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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종교심에서 믿음으로의 전환>의 줄거리:
'믿음'은 복음 관련 진리의 내용 중에서 참으로 기본적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16면체일까요? 아니면 32면체? 믿음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생각하며 표현하도록 촉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뒤따르는 삶의 현장 속 열매들이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종교심에서 믿음으로의 전환
(누가복음 5:17~20)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종교심에서 믿음으로의 전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종교심에서 믿음으로의 전환’
본문에는 예수님께로 가기 위하여 지붕을 뜯어냈던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그 중 앞부분의 20절까지를 통해 종교심이 어떻게 믿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귀신은 오늘도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귀신 역사의 주목적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땅에 매이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귀신의 최고의 전략은 마음의 공백을 땅에서도 얼마든지 채울 수 있고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귀신은 우리 마음의 귀에 대고 이 세상의 가치를 얻을 때에 마음은 채워질 수 있다는 확신을 넣어주었고 그 결과 우리는 거의 무의식중에 이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을 붙이고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하나님의 이름을 영접하고 성령님을 믿게 된다면 신앙은 종교가 됩니다. 이러한 종교심이 만들어낸 조직이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창시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제시하셨고 복음에 입각한 믿음을 요구하셨지 기독교라는 조직으로 이루어진 종교를 창시하지 않으셨고 복음이 종교가 되기를 바라신 적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종교심이 아닌 상태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즉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고 싶어 하는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가치에 붙어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영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귀신의 역사에 묶여서 예수님을 영접한 상태의 종교심을 탓하는 선에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종교심이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온당한 신앙심으로 바뀔 수 있음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는 앞선 본문을 통해 종교심이 귀신의 역사임을 밝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종교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심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이들이 가족인지 친구인지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편의상 중풍병자와 네 친구들이라 가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을 듣고 중풍에 걸린 친구를 침상에 메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이미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서 예수님 앞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말씀을 듣고자 모여 있었기에 마냥 기다린다고 해서 자신들의 차례가 올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친구를 예수님께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자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택은 슬라브 형식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서 올라가 기도를 하거나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구를 침상에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기 시작합니다. 진흙과 나뭇가지 등으로 만들어진 지붕이라지만 침상이 들어갈 정도로 뜯어낸다는 것은 대단히 무례하고도 무모한 행위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결국 친구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특별합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바라던 것은 죄 사함이 아니라 친구의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짜고짜 죄 사함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셨으니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죄 사함은 허락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이 보셨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병 고침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지도 않았던 죄 사함까지 선언하신 믿음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을 할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 주일마다 예배당에 출석합니다. 혹은 지역 예배당에 등록이 되어있습니다. 세례식을 거행했거나 성만찬에 참여합니다. 평소에 성경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등의 직분을 맡아 활동을 합니다. 헌금이나 선교활동 구제나 봉사 등도 그러한 표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어떤 표식을 보였기에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지붕을 뜯어서 침상을 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는 사람의 표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다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불요불굴의 의지입니다. 이 의지가 흔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그 자체로 믿음이냐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는 결국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들보다 더 일찍 출발하여 예수님의 앞자리에 와있던 사람들이야말로 믿음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에도 병자가 있었다면 중풍병자와 친구들보다 더 간절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기가 겪는 병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보입니다. 그 병에서 놓여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다른 어떤 병자보다도 우선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신 믿음이란 병이 낫기를 바라는 불요불굴의 의지는 아닙니다. 이러한 의지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이 낫게 해주시리라는 능력을 믿었다는 것일까요? 이 또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절실하게 믿고 있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면서 아침부터 와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말씀을 듣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앞서 온 사람들의 믿음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특징이 하나 있다면 다섯 명의 마음이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한 마음이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들은 중풍병자 친구를 낫게 하겠다는 생각에 공감하고 하나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운집하여 더는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의 상황판단의 내용을 바꾸게 됩니다. 이제 이들의 우선적 관심은 중풍병자가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다는 현실이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됩니다. 설령 이러한 의식이 일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중풍병자의 치유보다도 일단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우선적인 관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기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 차례가 가까이 올수록 이제 병이 낫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끌어들이려는 종교심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명은 지붕을 뚫고 내려가던 순간에 예수님이 목표였습니다. 병이 낫는 것은 나중이고 일단 친구를 예수님과 만나게 하겠다는 목표가 이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 중에 예수님의 치유능력을 의심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의 소원을 못 들어주겠느냐는 심정으로 이러한 일에 동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 친구조차도 병이 낫든지 말든지 일단 예수님을 만나게 하자는 목표에 열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인지상정입니다. 제가 독일에 유학을 갔을 때에 이미 유학중이시던 분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곳으로 가든 유학이 쉽지 않은 일이기에 독일 유학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계통은 좀처럼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유학 생활이 10년 차에 이르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분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에는 꿈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수가 되어 후학양성에 이바지하고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자로써의 인생을 살겠다는 꿈으로부터 유학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면서도 박사 학위를 마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꿈은 나중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후학양성이나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 같은 고결하고 멋진 이상과 꿈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후학양성을 하는 교수는 못되어도 좋고 괄목할만한 성과를 못 남겨도 좋으니 어떻게든 박사 학위만 받아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박사 학위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박사 학위조차 받을 수 없는 시간이 지속되다보니 이제는 박사 학위가 수단이 아닌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마음상태가 이러했습니다. 처음에는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종교심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단이신 예수님께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적어도 이 순간에는 예수님 자체가 목표가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이 질병의 치유를 향하고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다섯 명의 마음은 예수님께로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지붕을 허물기 시작하였을 때에 예수님의 머리 위로 먼지가 떨어지고 좌중의 시선이 천장으로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지붕을 다 뚫고 내려오기까지 그 자리에서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목표로 한 다섯 명의 마음이 큐피드의 화살처럼 예수님께로 뚫고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계셨지만 정작 마음을 예수님께로 보내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전부 자신의 병이 완치되기만을 바라며 마음을 흘려보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명만이 예수님을 과녁으로 삼아 마음을 쏘아 보내고 있습니다.
이윽고 침상이 내려오고 예수님과 중풍병자가 대면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예배당에 들락거려서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섯 명의 이야기에는 삶의 중차대한 문제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현장에서 드러나야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가 선언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리라는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수 없으리라는 의심을 해도 믿음이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병에 대한 관심을 이차적인 것으로 미루어두고 예수님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회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다섯 명의 마음은 공통적으로 예수님을 의식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과녁삼고 정조준하여 치달았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보였던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은 많았으나 예수님을 일차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사람은 이들 외에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병을 낫게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이 종교심이고 귀신이 역사하는 잘못된 예수님 받아들이기입니다. 귀신은 인간의 유전 죄에 숨어 활동합니다. 이 유전 죄의 정체를 인식하는 것은 예수님조차도 강요하실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모인 사람들 속에서 다섯 명만이 믿음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이 모임 자체가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일차적 관심이자 마음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믿음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가장 큰 관심이었던 중풍병은 이차적인 문제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셨고 이것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중풍병자의 등장을 계기로 이 자리는 죄 사함의 신학적 논쟁의 장소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풍병은 완전히 소외된 문제가 됩니다.
죄 사함이 선언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을 일차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마음의 화살을 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논쟁을 마무리 지으신 후에 중풍병을 고치십니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중풍병의 치유가 죄 사함에 뒤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관심이 되는 믿음으로부터 죄 사함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이 선언되자 두 번째 관심으로 밀려났던 중풍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과 죄 사함의 문제가 더 우선적 문제임이 드러나자 중풍병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던 것처럼 저절로 해결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중풍병과 같은 문제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문제들이 중풍병이 나은 것처럼 부수적으로 여겨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되어가는 삶을 경험하고 싶으시다면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예배당이나 기도원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종교심에서 시작됩니다. 회사에서 승진이 마음에 붙어있습니다. 예배당에 와서 기도를 할 때에도 “사장님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금년에는 승진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할 때에 자꾸 승진으로 가는 길이 막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친구들이 모인 무리로 인해 예수님께로 나갈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풍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문제로 승진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부르시는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심을 믿음으로 바꾸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승진을 마음에 붙잡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귀신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예수님이 가신 하늘로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귀신의 역사가 진행되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귀신의 역사를 마냥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방치한다면 오히려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승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음을 땅에 매이게 하는 것이 귀신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승진을 하게 해서 더욱 마음을 매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를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을 붙이고자 했던 승진을 막으십니다.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왔을 때에 무리에 막혀서 낫고자 하는 희망이 좌절되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소원하는 것들에 대해 좌절하게 하십니다. 망하게 하시고 기도를 안 들어주시고 장애가 생기게 하시고 실패하게 하십니다. 승진을 일차적으로 관심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망함과 장애와 실패는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호입니다.
지금까지는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에서 첫 번째 목표로 붙잡고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소원하고 애쓰는 것들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삶이 귀신의 역사의 현장이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태를 방치한다면 오히려 삶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의 무분별한 성공을 막으십니다. 그 이유는 종교심을 믿음으로 바꾸어서 하나님께로 가게 만들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첫 번째 목표로 삼음으로써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불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어가는 사람들은 첫 번째로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라는 것은 첫 번째 관심을 몸이 아닌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세의 사건은 그대로 십자가로 옮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대에 달린 구리 뱀과 십자가에 달리실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의 구리 뱀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타나야 할 곳은 예배당이 아닙니다. 승진이 마음의 첫 번째 목표가 되려는 회사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와 자녀가 첫 번째 문제로 느껴지는 가정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된 것들을 붙잡은 채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종교심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에 가려져 있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찾고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에서 자꾸 일이 안 되고 문제가 생긴다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이 안 되는 것은 오히려 형통입니다. 마음을 붙이고 있는 일에 대해 좌절하고 실패하게 된다면 하나님을 찾기에 쉬운 환경이 주어진 것이니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시며 종교심을 막으시고 귀신의 역사를 차단시키십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첫 번째 과녁으로 삼아서 큐피드의 화살처럼 내 마음을 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쏜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은 내 마음에 첫 번째 의식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들어오고자 합니다. 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첫 번째 의식의 대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것을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사건을 통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회복했을 때에 세상에 대한 관심은 2차 3차로 밀려남과 동시에 부수적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회복하시고 마음을 빼앗던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따라오는 부수적 열매들로 바뀌는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 붙이고 있는 일이 안 풀려서 “이런 세상 살면 뭐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어떤 세상의 가치가 마음에 일차적 대상이 되고자 할지라도 마귀의 역사임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붕을 뜯었던 친구들의 심정이 되어서 종교심을 믿음으로 바꾸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첫 번째 의식의 대상으로 포착하고 마음을 드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반드시 회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