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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금식(金食)인 금식(禁食)_태승철 (누가복음 5:33~3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09.23|조회수4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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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금식(金食)인 금식(禁食)>의 줄거리:

어떤 금식(禁食)은 한자 뜻 그대로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심을 잠시 중단하여 금하는 것일 뿐인데, 비유적으로 말하여, 끊임없이 널려 있는 황금을 내 것으로 주워 담는 것처럼 그렇게 하늘의 복을 불러들이는 금식(金食)이 됩니다. 당장 금식(金食)같은 금식(禁食)을 해 보세요. 이상하게 어렵지 않고 배도 고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바뀝니다.


금식(金食)인 금식(禁食)

(누가복음 5:33~35)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금식(金食)인 금식(禁食)>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금식(金食)인 금식(禁食)’

누가는 본문 27~39절을 통해 세 단락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중심이 되는 말씀은 32절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는 구절과, 34~35절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구절이고, 38절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는 구절입니다. 오늘은 이중에서 금식에 관한 33~35절의 말씀을 먼저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일 나머지 두 단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에서 앞의 금식은 황금(金食)을 먹는다는 의미이고 뒤에 금식(禁食)은 음식을 금한다는 본래의 의미입니다. 황금을 먹는다는 것은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인간으로써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을 황금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최고의 복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금식에 대한 논쟁을 합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잔치가 벌어진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길 때가 올 때에야 비로소 금식을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참 의미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선민 사회에서 금식은 일 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에 하는 것으로 율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에 이를 기억하기 위해 일 년에 네 번을 금식하게 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금식은 더욱 자주 하게 되고 일주일에 두 번씩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일 년에 100일을 금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횟수보다 중요한 것은 금식의 취지입니다. 금식의 근본적인 취지는 안식일의 의미와 맥을 같이 합니다. 안식일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는 날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몰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주간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문제의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이렇게 생겨난 문제의식을 죽이는 날이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삶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몰입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금식은 이러한 안식일의 취지를 더욱 강하게 추구하고자 하는 행사였습니다. 음식과 음료는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입니다. 안식일이 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생겨난 문제의식을 멈추는 날이었다면 금식은 목숨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까지 중단하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몰입하고자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식의 근본취지는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게 됩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관심을 끊고 하늘에 몰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대한 소원과 의지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오면 바리새인들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혀서 위선적인 금식을 반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몰입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건함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로 금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금식의 취지는 지켜질 수 없었습니다. 금식은 본래 마음이 땅을 떠나기 위한 방법이었으나 땅의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의 제자들 또한 금식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상을 생각하면 이들의 금식은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인 목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뱀처럼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살아가는 모습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리새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인정을 얻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황을 생각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하늘을 소망하기 위한 방편으로 금식을 수행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다만 이들은 금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한 채 당시의 관행을 따르고 있었기에 금식은 습관적인 행사로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입니다. 전혀 금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금식의 본래 취지를 염두에 둘 때에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땅에 대한 관심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천국에서는 금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육체도 없거니와 금식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몰입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땅의 상황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무한한 은하계와 우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목수이셨던 청년 안에 현존하시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성령님과 삼위일체이시기에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으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상황 자체가 돌변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금식의 의미를 성취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기쁨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며 해야 할 일이란 금식이 아닌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금식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금식의 의미를 반대로 이행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하여 형식적인 금식에 열중하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져 가던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이신 예수님과 마주하면서도 금식을 주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겠다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 이후에 35절에서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금식(禁食)에는 바로 황금을 먹는 금식(金食)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 이후로부터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다만 이 금식은 신앙생활을 위한 새로운 원칙이나 규칙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금식을 할 수 있었지만 강요된 바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금식의 의미를 오해 없이 이해하기 위해 공생애 동안의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들이 잠에서 깨어나면 예수님이 곁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당연히 예수님을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이 의식 안에 들어올 뿐 육체로는 예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에 바로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식이 신랑이신 예수님과 하나 되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먹을 것과 마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먹고 마시는 일보다도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의식이 예수님과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먹고 마시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신랑을 잃는다는 것은 제자들에게는 육체적으로 예수님이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체로 접하는 세상에 대한 관심 때문에 예수님을 의식에서 놓칠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우선 예수님을 의식에서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살아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의식이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삶 자체를 시작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금식은 삶을 멈추는 것입니다. 삶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시작되었다면 끝내고 중단하는 것입니다. 비록 삶의 문제가 완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다면 일단 중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께 몰입하라는 것이 금식과 안식일의 의미였습니다.

신랑을 빼앗겼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랑 즉 예수님을 마음에서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말하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는 행위조차 나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 마음에서 예수님을 잊고 사업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라면 일단 사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예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에 담긴 의미입니다.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는 말씀에는 의식이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땅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카투사로 복무할 때에 2층 침대의 2층을 썼습니다. 1층은 스텔라라는 미군이 사용했습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희한한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팬티까지 다 벗고 알몸으로 잡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팬티를 입는 것입니다. 잘 때는 절대로 알몸이 되어야 하지만 일어나면 절대로 팬티부터 입습니다.

우리가 의식이 깨어있는 한 제일 먼저 입어야 될 옷이 있습니다. 그 옷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꾸중이 나타납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어서 18절을 보면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흰 옷은 곧 예수님에 대한 의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기를 옷을 입듯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처럼 예수님을 항상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른 일에 마음이 사로잡힌 채 예수님을 뚜렷하게 의식할 수 없는 상태라면 일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일 수도 없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빼앗긴 신랑이신 예수님을 의식에서 되찾을 수 있을까요? 자아의식이 예수님이라는 옷을 입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녀 앞에 설 때에 부모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배우자 앞에 설 때에는 남편이나 아내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신분이라는 옷이 나의 할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러한 신분들은 결코 우선되어야 할 의식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식이 우선되는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와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의식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신분의 옷을 입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식하기 전까지는 생각도 말도 행동도 의미가 없기에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자 한다면 먼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신분의식이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하나 될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이유는 예수님을 의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의 옷을 입는 이 시간은 때를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삶의 문제가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동안에는 세상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에서 빠져나와 예수님을 붙잡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5분이나 10분도 가능하고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떠올리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10초 남짓한 시간으로도 죽은 자의 자아의식의 옷 입기는 가능합니다. 30초가 필요하다면 30초의 금식을 한 것입니다. 30초 동안은 삶이 시작되지 않은 것이고 삶을 죽이는 것이고 삶에 대해서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몸에 병이 나면 병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아픈 자라는 자아의식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끝나기 전에는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병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입니다. 자녀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부모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 앞에서도 남편이고 아내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입니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찾는 것에 30초가 걸리면 30초 동안 금식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1분이 걸리면 1분 동안 금식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금식하고 삶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삶을 죽이기가 완료되었다면 금식은 더 이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었다면 이제 삶은 잔치가 됩니다. 잔칫집에서는 금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1분 금식이라는 말이 장난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이신 예수님과 마음을 일체로 만드는 상태를 항상 유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셨고, 나는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인격이 나타나실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신랑이신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있는 동안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인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져 나타나게 되고 삶은 잔치가 됩니다. 이제 잔칫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먹으면 됩니다.

비록 1분 동안이라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짐을 통해 삶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었다면 삶은 잔치가 됩니다. 배우자를 마주해도 자녀를 마주해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먹기만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을 비유적으로 황금을 먹는 금식(金食)으로 표현해보았습니다.

회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금식을 합니다. “회사 사람들과 회의를 하는 동안에도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는 회의에 들어가는 중에도 금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고, 참석했으되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며, 일을 하되 일을 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먼저 보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의 옷을 입으리라고 결심함으로써 금식의 취지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라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 죽은 자의 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회의를 참석할 때에 하나님께서 생각을 주십니다.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시기도 하시고 문제를 제의하게도 하십니다. 회의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생각과 뜻에 따라 나타나는 황금을 먹는 잔칫집이 되어가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런 이상하고도 특별한 금식을 해보셨습니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오늘도 하루 종일 황금을 먹는 금식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다른 대상이 의식에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금식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선언할 때에 예수님은 찾아지고 예수님과 연합함이 분명해집니다. 내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생겨나면 황금을 먹는 금식이 시작되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禁食)을 통하여 하늘의 복을 황금처럼 먹는 금식(金食)을 이루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삶을 시작하지도 않는 금식(禁食)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황금에 비유될 수 있는 최고의 하늘 은혜를 주워 담듯이 먹는 금식(金食)의 날들로 하루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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