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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 시험하는 돌발 기도_태승철 (누가복음 4:9~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9.11|조회수6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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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시험하는 돌발기도>의 줄거리:

광야 시험의 세 번째인 하나님 시험하기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출제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내가 출제자가 되자마자 나는 이제까지 줄곧 이어지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흐름에 돌발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 삶에는 지옥 대문이 활짝 열립니다. 출제자의 운명은 살아서도 지옥이고 죽어서도 지옥입니다.


하나님 시험하는 돌발 기도

(누가복음 4:9~13)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시험하는 돌발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시험하는 돌발 기도

본문에는 광야시험 중의 세 번째 시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시험은 항상 기도 중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에 돌발 기도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이러한 돌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돌발적인 언행으로 나타나기도 하여 문제가 됩니다.

 

세 가지 광야시험 중에서 앞의 두 시험과 세 번째 시험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떡에 대한 시험은 육체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시험이었고,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에 대한 시험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시험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권위와 영광에 대한 시험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를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권위란 곧 사람들이 내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권위란 나를 타인에게 관철시키고 받아들이게끔 하는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광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내가 영화로운 조명을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의 이미지가 아름답고 좋게 여겨지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떡이 상징하는 육체의 필요성에 대한 시험과 권위와 영광이 상징하는 인간관계의 필요성에 대한 시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민이나 이방인들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시험인 하나님 시험하기는 이방인들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시험이 우리에게 복된 이유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이라도 반복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필요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시험은 의식주의 전 영역에서 계속 나타나게 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필요성 또한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모든 관계 속에서 수백 번이라도 나타나게 됩니다. 다만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이 모든 시험을 다 만점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지막 시험에도 해당됩니다. 다만 마지막 시험은 특별히 교인이나 성도 혹은 선민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시험이라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을 분명히 정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앙의 성장은 개념을 분명히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개념을 정확하게 아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내가 하나님께 출제자가 되고 시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 출제자의 입장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출제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출제자의 입장이 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9~10절을 보면 마귀는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기에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어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증명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도 수월해지리라 유혹했던 것입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중에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지켜보던 부모가 급히 달려가 대처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같은 인간들도 그렇게 할 것이기에 하물며 하나님이시라면 반드시 대처하시리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있습니다. 다만 이 마귀의 시험의 핵심 논리에는 함정이 숨어있습니다.

상식과 논리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겠다고 뛰어내리면 받아내는 것이 부모로써 마땅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심도 분명히 공인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시험의 핵심취지는 바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만들어낸 활동의 이유에 따라서 하나님이 반응하시고 그대로 움직이시는지 확인하려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자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움직이실 동기를 만들고 그대로 이루어짐을 확인함으로써 사랑받는 아들임을 증명해 보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많은 기도 또한 이러한 내용일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께 동기부여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중단되어야만 하는 돌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알고 계십니다. 또한 그 뜻을 이루어 가시고자 이미 움직이고 계시는 중입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돌발적인 요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흐름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것은 결코 옳은 기도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대표적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는 물로 인해 불평한 사건이 나옵니다. 선민들은 출애굽을 하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하였고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도 경험하였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선민들을 먹이시는 기적 또한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민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에 마실 물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원망하였는데 그 광경이 7절에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물을 달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물을 구했다는 점이 떡에 대한 시험과 비슷한 상황이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한 일은 물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에 대한 원망을 제기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기를 목적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선민들을 계속해서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인도하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흐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민들로부터 하나님의 계획과는 일치하지 않는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단지 물이 없음을 걱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애굽에 있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며 모세를 비난하고 협박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때에 맞춰 물을 주실 계획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당장 물을 내놓으라며 돌발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정하겠다는 억지까지 부립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움직이고 계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활동 안으로 나의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활동에 올라타서 나의 뜻대로 움직여가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내가 하나님께서 지켜야 할 율법과 계명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이러한 율법과 계명을 제시하겠습니다. 저를 사랑하신다면 이 율법과 계명을 꼭 지키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십계명의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제삼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기 전에 아담 속에 있는 나의 태어남을 알고 계셨고, 태어난 후로도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이끌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나의 아버지가 되시며 나의 주권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의 흐름에 맞추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될 별도의 이유를 끼워 넣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십계명과 율법을 제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계명들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제일은, “나를 무조건 잘 살게 하실 것제이는, “나를 무조건 건강하게 하실 것제삼은, “내가 손대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실 것제사는, “나와 관련된 일들에 부흥을 주실 것제오는,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처단하실 것제육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해주실 것제칠은, “내가 하는 판단에 무조건 동조하실 것제팔은,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일들도 알아서 챙겨주실 것제구는, “내가 필요해서 찾을 때에 언제나 바로 응답하실 것제십은, “최대한 장수하게 하시고 죽고 나면 천국에 데려가실 것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지켜야 될 십계명을 제시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따져보면 대부분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아셨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며 내 몸의 오장육부의 상태를 아십니다. 내가 오늘과 앞으로 겪어야 될 사건과 사람들을 아시고 보시며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 주권 밖에서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눈에 티끌이 들어가는 사소한 일조차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230, 누가복음 127절을 보면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뿐 아니라 몸에 있는 솜털까지 세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로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나를 이끄시는 뜻은 지금도 강물처럼 흐르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상황에 맞추어서 움직이시도록 동기와 이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선민이자 성도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의 삶에 대해서는 소원 자체가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앞서 육체에서 비롯되는 시험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시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 시험의 의미를 포함하여 우리가 세 번째 시험을 통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소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소원할 수 있는 인격적 속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원의 능력은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을 소원하는 일에 쓰여야만 합니다. 이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따로 소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기에 앞서 마태복음 6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표현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의 앞부분의 내용이 주기도문의 내용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7~8절을 보면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를 갖고 하신 기도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되는 주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하늘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시기에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내가 추가로 무엇을 더 구한다면 그것은 중언부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땅에 대해 구하는 기도 또한 하나님 계획 바깥에 있는 돌발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흐름에 나의 뜻을 끼워 넣으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돌발 기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미사여구로 포장할지라도 결국 돌발 기도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대신 내가 제시하는 율법과 계명대로 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항상 나를 부자가 되게 하시고, 항상 건강하게 하시고, 항상 형통하게 하시고, 항상 원수를 처단하시고, 항상 인기를 얻게 하여주시옵소서.”라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하면서 신앙생활이라고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삶이란 어떠한 모습일까요?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검사를 받았더니 심각한 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큰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큰일이 아니라면 나에게도 큰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의 주권자이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의사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내도 남편도 모르는 중에 병이 생겼지만 하나님만은 알고 계셨습니다. 아담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언제 병이 날 것이고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나의 병을 보고 계십니다. 심지어 몸 안의 병균이 늘어나는 숫자까지 세실 정도로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다면 나의 태도 또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의사도 큰일 났다고 하고 가족들도 큰일 났다고 하지만 나는 태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나에게 나쁜 일이라면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정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병이 나면 걱정하고 돈이 없으면 죽는 줄 아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자이심을 믿으며 나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음을 믿는 자라면 하나님이 나의 오장육부를 주관하고 계심도 믿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운데 병을 생기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고 나 자신의 마음을 시험할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시험한다는 것은 병이 발견된 상황에 대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를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몸과의 관계에서 몸에서 발생하는 필요는 절대로 구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욕구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열매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여기실 수 있는 말과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병을 주셨다면 병이라는 상황에 대해 좋은 말과 행동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프고 불편하면 고통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 아픔과 고통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세상을 등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오라는 부르심입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향해서 아버지의 주권과 인도하심은 끊어져 본적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이러한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병이 난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겼습니다. 병이 걸린 상황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병이라는 상황이 낫기만을 기도했습니다. 낫기만 한다면 충성 봉사하겠다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담 이전부터 나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의 흐름에 대해서는 개의치도 않고 없는 일처럼 여깁니다. 병이 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하는 계명과 율법을 제시합니다. “내가 제시하는 계명과 율법대로 하시옵소서. 이대로 안 하시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겁니다.”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건강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돈 문제나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건강이나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기대하시며 우리에게 그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땅에 배를 붙이고 있기에 몸이 아프고 사업을 안 풀리게 하시고 자녀를 형통치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 부르는 사람들이 잘먹고 잘사는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가까이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는 착각이 몸이 아프거나 일이 안 풀리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보다 가까이 두시고자 하시기에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를 가까이 두시려는 만큼 나의 삶에 관여하시고자 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에 어려움과 불편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시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기셨습니다. 병이 나든 사업이 안 되든 그것이 시험으로 다가올 때에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됩니다. 돌발적인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의 율법과 계명을 제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제시한 율법과 계명을 지키시나 안 지키시나 관찰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코 좁혀질 수 없습니다. 이미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입장에서는 몸이 건강해도 지옥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몸이 아파도 시험을 이겨낸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낸다면 천국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모든 돌발적인 기도는 사라질 것이고 내게서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소망하는 기도를 드리는 중에 이 땅에 대해서는 내 마음에 생각과 계획과 소원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삼아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제자 코스프레를 할 때에 땅에서부터 지옥의 대문은 열립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수험생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이미 이기신 시험에 대해 매일 매일 만점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삼아 움직여 가시는 행복한 수험생의 삶을 위하여 돌발적인 기도는 십자가로 끝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셔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유전 죄의 악한 속성을 따르는 돌발적 기도와 생각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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