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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부흥>의 줄거리:
예수가 나를 피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아니, 나는 예수님을 만났어, 라고 단언하십니까? 정말 만남이 확실합니까?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는지 피하시는지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를 모르면 예수 못 만난 사람들이 예수 이름 부르며 구름떼처럼 모이는 이상한 부흥(?)도 가능합니다. 귀신의 예수 전도처럼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 부흥도 있습니다.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 부흥
(누가복음 5:12~1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 부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 부흥’
엊그제 “귀신의 기독종교 제작 과정을 견학한다.”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에 이어서 귀신이 일으키는 예수 부흥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부흥이 실은 귀신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침 받은 나병 환자에게 경고하시면서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 말씀은 다소 의아합니다. 나병 환자가 나아서 돌아다니면 굳이 나았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철저히 격리되어 동네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혹시 불가피하게 들어올 일이 생기더라도 멀리서 크게 소리를 질러 나병 환자임을 알려야만 했습니다. 이를 숨기고 마을에 들어오는 나병 환자는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에 대한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 대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나병 환자를 고치는 것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났으니 소문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지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소문은 사방으로 퍼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몰려든 사람들을 피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피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장면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피하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부흥의 순간은 요즘 시대의 목사님들에게 있어서는 로망입니다. 대체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피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사랑한 대상이 예수님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군중 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셨기에 예수님을 만남이 확실히 구분될 수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접촉이 겉으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사실 자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을 만났는지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이 예수님이 피하신 군중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이자 하늘에 감추었던 비밀이 계시된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사탄이나 그 졸개들인 귀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고 관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성령님 못지않게 귀신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발휘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살펴보면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귀신의 교활함과 강력함과 주도면밀함에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전도하고 영접하는 일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한편 귀신도 성령과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도하고 영접하게 합니다. 여러분도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인지 귀신을 통해 영접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하실 것입니다.
먼저 그 기준을 제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랐다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을 밀착시켰다는 것입니다. 흔히 “꿈과 비전을 가지라”고 대표되는 말들이 이와 같은 유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사람들이 세상에 마음을 밀착시키고 기쁨과 만족을 찾도록 유도합니다.
이어서 5~6절을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승천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하늘로 향하는 것이 성령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공중의 권세 잡은 귀신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몸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이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로 가지 못하게 하고, 하늘을 소망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귀신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귀신의 영향을 받는 동안에는 예수를 영접하더라도 땅을 떠나고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땅으로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마음에서 정말로 좋아하는 대상은 땅에 있습니다. 그 대상은 가족일수도 있으며 건강이나 형통이나 출세나 번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동안에 마음은 세상의 붙박이가 됩니다. 이것들을 추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땅으로 끌어당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에 붙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는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불만과 걱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로 인해 기분이 나쁜 상태라면 그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걱정 또한 마음을 붙인 일이 원하는 대로 안 풀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내가 왜 기뻐하거나 불만을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면 마음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땅에 붙어있는데도 예수님을 부르고 찾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선 마음이 땅에 붙은 사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묵인한 채로 예수님 부르기가 계속되고 있다면 귀신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은 사건을 통해 이 기준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기독종교 지도자들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이 땅에 붙어버린 상태를 묵인한 채 예수님을 전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이단 사이비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일은 정통교단 안에서도 버젓이 행해져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마음 붙이기를 묵인한 채 예수 전하기는 수천수만을 넘어서 수십만 수백만의 대 부흥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은 귀신에 의해 일어난 부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나병 들린 사람이 깨끗함을 받은 사건을 통해 바른 신앙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나병 환자는 절대로 동네로 들어와 타인과 접촉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나병 환자가 예수님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로 앞까지 왔고 예수님께서는 직접 손을 대시며 고쳐주십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는 나병 환자가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듯이 예수님과의 격리가 전제되게 됩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역사를 받는 모든 사람은 마음을 땅에 붙이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소개되어도 예수님과 직접 마주하게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밀착된 세상이 나와 예수님을 격리시키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는 선민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선민사회는 본래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시키며 살아가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러한 선민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영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상태가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어 낫게 하십니다. 분명한 밀착이 성령에 의한 예수님을 영접하는 방식입니다. 반면 귀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할 때에는 마음이 세상에 붙었음을 은폐시킵니다. 실은 예수님과의 사이에 세상이라는 담으로 막혀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세상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격리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넘어서서 예수님과의 대면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내 마음 사이에는 가로막는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매여 있고 붙들린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나와 접촉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에 의한 예수님 영접과 귀신에 의한 예수님 영접의 차이점입니다.
또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는 방식이 특이합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저 고쳐 달라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깨끗해지기를 포기하겠다는 뜻일까요? 문자대로만 해석하자면 그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의 마음상태를 고려해보면 이 고백에서 상당히 특이하고도 낯선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강청함으로 예수님께 병 고침을 구해야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는 여유라도 부리듯이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에 의해서 나타나는 예수님 영접의 또 다른 특성입니다. 소원하기 즉 욕구하는 것은 사람의 인격적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마음의 공백 때문에 생겨나는 소원하기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으로부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소원하기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게 됩니다.
소원하기를 예수님께 넘겨드릴 수 있는가를 통해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그러한 바람에 대해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붙이게 됩니다. 사업에 대해 소원을 갖는 주체를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망하든지 흥하든지 예수님께서 소원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일이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부모라면 자녀에 대해 예수님이 소원을 가지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소원하는 인격적 기능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땅을 향한 소원이 없어진 것이지 소원하는 기능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기본 욕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것을 채우는 방법이 제사장을 만나라는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거의 타락했지만 본래 제사장의 사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자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과 한 인간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마음 사이에 티끌만 한 대상도 끼어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위한 행위가 바로 제사였습니다. 티끌만 한 것이라도 붙잡게 된 마음을 제물로 바쳐지는 양과 동일시함으로써 죽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밀착되기 위해 세상과 밀착된 마음을 죽이는 제사를 수행하는 자가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해졌음을 증명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제사장이 상징하는 의미를 확인시켜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여 관계를 성립시키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한분께만 밀착되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에베소서 2장 1~2절에 이어 3절을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와 만나는 것들을 마음이 원하게 되는 것은 귀신이 역사하여 벌어지게 된 악의 현실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을 향해 소원하는 것이야말로 귀신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세상에 대한 소원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귀신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한 소원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교계의 특정 교단들은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소원을 갖는 것을 인정합니다. 제가 속한 통합측 장로교는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성향이 적다고 여겨지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구하는 대신 은근히 구하고 있을 뿐이고 끈질기고도 지속적으로 이 세상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귀신에 의한 예수 부흥이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통교단의 현실이 이러하니 이단 사이비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노골적으로 소원을 품든지 은근히 지속적으로 품든지 세상에 대한 소원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땅을 떠나 하늘로 가서 하나님 갖기를 소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며 구름떼처럼 몰려와 부흥을 이룰지라도 귀신에 의한 부흥입니다.
어제 십자가 온라인 교회의 대화에서 귀신의 전도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땅과 하늘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한 목사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무척 유익한 단어를 언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독일의 몰트만 같은 신학자로부터 시작해서 이단 사이비들까지 참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한다는 소리를 하는 모든 사람이 이단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13절을 보면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이 땅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이 귀신으로부터 예수를 영접 받은 결과인 이유는 땅에 대한 사랑을 영원까지 연장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는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갈 것을 요청합니다. 하늘을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불에 타서 없어진 뒤에 새롭게 등장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귀신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하게 되면 마치 집을 리모델링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집터를 리모델링 하고 증축하여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의미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스스로를 나그네로 여겼던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애착을 가지고 고쳐서 영원히 살아갈 곳이 아닙니다. 이것은 귀신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시면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있는 새 집을 바라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물론이고 정통교단 중에도 귀신에 의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할 것과 새롭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독일 신학계의 탁월한 학문적 소양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몰트만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의 목회자들과 인기와 반응에 민감한 신학적 저널리스트로 전락한 미국의 목회자들에 이르기까지 귀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귀신을 통해 예수를 영접한 자들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승천하고 함께 하나님 우편에 앉힌바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땅을 떠나는 것이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 땅을 향하여 소원하기는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여 진정으로 만나며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기 위해서라도 소원하기를 예수님께 반납함으로써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세상에 대한 소원이 노골적으로 솟아나고 은근히 솟아날 때마다 죄악 된 나의 인격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역사가 반복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