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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지랖과 복음은 천적이다>의 줄거리:
고양이와 쥐처럼 오지랖과 복음은 천적입니다. 오지랖은 반드시 내 마음에서 복음의 존재를 잡아먹어 치워버립니다. 아예 복음을 못 받아들이게 하고 복음을 무효화 시켜버립니다. 오지라퍼는 다른 말로 하면 마음 재벌들입니다. 이일 저일에 마음을 쓰고 지급하는 양이 어마어마한 재벌들입니다. 마음 재벌들은 절대로 복음과는 무관합니다.
오지랖과 복음은 천적이다
(누가복음 4장 14절~20절)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지랖과 복음은 천적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지랖과 복음은 천적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사야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이러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셨기에 일찍이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양이가 쥐의 천적인 것처럼 오지랖은 내 안에 들어온 복음을 잡아먹는 천적입니다. 오지랖은 복음을 배척하고 복음의 힘과 의미를 무효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래 오지랖이란 겉옷의 앞자락을 의미합니다. 겉옷의 앞자락이 넓으면 속에 어떤 옷을 입었든지 다 덮을 수 있고, 보이는 것들을 옷자락 안에 숨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들마다 참견하는 것을 두고 “오지랖을 떤다.”고 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오지랖을 떠는 사람을 두고 “오지라퍼”라고 부르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정식으로 사전에 등재되기까지 한 단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8절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려는 복음의 내용을 밝히고자 합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 사함이나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이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복음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한 준비단계에서 나타나는 과정일 뿐입니다. 복음과 연관성이 없다면 죄 사함이나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이란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의미를 정의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기 위해서 죄 사함이 필요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기 위해서 의로움을 입는 것 또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이 없다면 죄 사함과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강조 드립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영원 전부터 계속되어오는 사랑과 기쁨의 관계라는 것을 반복하여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복음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18절의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지만 이상하게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자의 자격으로 가난한 자가 언급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가난하지 않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함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문을 살펴보면 가난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프토코스(πτωχός)의 복수형인 프토코이스(πτωχοῖς)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예를 찾아보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함이란 심령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8절 말씀을 풀어서 해석해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이 임하셔서 기름을 부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관계에 참여하여 사위일체가 되게 하는 놀라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처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에서 이미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떠올려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의 팔복 중의 하나로 나타납니다. 한편 누가는 더 근원적인 취지에서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복음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목과 연관하여 말씀드리자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오지라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 즉 마음이 가난한지 부자인지가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예를 들어봅니다.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 본 것 중에 제일 비싼 점심 식사는 70만 원입니다. 제가 먹어 본 것도 아니고 들어보기만 했습니다. 그러한 점심을 한 달에 몇 번이든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부자일 것입니다. 한편 가난한 사람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삼각 김밥이라도 곁들일 수 있으면 잘 먹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한 끼에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느냐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분을 위한 측면 중에 하나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자동차를 예로 들자면 어떤 부자는 10억 짜리 차를 사서 타고 다니는데, 가난한 사람은 150만 원짜리 중고차를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함도 이와 비슷한 기준을 통해 측정해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 마음을 많이 쓸 수 있는 사람이 심령이 부유한 사람입니다. 재벌이 돈을 펑펑 쓰며 살아가듯이 이런 저런 세상일에 마음을 아낌없이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관심의 대상이 많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 산골에서 감자 농사를 짓는 할머니는 서울의 세종로에서 무슨 집회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여의도에서 국회의원들이 서로 싸우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음을 전혀 쓰지 않고 있으니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감자밭에 대해서는 온통 관심을 기울입니다. 재벌이 돈을 펑펑 쓰듯이 감자밭에 마음을 펑펑 쓰고 있습니다. 즉 무엇에 대해 마음을 쓰는지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이 등장합니다. 복음은 감자 농사를 짓는 할머니에게도 주어져야 하고 정치판의 사람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국 이 세상 안에서 무슨 대상에든지 마음을 재벌처럼 펑펑 쓰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조차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마음을 쏟아 붓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준에서 보자면 자녀도 세상에 속한 일이기에 마음을 쏟아붓는 것은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복음의 핵심 내용인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고 이끄실 때의 모습이 창세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은 안전과 풍요가 보장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 마음을 쓰는 채로는 마음에 하나님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아내 사라도 마음에서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길을 나섰는데 이방의 왕들에게 두 번씩이나 빼앗기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내를 포기하게 하심으로써 아내에 대한 마음을 제로 상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귀한 아들을 제단에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삭은 20살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에게 재벌처럼 마음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립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을 버리게 하시고자 제단에 바치라 요청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자 아들을 바치는 결단을 내립니다. 아들에 대한 마음을 제로 상태로 만들어 가난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처럼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 것으로 삼기위해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조건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도대체 마음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십니다. 누가는 성령님과 예수님을 동일한 분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록 된 18절 나머지 부분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먼저 ‘포로 된 자’가 언급됩니다. 여기서 포로 된 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액말로토스(αἰχμαλώτοις)라는 합성어가 나타납니다. “창끝”과 “포로 되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로써 창을 들이대서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된 전쟁포로를 의미합니다. 몸은 비록 적국에 있지만 포로의 입장에서는 그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을 둘 수가 없습니다. 적국의 왕이 바뀌든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든 풍년이 들었든 포로인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미국 이민 1세대들을 보면 대통령이 누가 되든 냉전이 어떻고 데탕트가 어떻고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직 미국이라는 땅에서 가족들과 함께 적응하며 살기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된 2세대 3세대가 되어서야 정치나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보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특징이 이와 같습니다. 마치 세상에 포로 된 사람들처럼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에 관심을 쏟을 수 있다면 그것은 포로가 아니기 때문이고 심령이 가난한 상태도 아닙니다. 예전에 복덕방에 가면 어르신들이 모여서 온갖 나랏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 종일 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정치권과 재벌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십니다. 아무런 현실적인 영향력이 생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관심만은 놀라우리만치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대한 오지랖이 복음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말로 복음에 대한 절실함이 있다면 두 손으로 성경을 잡고 신문은 던져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저 사회에 무관심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신문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손에 성경 들고 한 손에 신문을 드는 모호함으로는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오지랖이 복음을 무효화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운동을 하는 목사님들과 정치판에 발을 들인 목사님들은 안타까운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마음의 오지랖으로 인해서 복음이 잡아먹혀 버린 상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로 된 자의 마음의 가난함 속에만 복음은 전파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눈 먼 자’가 언급됩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갇힌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눈먼 자로 대치되어 번역된 이유는 그 유래에 있습니다. 옛날에 감옥은 토굴에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어두운 토굴에 갇혀있으면 차츰 시력을 잃게 됩니다. 포로들을 위해 횃불을 준비해주지도 않으며 토굴 속에서 언제 해가 뜨고 달이 뜨는지도 모르는 채 세월이 지나가게 됩니다. 결국 시력도 잃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완전히 무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일에 마음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세 번째로 ‘눌린 자’가 언급됩니다. 포로 된 자나 눈먼 자나 눌린 자는 기본적으로 처해있는 상황은 비슷합니다만 조금씩 어감이 다릅니다. 눌린 자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 억압된 상태입니다. 포로 된 자는 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적국에 있게 된 상황이라면, 억눌렸다는 것은 노예처럼 스스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펼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감정조차 마음대로 드러낼 수가 없으며 의지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꿈도 꿀 수 없고 소원할 수 없으며 세상을 비판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참여의 가능성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 또한 세상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 마음을 쓰는 명세서가 제로인 상태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 마음 씀이 제로인 사람들에게 복음은 들어가게 됩니다.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일어나는 일이 각 사람의 처지에 이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기에 접하는 대상들로부터 채움을 기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포로 된 자는 적국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마음을 채울 대상을 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마음을 채울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향해 마음을 흘려보내기 시작하자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수 없었던 사람이 하늘에 대해 재벌의 마음이 됩니다. 하늘을 향하여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양의 마음을 흘려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 포로로 잡혀온 상태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늘에 보내게 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유쾌함과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하여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의 특징입니다.
비록 몸은 포로가 되었을지라도 하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마음을 쏟아붓자 하늘을 향한 재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을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해지고 하늘에 대해서는 재벌처럼 마음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또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세상에 대해 눈먼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서 마음 둘 곳을 찾을 수 없었는데 복음을 받아들이자 마음을 보낼 수 있는 하늘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하늘에 쓰는 재벌이 되자마자 광명의 세계가 임하게 됩니다.
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하늘을 향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처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되고 화나고 짜증나던 마음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바뀌게 되고 하늘을 걷는 듯 유쾌함과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마음이 부자가 되어버린 오지라퍼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가 되어야 될 하나님은 머리털까지 세시고 솜털까지도 세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것으로는 참새가 떨어지는 것과 백합화가 피고 지는 것을 주관하시며, 큰 것으로는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엄청난 인구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나라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내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이루어야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는 내가 오지랖을 떨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동안 복덕방에 모여서 나랏일에 대해서 욕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말을 뱉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 대해 마음을 마구 쓰는 동안 하나님을 강력하게 배척하게 됩니다. 오지랖의 무서움은 바로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부인이고 그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배척입니다.
이것은 비단 정치권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부모에게는 자녀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자녀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저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며 오지랖을 떨기 시작하면 복음과는 무관한 삶이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청교도들의 자녀교육을 보면 개인적인 오지랖을 떨지 않기 위해 성경말씀에 비추어보는 습관을 기르게 하였습니다.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부모의 판단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행동을 했기에 잘못되었음을 깨우쳐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매를 드는 순간에도 부모의 뜻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행동을 자각시킨 다음에 비로소 매를 들었다고 합니다. 오지랖을 떨지 않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오지랖을 떨면서 개입하기 시작하면 절대로 복음은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당이 어떻고 야당이 어떻다며 오지랖을 떠는 동안에 복음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결국은 세상에 마음을 재벌처럼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지라퍼는 이 세상에 대해서 마음이 재벌인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재벌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써도 되는 분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입니다. 주권자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나님과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일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오지랖을 떠는 만큼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듯이 오지랖은 복음을 잡아먹습니다.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들어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잡아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간섭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간섭할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오지라퍼들이 모여야 할 곳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가난한 자가 되고 포로 된 자가 되고 눈먼 자가 되고 억눌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오지랖도 떨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오지라퍼인 내가 죽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신 세상에 대해 내가 오지랖을 떨어도 되는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에게 속은 유전 죄의 속성 때문에 끊임없이 오지랖을 떨며 살아왔습니다. 오지라퍼인 나를 죽여서 포로 된 자가 되고 눈먼 자가 되고 억눌린 자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대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게 만드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이 필요한 이유는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관문이며 오지라퍼인 나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이 세상을 향하여 마음의 극빈자가 되심으로써 반드시 창조의 주권자이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아들과 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죽기를 각오하고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내 속에서 꿈틀대는 오지랖이 완전히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복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은혜 위에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