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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무용지물 자아의식의 행복_태승철 (누가복음 5: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9.17|조회수7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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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무용지물 자아의식의 행복>의 줄거리:

세상이 나를 그 어떤 일로도 필요로 하지 않는, 용도 제로의 쓸모없는 인간인 것이 공개적으로 확인되고 드러나는 상황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하늘에서 정해진 나의 역할을 맡기려 하실 때, 제일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 무용지물 자아의식입니다. 무용지물 자아의식으로만 삶은 신바람 판이 됩니다.


무용지물 자아의식의 행복

(누가복음 5:1~11)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무용지물 자아의식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무용지물 자아의식의 행복

제목은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진 자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역할과 활동을 수행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용지물에게 무슨 역할이 주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행복한 역할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부모 혹은 배우자라는 가정 내의 역할로부터 시작하여 집 밖에서 수행하게 될 모든 역할들이 행복한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유능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전문지식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 면허증이나 자격증을 가지고 어떤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 다양한 스펙을 가지고 있거나 선천적인 능력이나 장점이 많은 사람, 후천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다양한 방면에서 획득한 지식을 통해 주어진 상황을 잘 대처하고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람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능한 사람은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고 필요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획득한 다양한 종류의 지식들이 마음에서 활성화되는 동안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은 어떤 일에서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유능함으로 대표되는 세상에서 습득한 능력이나 지식들이 우선적으로 삶에 적용되면 절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과는 연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들을 수 없다면 연결될 수 없고, 연결될 수 없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역할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세상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지식도 없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서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때마다 주어지는 지시를 받아 역할을 수행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고자 몸부림칩니다. 스펙을 쌓고 각 방면의 책을 읽으며 유능함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때마다 주시는 말씀을 듣고 행동하려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해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나가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이 세상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살기 위해서 반드시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져야만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말씀드린 대로 가진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과의 연결은 열리게 됩니다.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곧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 열리게 되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지식을 주시되 미리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마다 주시게 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었던 제자들의 역할이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다면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여전히 이전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와 책임과 의무와 역할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지속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정확히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예수님을 만나셨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역할을 부여받았다면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이전에 수행하던 역할이 지속되고 있고, 오히려 이전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반드시 예수님이 주시는 새 역할이 주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던 가버나움의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붙들어두고자 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능력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끌어당기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보고난 후 예수님을 자신들에게 끌어당기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선택을 합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려던 사람이나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의 차이가 나타난 것은 마음가짐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려고 했던 자들은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미리 세웠던 소원의 성취와 문제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끌어당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과의 관계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었을지는 모릅니다. 이렇게 관계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신앙이 아닌 종교입니다.

반면에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특이한 성향이 발견됩니다. 8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의 기적을 마주하고도 예수님을 끌어당기려하지 않고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에게 좌절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용도가 제로임을 발견하고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 일행에게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예수님께서는 역할을 부여해주십니다.

 

베드로 일행이 처해있던 상황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은 어부로써 가지고 있던 지식과 경험이 있었습니다. 특히 갈릴리 바다라는 특수한 장소에서 어업에 대한 전문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이들의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리는 바다라고는 하지만 길이가 21km 폭이 13km의 호수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 깊은 곳에는 물고기가 없다고 합니다. 헐몬산 꼭대기의 눈 녹은 물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에 깊은 곳으로 갈수록 물이 차가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고기들은 차가운 온도를 기피하기 때문에 해가 뜨면 수온이 올라가는 가장자리로 몰려와 머물게 됩니다. 어부들은 이러한 특수한 환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결과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고 이들의 심경에도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베드로 일행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중에는 주라고 부르는 점이 이들의 심경변화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버나움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끌어당기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 고기잡이를 위해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간청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반응 또한 가버나움 사람들에 대한 것과는 반대로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셨고 새 역할을 맡기십니다.

 

베드로는 왜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일까요?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곁에 계신다면 자신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이 장면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다른 지역에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셨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배에 오르셔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때까지는 베드로와 예수님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연관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마주했을 때에 가버나움 사람들과는 다른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 아닌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짝사랑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자신의 상황을 보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에 5절을 보면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은 순종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가 못 잡았다면 그 누구도 못 잡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무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오히려 다행입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는 탁월하신 선생님께서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무지하신 걸 보니 제가 고기잡이의 전문가로써 선생님께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고기가 한 마리도 안 잡히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힙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타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같이 끌어당겨서 두 배에 가득 채웠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의 유능함을 드러낼 수 없었고 좌절하여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예수님 곁에 있고 싶지만 무능함을 드러낸 자신이 있을 곳은 없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고기잡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탁월하심을 보았으니 고기잡이조차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을 떠나시기를 간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죄인이라 칭합니다. 죄인이라 번역 된 말은 헬라어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로써 과녁에서 빗나갔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과녁이 무엇이냐에 따라 죄의 내용이 결정되게 됩니다. 경처가(驚妻家)인 사람에게 죄인은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서 죄는 법을 어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기대를 벗어난 사람이 죄인이 됩니다. 베드로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긴 이유는 예수님의 기대에 어긋났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능력과 지혜와 기적의 예수님께서는 고기잡이에 있어서도 베드로를 초월하고 계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시다면 그 기대에 벗어나지 않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라는 과녁에 적중시킬 능력이 없음을 드러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 대한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오히려 기존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른다면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그러하셨듯이 결별을 선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자들에게 새 역할을 주십니다. 다만 이때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나라를 회복하고 다윗 왕국을 재현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 또한 그러한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가 곧 자신이 무용지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를 불러 따르게 하시고 새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그러자 바닥으로 내쳐졌던 좌절의 순간이 변하여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됩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다윗 왕국이 재현되는 상황까지 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3년을 따르게 됩니다. 이 시간은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무용지물이나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능력에 근거하여 밝은 미래를 전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박살나게 됩니다. 이 땅에 이루어질 다윗 왕국의 꿈이 박살나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은 하늘까지 따라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역할이 본격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감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자 무용지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비로소 역할이 주어지게 되었고 역할 수행에 필요한 지식이 때마다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전하다가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에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십자가 사건 이후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산헤드린공회에 서는 순간에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졌기에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용지물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모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을 만큼 부모로써 무용지물입니다. 배우자로써도 무용지물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이 부여한 어떠한 역할에 대해서도 무용지물이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는 사람만을 따라오라 부르십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역할을 위한 도우미 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결별을 선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무용지물로 여기는 자를 예수님께서는 부르십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역할에 대해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부르시고 부활 승천에 참여토록 하셔서 그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이 이루어지고 이제 하나님이 시키시는 배우자의 역할을 수행해가게 됩니다. 부모로써의 역할도 마찬가지고 직장에서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출근해서 할 일은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회사에서 무용지물이라는 고백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따라오라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여기는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철두철미하게 언제어디서든 무용지물임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무용지물입니다. 지금 박사든 의사든 판사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나의 결론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결론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 수행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하나님이 주신 지식으로 수행해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바람으로 행복한 삶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용지물인 사람을 따라오라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시며 하나님과 연결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중에만 태초부터 세워두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주어진 역할이 나를 통해 수행되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통해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잘나가는 친구를 보며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력서를 내는 곳마다 퇴짜를 맞는다고 해서 무용지물이라고 느끼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의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늘로 올라가는 경험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처럼 무용지물의 자아의식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나의 마음을 끌고 하늘까지 올라가 앉히시는 경험을 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기존의 관계들이 새롭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신바람 나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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