장과 의견이 정립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사는 사람들은 차별화된 지정의와 언행으로 인해 박해나 미움을 받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정말로 육체로 맺어진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으면 지정의와 언행은 차별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구 생명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구 생명을 가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가지고 지정의와 언행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에 대한 오해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덤에 묻히심에 동일시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관계하는 사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방관으로 일관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일시가 아닙니다. 그렇게 방관과 방임과 내버려둠이 지속된다는 것 또한 결국 관계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로 열어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주시는 새 생명이 되신 상태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는 이유는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고 방임하기 때문이 아니라 입장과 의견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차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부터 받는 느낌으로 지정의와 언행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제외하고 예수님과의 동일시를 단순히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과 방임으로 받아들인다면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바로 어제 새 생명 삶의 본질적 특징을 가지고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오해에 관한 내용과도 관련이 있는 대화였습니다. 이러한 오해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며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만 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광을 영화로운 조명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브라함 마음의 무대에서 조명이 하나님께만 비춰져서 다른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묻혀있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도 보이지 않았고,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아내를 지킬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내가 보이지 않았고, 이후에 이삭을 바칠 때도 이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입장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에 고향사람들은 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도 이삭의 반응을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결정된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아내 사라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면 아내를 뺏길 상황으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독자 이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면 독자를 제물로 바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었다는 증거는 사라를 왕들에게 넘겨버리고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사라나 이삭의 의견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입장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라와 이삭을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룬 새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으로부터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이 선언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이 나오자마자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당황하여 만류합니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따듯했고 예수님의 행동을 만류하고자 한 생각은 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3절에서 이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계셨지만 마음에서 연결되어 계셨던 분은 베드로가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생명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차가운 대응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차별화에 있습니다. 나와 육체를 통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요구를 주저 없이 표명하고 행동으로 옮길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고 무덤에 들어가심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삶에서 죽음과 무덤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로 맺은 관계들에 대해 방관하고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별화된 입장정립과 의견확립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마음은 낙원에 가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평강이 유지되는 가운데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결정된 일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살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는 내가 걱정할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순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생각해봅니다. 다리오 왕이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들을 세울 때 지방 관원들 위에 총리 셋을 세우는데 다니엘을 최고자리에 앉히고자 합니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절하거나 경배하는 모든 사람을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칙령을 내리게 합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리 중에서도 으뜸으로 세우려고 하였다는 것은 다니엘의 언행이 다리오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입니다. 다리오는 다니엘을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칙령을 내렸음에도 다니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합니다. 그 결과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에게는 이러한 행동이 괘씸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포로인 다니엘을 신임하여 총리 중에서도 으뜸의 자리에 세우려고 하였는데 왕의 칙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생각은 애초에 달랐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신임을 받을 때에도 단 한 번도 왕을 위해 정책을 수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 와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자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끊고 하나님만을 주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일에 대해 방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있음과 좋음의 느낌을 주시는 대상으로 붙잡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어떤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다니엘의 정책이나 일들은 결국 하나님의 생각대로 해나가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다리오 왕을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지정의와 언행을 움직여갔을 뿐입니다. 다만 그 결과가 마침 다리오 왕에게 이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기에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좋아하고 신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왕에게만 절을 하라는 칙령이 내려왔고 다니엘은 이전과 다름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과정에서 칙령을 어기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온 자신을 총리의 자리에까지 앉히려고 했던 왕의 신임을 생각해서라도 칙령을 져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더라도 사람이면 은혜는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모습은 이런 일반적인 생각들과는 차별화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지려면 던지라는 식으로 차별화된 모습을 보입니다. 다니엘에게 있어서 다리오 왕의 반응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였을 뿐입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느낌의 대상이자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육체로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 간의 일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정의와 언행으로 입장과 의견을 정립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새 생명의 삶을 사는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의 관계를 끊어내고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끊어내고 사라와 이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다리오 왕에 대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육체로 맺은 관계에 대해 죽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로는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갈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입장정립의 차별화입니다. 지정의와 언행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의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뿐이지 단지 방관이나 방임의 태도로 일관하지 않습니다. 방관이나 방임은 관계의 끊어짐이 아닌 오히려 그 존재를 끌어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과 같은 죽음의 효과와 무덤의 효과가 나타나면 방임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계를 지나 진정 부활의 단계에 이르러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차갑고 모질게 보일 정도로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뚜렷하고 차별화된 입장을 보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왕의 모든 신뢰를 깨뜨려버리는 다니엘처럼, 고향 사람들의 만류를 끊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브라함처럼 의견과 입장정립이 완전히 차별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입장이 정립되고 의견이 확립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적으로 보이는 부활에 참여한 새 생명의 삶에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진정 주님의 육체의 죽음에 참여되어 내 육체가 죽은 것처럼 육체로 맺은 모든 관계가 마음에서 끊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구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입장과 의견의 정립과정이 차별화되는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