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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활하신 몸으로 생선 드신 이유>의 줄거리:
부활하신 몸으로 시장기를 느끼셔서 예수님은 생선 한 토막을 드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식사하시던 몸으로 승천까지 하십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생선 먹고 밥먹고 사는 우리의 일상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생선 드신 이유
(누가복음 24장 36절~53절)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부활하신 몸으로 생선 드신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생선 드신 이유’
본문을 47절까지만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진행 될 설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이 끝나게 됩니다. 순서대로라면 요한복음이 시작되어야겠지만 우리는 요한복음에 앞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요한복음을 살펴보고 로마서로 넘어갈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진행하는 이유는 저자인 누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신앙의 생사(生死)를 결정할만한 중요한 문제들을 계속해서 다루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완결하시고 사도행전에서는 증인으로써의 삶의 국면이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누가복음이 관통하고 있는 특별한 취지를 염두에 두고 다음시간부터는 사도행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시기 위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십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참 어울리지 않는 사건입니다.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갑자기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20장 26절을 보면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벽을 통과하셔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몸 상태이셨기 때문에 본문 37절에서 제자들은 놀라워하고 무서워하며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육체를 드러내시기 위해 못 자국 난 손과 발을 보이시고 생선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는 승천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진짜 모습인지를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변화산에서 몸이 변형되셨던 것처럼 본문의 경우에도 몸이 변형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나 스데반 집사님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던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빛과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이러한 빛과 영광으로 가득 찬 시간과 공간과 물질세계의 바깥에 있는 4차원의 세계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생선을 드시는 모습은 사뭇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식사는 곧 육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곧 승천하실 몸으로 생선을 드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관점에서 질문을 하나 해봅니다.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은 손과 발의 못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구태여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발을 보이시고 생선을 드시는 모습까지 보이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못 자국 난 손과 발을 보이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활하셨음을 증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배가 고파서 생선을 드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공생애 예수님의 인격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계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를 ‘인격의 계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제자들의 의심을 떨쳐내 주신 것입니다.
앞서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열한 제자들이 모여 있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의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주하고서도 기뻐한 것이 아니라 놀라고 무서워하며 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영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령과 같은 개념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을 유령으로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이들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질적인 만남의 대상으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이러한 상태를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놀라고 무서워한 이유는 예수님의 등장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고,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상태에서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된 딸을 살리시는 것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직접 보았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던 제자들이었기에 그저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놀라고 무서워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의심과 예수님의 행동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못 박혔던 손과 발을 보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20장 27~28절을 보면 도마의 의심에 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지금 마주한 예수님이 정말로 자신이 따랐던 예수님인지에 대해 의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인격의 계속성입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했던 것은 도마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공생애 예수님의 인격의 실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즉 공생애 예수님과 부활 예수님의 인격의 계속성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격의 계속성을 확인시켜 주신 이후에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신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루하루 밥 먹고 물을 마심으로써 육체를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셨다는 것은 이제부터의 모든 삶이 부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재림을 예고하시며 노아 홍수와 소돔의 멸망 직전의 상태를 묘사하셨습니다. 17장 27~28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윤리적 타락이나 도덕적 부패에 대한 아무런 묘사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도 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중에 노아의 홍수가 임했고 소돔은 멸망했습니다. 주님께서 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본문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일상에 꼭 필요한 일조차도 부활의 자리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럴 수 없다면 노아 홍수와 소돔의 멸망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입니다. 죄 때문에 멸망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멸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멸망하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먹고 마시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장가들고 시집가지 못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사고팔지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심고 집을 짓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멸망의 일차적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의 문제 때문입니다. 멸망의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선을 드신 행동을 통해서 삶은 부활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 의무적이고 당위적인 요청이 바로 복음입니다. 어쩌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임과 의무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복음입니다.
우리는 부활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은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연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만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다면 먹고 마시는 것도 죄이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죄이며 사고파는 것도 죄이고 심고 집을 짓는 것도 죄입니다.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지 못하면 모든 일은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일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무척 낯설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과 연합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면 입교하여 세례를 받을 때나 학습문답을 할 때 강조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음이 연합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최대의 과제로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낯설게 여겨지는 것이고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에서 부활 예수님은 언제나 뒷전이었습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만남과 연합은 기억되지 못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가 계속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생선을 드신 사건은 우리의 삶에서도 가장 문제시 되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저 생선을 드심으로써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생선을 먹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먹음이란 육체로 살아가는 삶의 기초가 되는 행동이기에 곧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에서 이루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16절을 보면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려졌다는 표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의 시선이 공생애 때의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고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CCTV를 연상해보시기 바랍니다. CCTV가 구역을 감시하기 위하여 좌우로 움직입니다. 그런데도 비춰지지 않는 곳을 사각(死角)지대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각지대가 우리의 마음에서도 존재합니다. 두 제자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음의 사각지대에 위치하고 계셨기에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육체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보고 입과 귀를 통해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육체의 감각이 장애를 일으켰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의 시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어떤 대상의 있음을 느끼면 그 대상에서 좋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가짐으로써 마음이 채워지고 만족하리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돈의 있음을 느끼고 돈의 좋음을 확신함으로써 돈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사람은 돈을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돈을 벌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의 느낌이 일어나는 곳이고 좋음의 확신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공백의 자리로부터 나오는 흡입력에 의해서 소원이 생기는 곳입니다. 있음과 좋음과 소원이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3종 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나타나고 그로부터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두 제자의 눈이 고정되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의 시각에서 사각지대가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음의 느낌으로부터 부활 예수님이 포착되지 않았고, 부활 예수님에 대한 좋음의 확신도 생길 수 없었으며, 부활 예수님에 대한 소원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누가는 눈이 가려졌다는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열한 제자에게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에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주시기 위해 손과 발에 못 자국을 보이심으로써 인격의 계속성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공생애 예수님의 인격의 실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시각은 여전히 공생애 예수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기적을 일으키시고 지혜의 말씀을 행하시고 임금이 되실만한 분이라는 바람을 일으키셨던 공생애 예수님을 향해서만 마음의 시각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의 시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포착할 수 있는 각도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시각이 세상에서 있음의 느낌을 느끼고자 하였기에, 좋음의 확신도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갖고자 하였고, 소원도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세상 바깥으로 탈출하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음의 시각이 사각지대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47절을 보면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는 인격을 죄라고 규정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아무리 공생애 때 기적을 일으키시고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부를지라도 그리스도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결코 종교심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주여 삼창을 한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부활 예수님과 만나고 싶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먹어야 합니다. 먹는다는 것은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부활 예수님과도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나를 동일시할 수 없다면 부활 예수님은 마음의 시각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일시하는 것은 이 세상 안에 고정되어 있는 마음의 시각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신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에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는 죄 사함 받아 멸망하지 않을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잘 때까지 모든 삶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선을 드신 것 같이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란 부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는 마음의 시각이 세상에 대해 사각지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 바깥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서 부활 예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직장에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몸으로 관계하는 직장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빠져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직장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서 알아서 사랑하셔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무대가 됩니다. 마음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직장에서 있음의 느낌을 찾고자 하지 않고 좋음의 확신을 찾고자 하지 않고 소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상태에서 하나님만의 좋음을 확신하고자 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좋은 일도 아니며 나쁜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마음의 사각지대에 놓인 상태이자 부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특성입니다.
이전에는 승진과 월급인상을 소원했습니다. 사장님께 칭찬받기를 소원했고 하는 일에서 성과를 올리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소원의 각도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삶의 현장이 마음의 사각지대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여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자마자 삶에서는 공생애 예수님이 점선으로 그려집니다. 마치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어가듯 공생애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삶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의 발생이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상태를 이룰 수 있고 이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노아 홍수 때나 소돔의 멸망 때와 마찬가지로 삶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죄가 됩니다. 있음과 좋음과 소원이 하나님께 적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빠져나온 부활의 자리에서만 있음과 좋음과 소원이 하나님께 적용되는 인격의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삶의 현장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직장에서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은 어디에 숨어서 기도만 하다가 퇴근할 때에 나타나서 도망치듯 집으로 가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일시할 때에 부활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선을 드신 것처럼 부활의 자리에서 직장의 일을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점선으로 그려진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을 따라 실선을 그려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삶의 현장에 놓이든지 그 현장은 공생애 예수님이 사시는 현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셨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장이라는 자리에서 우리가 따라 그려야 할 점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일전에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을 유체이탈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그 상태에서 있음과 좋음과 소원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삶의 주권자이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장님보다 부장님보다 과장님보다 내가 맡은 과제보다도 주권자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부활의 자리입니다. 부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한 직장에서 느끼는 것은 사장님의 있음이고 과제들의 있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움직이는 대로 다 죄가 될 뿐입니다. 먹어도 죄고 마셔도 죄이며 글을 써도 죄고 책의 페이지를 넘겨도 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을 느끼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승진과 월급을 좋게 여기지만 나는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직장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더 많이 벌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직장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부활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공생애 예수님의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공생애 예수님을 나의 삶으로 대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 예수님과의 연합의 자리는 위로는 하나님을 소원하고 땅에서는 공생애의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원점입니다. 이 자리를 놓치면 믿음은 증명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라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없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십니다. 결코 공생애 때에 이루신 기적들의 주인공이셨음을 드러내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동일시를 통하여 마음으로 부활 예수님을 만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부활의 자리에서 위로는 하나님을 소원하고 땅으로는 공생애 예수님의 삶을 대신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몸으로 생선을 드신 의미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이 땅에서 나의 삶이 이루어져 갈 자리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며 나갈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부활의 자리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누가복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으로 길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에 전해 주신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 연합한 상태가 되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을 통해 하늘을 향하고 땅을 향하여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역시 끊임없이 사도행전의 주인공들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