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인인데 불청객이다>의 줄거리:
컴퓨터 사주나 신문의 일일운세를 보면, 인생의 고비마다 결정적 도움을 줄 '귀인'에 대한 언급이 참으로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 인생 전체를 통해서 결정적인 도움을 줄 진정한 의미의 귀인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선지자는 불청객입니다. 그래서 사기꾼들은 환영을 받는 반면, 선지자는 주로 배척의 대상이 됩니다.
‘귀인’인데 불청객이다
(누가복음 4장 21절~30절)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귀인’인데 불청객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귀인’인데 불청객이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가르치신 예수님에 대해 나사렛 사람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는 모습이 나타나고 예수님과 이들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렇게 분위기가 험악해진 이유는 예수님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의 기록을 따르자면 예수님께서 마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을 도발하시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반목과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시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당시에 십자가 형벌이 반민족주의자들과 매국노들에게 내려지는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자면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갈등의 진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귀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닙니다. 요즘 유행하는 컴퓨터 사주나 일간 신문에 나오는 운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인생의 고비마다 결정적 도움을 줄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사주에서 말하는 귀인이라는 표현을 차용하여 본문의 말씀을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가야 할 길과 땅을 향해 뻗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늘과 땅의 인생길을 막힘없이 뻗어가게 해줄 사람이 있다면 귀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선지자들이 바로 그 귀인입니다.
사주나 운세에서 귀인이 나타나리라는 점괘가 나오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은근한 기대를 갖기도 합니다. 귀인을 만날 수 있으면 바라는 대로 일이 잘 풀려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선지자는 인생의 하늘길과 땅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를 가진 귀인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불청객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불청객은 초청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 앞에 나타났을 때에 도저히 환영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들은 바로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으나 동시에 하늘과 땅의 길을 열어주는 귀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서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당시의 속담을 인용하십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를 드러내고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속담을 전면에 내세워 복음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시점이었습니다. 공생애를 통해 전달하시고 당신 스스로가 복음이 되시기 위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인생의 열쇠가 되는 기가 막히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이는 더 나아가서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목사님들이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부흥을 기대하기 마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흥이 아닌 실패를 예상하시며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사업에 비유하자면 망할 것을 알면서도 사업을 시작하신 셈입니다.
앞선 18~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0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같은 의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난한 자의 특징은 전쟁 포로와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고 토굴에 갇혀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며 노예처럼 외부의 힘에 억눌려서 생각과 꿈을 마음대로 펼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에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쓰는 마음이 제로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뜻에 지급되는 마음이 제로가 되어야 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향해 사용되는 힘이 제로가 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마음 쓰인 것들의 명세서가 있다면 아무 내용도 적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가난한 사람이 돈을 쓸 수 없듯이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과 뜻과 힘의 가난뱅이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향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쓰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쓸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복음은 단순히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죄 사함을 받아 깨끗해져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의롭다 함을 입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마음이 채워지고 기쁨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게 하는 복음을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었던 고향 사람들에게서는 그러한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마음이 가난하게 될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상당히 험악합니다. 누가의 기록대로라면 예수님이 먼저 고향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도발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들이 잘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을 잘 아는 자들로써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드러낸 태도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증언하다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 에마르튀룬(ἐμαρτύρουν)로 칭찬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저렇게 은혜로운 말을 하다니! 어떻게 저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의 태도가 바로 이러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가 참으로 차갑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시더라도 고향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구경거리처럼 여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서 부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대체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일까요? 더구나 이스라엘 나라는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써 귀하고 존경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주석이나 해설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큰일을 성취한 사람일지라도 고향에서는 어릴 때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하여 외면과 질투를 받게 된다.”는 식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고향에서 성공하거나 업적을 이룬 사람이 나오면 개천에서 용 났다며 좋아하고 자랑으로 삼고자 합니다. 지렁이 같았던 유년시절을 알고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성공한 지금에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같은 경우에는 충북의 시골마을에 생가가 보존되어 있고 동상까지 세우려 하였다고 합니다. 또 동해안의 7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포항 근처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고향마을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경우에는 사익을 추구하다가 재판을 받아 구속수감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 내에서는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라면 고향에서도 환영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지자는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은 그 사람이 고향에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자랑스러워하고 그 사람의 측근임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선민공동체 안에서조차 환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치관의 차이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영받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소중한 가치들을 획득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이 세상의 가치들을 하나님의 라이벌로 규정하며 마음에서 버리라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고향에서 상경하여 돈을 많이 벌어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오자 모든 사람이 금의환향한 그를 칭송합니다. 그 사람이 베푼 잔치에 가서 음식을 먹고 축하하면서 측근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합니다. 한편 어떤 사람은 고향을 떠났다가 선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돈은 하나님과 라이벌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배우자를 겸하여 섬길 수도 없다! 하나님과 자녀를 겸하여 섬길 수도 없다! 하나님과 사업을 겸하여 섬길 수도 없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되는 배설물로 여기라!”고 합니다. 갑부가 되어 온 사람은 고향 사람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학교에 기탁을 하고 미비한 시설들을 보완해주기도 하며 삶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라는 사람은 지금까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고 마음 써온 모든 것을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갑부는 돈 걱정하는 사람에게 돈 버는 요령을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기고 꿈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돈 걱정하는 사람에게 돈이 아닌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주기는커녕 소중히 여기는 돈을 배설물이라 하니 확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했을지는 이어지는 구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27절에 보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사렙다 과부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시돈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돈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의 출신지입니다. 이세벨이 아세라와 바알숭배를 만연하게 했던 인물이었음을 염두에 두자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돈을 얼마나 싫어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히어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정작 엘리야에게 선행을 베풀었던 사람은 시돈 땅의 사렙다 과부뿐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만 역시 이방인으로써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는 많았으나 정작 엘리사가 병을 고쳐주었던 것은 이방인 나아만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 아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이신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여 버릴 것임을 드러내시고 이방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를 깨달은 나사렛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반민족주의자이자 매국노로 여겨 낭떠러지에 밀쳐죽이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하는 일을 염두에 두자면 여러분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잘먹고 잘사는 사람들 앞에서 전쟁 포로의 마음을 가지라고 귀찮게 굽니다. 대한민국의 어엿한 시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한민국에 포로로 잡혀와 갇혀 있는 상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과 동떨어진 국외자(局外者)가 되어야 합니다. 국외자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바깥에 있는 사람입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관심을 갖고 다른 부모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자녀에 대해 국외자의 입장이 되라고 말합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국외자가 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이방 왕들의 요청에 따라 쉽게도 들여보냈던 것과 같습니다. 말 한마디 아쉬워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국외자인 것처럼 아내를 대합니다.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지불하면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은 이렇게 국외자가 되라고 외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와 같은 편이 되어서 격려해주거나 위로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실제로 교계에서도 이것을 잘하는 목사들이 스타 목사가 됩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뭉클해지고 세상일이 다 잘될 것 같습니다. 예배당에 가서 앉아만 있어도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얼마나 이 세상에 대해서 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선지자가 했던 일들은 사업이 안 풀려서 걱정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사업에 대해서 국외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사업에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또한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해 눈먼 자처럼 되기를 외쳤습니다. 눈이 먼 자가 관심할 수가 없듯이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십니다.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도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이끌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일에 대해서는 눈먼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국외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개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녀든 배우자든 사업이든 민족이든 나라든 무엇 하나 하나님의 개입 바깥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전쟁 포로가 된 것처럼 세상에 대해 국외자가 되어도 나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기에 국외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국외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개입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은 부인됩니다. 눈먼 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만큼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거짓 뉴스에까지 마음을 빼앗긴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릴 마음은 그만큼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척을 해서 목회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장로 선거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아직 장로님이 없던 시기였기에 이미 은퇴하신 장로들이 시무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저의 기도와 내용이 상반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퇴하신 장로님들은 모든 관심이 장로 선거에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장로 선거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의 내용 자체는 “장로 선거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꾼이 뽑히게 하시고, 온 교인이 마음을 다하여 일꾼을 뽑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지극히 당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기도는 관심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장로 선거였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저는 오히려 광고할 때마다 장로 선거에 대해 관심을 끊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은퇴 장로님께서 교인들이 좀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유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성도들이 장로 선거에 대해서는 마음을 끊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동안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을 뽑도록 역사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장로 선거에 집중한다면 하늘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장로 선거가 하나님 뜻대로 될 수도 없습니다. 선거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관계나 인간적인 정으로 선거를 치르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게 성도님들께 선거에 대해 마음을 끊기를 요청하던 중에 선거는 이루어지게 되었고 여덟 분의 장로님이 뽑혀서 활동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고 듣고 있습니다.
국외자가 되라고 외치는 선지자는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원수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멀쩡히 눈을 뜨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밝히 보면서 관심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들에게 눈먼 자가 되기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소원과 희망의 날개를 펼치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날개가 꺾인 새처럼 되라고 종용하니 미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만 보자면 이런 원수가 달리 없습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입만 열면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어야 함을 언급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이 조금이라도 이 땅에 지불되어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가면 이제 하늘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힘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고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마음과 뜻과 힘을 쓰는 동안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주권은 통째로 부인되게 됩니다. 이러한 진실을 선포했던 선지자들은 생의 열쇠를 쥔 사람들입니다. 귀인 중의 귀인입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에게 포로 된 자가 되게 하고, 눈 먼 자가 되게 하고, 눌린 자가 되게 하려고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만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마음이 한 방울이라도 세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실 때에 고향사람들 중에 이러한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오히려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그분을 마음에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좋아하는 대상이 모두 이 땅에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자 했기에 선지자를 배척했듯이 예수님도 배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되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만 인정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이방인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 위에 우뚝 서게 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1등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데에는 그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결국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되 내가 세상을 많이 얻는 방식으로 그 힘을 써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위에 선 주권자가 되고자 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권과 전능하심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소원을 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위에서 주권자 노릇을 하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너무도 재미있고 좋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정말로 좋다면 그 주권 앞에 나를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랑을 받기만 원하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마음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계획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 위에 있는 주권자 노릇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포로 되고, 눈먼 자가 되고, 눌린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지불할 수 없는 극빈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 대해 마음을 극빈자로 만들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힌 사람은 세상에 대해 국외자가 됩니다. 못 박혔기에 세상에 대해 눈먼 자가 되고, 눌린 자가 됩니다. 못 박힌 사람만이 세상에 마음을 줄 수 없는 극빈자가 됩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한 인생길을 열고 땅을 향한 인생길을 여는 열쇠를 쥔 선지자들을 이방인들은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배척합니다. 복음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반민족주의자이며 매국노라 여겨서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복음이 무엇이며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최고이셨습니다. 나를 세상에 대해 포로 된 자가 되게 하고, 눈먼 자가 되게 하고, 눌린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숨어있는 영원하신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조건 받아들임으로써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국외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대해서는 포로 된 자가 되고, 눈먼 자가 되고, 눌린 자가 되어서 소원과 꿈을 가질 수 없게 하여 주심으로써 선지자이신 예수님이 가져오신 삶의 열쇠를 받아 하늘을 열고 땅을 열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