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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목표 없이 세상 사는 행복>의 줄거리:
목표가 없으면 인생이 방향을 잃고 표류할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실제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 목표를 가지면 그때부터 인생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내가 세운 세상 목표가 내 인생을 혼돈과 공허로 끌고 갑니다. 이 세상에서 목표나 아니면 하다못해 소원이나 바람이라도 가지면 아예 구원도 없는 줄 아시면 정확합니다.
세상 목표 없이 세상 사는 행복
(누가복음 5장 27절~39절)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목표 없이 세상 사는 행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목표 없이 세상 사는 행복’
지난 시간에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하라는 내용의 단락을 살펴보았습니다. 신랑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내가 연합하고 관계해야 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렸듯이 십자가는 예수님에 대한 입장표명이 결정적으로 확정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를 넘으면 제자들처럼 사도들이 되고 성도가 되는 것이고 넘지 못한다면 가룟 유다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보고 연합하기로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예수님은 지혜와 기적의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실패자로 여겨져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곧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을 잃게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는 금식의 의미를 성취함으로써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금식의 최종 목표는 밥을 안 먹고 물을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삶을 죽인다는 것은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의식과 마음을 차단시켜서 하나님께로 몰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은 신랑을 빼앗긴 모든 순간마다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활성화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바로 신랑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금식이 의미하듯 삶은 시작되어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금식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활성화된 후에 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하는 자리가 신랑이 함께하는 잔칫집이 됩니다. 잔칫집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신랑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삶이 멈추는 금식의 의미는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한 후에야 비로소 삶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금식의 의미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비유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질문으로부터 이해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신랑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되찾고자 금식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또 십자가의 예수님이 기억되는 상황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구원받음의 상태는 어떤 사람들에게 나타날까요?
신랑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빼앗긴 상태로 삶이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린다고 해서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만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빼앗기면 삶 자체를 살지도 못하고 시작하지도 못한 채로 예수님 찾기에 급급하여 금식의 상태로 몰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음에서 기억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인과 의인이라는 구분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본문을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바로 세리와 창기와 범법자와 이방인들이 그러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죄인의 모습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야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모습이 나타날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들만이 신랑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금식을 해서라도 되찾으려고 합니다.
본문 37~38절에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비유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이 말씀의 취지를 잘 살펴보면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지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이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구원의 속성은 죄인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36절을 보면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옷과 낡은 옷이 서로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어 붙여두면 새 옷감이 낡은 옷감을 잡아당겨 찢어지게 됩니다. 또 낡은 옷을 고치겠다고 새 옷을 찢어 조각을 만든다면 두 옷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37절을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탄력이 없어서 새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생기는 압력을 견디지 못해 터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서 발견되는 상식적인 현상들을 통해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는 자의 특성을 밝히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자들이 바로 구원받을 죄인입니다. 반면 묵은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들이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구원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이미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들의 특징이 잘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 29장 13절을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손에 쥐고 계시는 이 세상적인 축복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축복의 주권자이심을 믿은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찾았던 것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 축복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도달했거나 도달하고자 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적인 기준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을 의인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의 마음에서는 세상적인 축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축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하나님께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반대로 이들의 관점에서는 세상에서 유복하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갈 수 없으므로 세상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를 묵은 포도주와 낡은 부대의 비유에 대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받고 싶어 하는 세상 축복으로부터 거리가 있다고 느낄 때에 그 간격을 기록된 계명과 율법을 통해 채우고자 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세상적인 축복들과의 간격이 좁혀지고 주어지게 되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에는 틀에 박힌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발견됩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중시했습니다. 낡은 부대가 의미하는 바는 현재보다 바람직한 상황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삶의 틀입니다.
지금 상황을 부족하다고 느끼고 바람직한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가야 될 목표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그 목표가 하나님 손에 쥐어져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틀은 비단 선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낡은 부대가 비유하는 삶의 형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부족하게 여기고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목표와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서 자기 계발과 스펙을 쌓는 등의 노력을 합니다. 이들에게는 이것이 율법과 계명인 것입니다. 이것을 따르고 지키며 목표에 도달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모습입니다. 낡은 부대는 목표를 세우는 삶의 틀을 말합니다. 살아가는 방식의 목표를 세우거나 소원이나 바람을 갖는 것이 낡은 부대이고, 그 간격을 메우려하는 규칙과 원칙들이 묵은 포도주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 7급 공무원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세상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가고자 했던 것처럼, 이 사람은 7급 공무원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고시원으로 들어가고 스타강사가 강의하는 학원에 등록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율법과 계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뛰어갑니다. 이 사람에게는 7급 공무원에 합격한 사람이 의인입니다.
본문에서 죄인으로 번역된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는 죄를 의미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가거나 잘못된 과녁에 맞춤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속한 인간 세상 안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해주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다고 믿거나 달려가는 중이거나 달려간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의인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스로 의인이 된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져오신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한편 죄인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나 창기나 범법자가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축복을 손에 쥐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가려야 갈 수가 없는 자들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축복을 쥐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목표에서 빗나간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목표는 세상의 축복을 쥐고 있다고 믿어지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적중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자들이 바로 죄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인과 의인의 구분은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이것은 다른 기준을 통해 적용되고 있고 여전히 이러한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목표를 설정하는 삶의 상황이 낡은 부대이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취하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놓은 계명과 율법과 가르침과 지식과 정보 등이 묵은 포도주입니다.
그렇다면 새 술과 새 부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리새인이나 심지어는 세례 요한까지도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간격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게 여겼던 이유는 아직 복음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이들과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수님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지금부터 출발해서 도착해야 될 목표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삶의 시작점이셨습니다.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하나님이라는 과녁에 적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삶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오래전부터 기록된 율법과 계명을 지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사셨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가 정해 놓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목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목표를 스스로 가고자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목표를 향해 가도록 하셨을 뿐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목표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출발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기록된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그 해석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지금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방금 구워낸 빵같이 따끈따끈한 지시를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래되어 딱딱해진 빵을 먹으려 했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을 드시듯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 사셨습니다.
한편 39절을 보면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들이 이런 목회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목회자들의 경험을 기록한 성공 사례를 읽고 참고로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낡은 부대의 삶의 틀을 만들어놓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척 좋게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 사례를 읽는 동안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도달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구원 즉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묵은 포도주로써의 계명이나 율법이나 법칙과 규칙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밀착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나의 출발점이 되어 주시는데 다른 누구의 말도 받아들일 틈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과 충돌하는 내용처럼 여겨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기록된 율법을 단순히 기억하고 행동으로 옮기며 지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출발점이 되셔서 말하고 행동할 때에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도 율법에서 벗어남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과 계명을 문자적으로 기억하고 행동을 맞춰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철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과 선배들과 경험자들의 말도 나의 행동의 이유가 될 수가 없고 나에게 길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만 합니다. 새 술은 지금 하나님이 내게 지시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새 부대의 삶은 세상의 목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밀착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하였습니다. 푯대가 의미하는 바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목표는 세상에서 갖는 목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목표를 세울 수도 없고 세상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관점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세상에서 인정해주는 그럴듯한 목표를 세울 수도 없고 성취하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인정하는 목표로부터 빗나간 자들이고 벗어난 자들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도 세리도 창기도 모두 죄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죄인과 의인의 구분은 사회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사회에서 세리나 창기나 범법자들은 세상 축복을 쥐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목표를 향해 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과녁에서 빗나간 사람들이라고 여겨졌기에 사회적인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복을 주관하신다고 믿어지는 하나님이라는 목표를 향해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며 살고 있기에 의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져오신 복음은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간격을 메움으로써 갈 수 있는 분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곧바로 하나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는 삶은 시작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의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기록된 율법과 계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이 가르쳐준 규칙과 원칙을 따라 7급 공무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미 목표를 정해놓고 질주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의인이 될 것이라 믿고 있고 의인이 되기를 바라며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위하여 율법과 계명과 원칙과 규칙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노력과 수고를 아낌없이 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적인 의인으로 여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에 예수님과 하나 된 나도 다 이룬 것이 됩니다. 십자가는 내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출발점이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시를 해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기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정해놓고 율법과 계명과 원칙과 규칙을 지키며 그것에 도달하려고 하는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한, 이 세상에 대한 바람과 소원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도 십자가의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목표나 소원을 가질 때에 반드시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세상에서 소개하는 규칙과 원칙들을 율법과 계명으로 붙잡고 지키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게 됩니다. 목표를 적중시키는 의인의 삶을 산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가도록 해주십니다. 목표와 과녁을 정해놓고 달려가는 사회적 의미의 의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 세상이 인정해주는 가치의 과녁으로부터 빗나간 사람들은 사회적 죄인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의인으로 여겨집니다. 대기업에 취직하고자 달리는 사람들이 의인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사는 동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목표는 오늘도 신랑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마음에서 빼앗기지 않겠다는 하나의 목표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목표가 아닌 예수님을 향한 목표가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았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하루를 살아갈 때에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일들을 목표로 삼는 것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마치 세리와 창기와 범법자들처럼 과녁에서 빗나가 있는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나의 목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시를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그리고 묵은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는 비유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세상에서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없이도 세상을 사는 행복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따끈따끈한 지시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이 인정하는 그럴듯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의인의 삶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중단되게 하시고, 세상적인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대신에 내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주어지는 따끈따끈한 지시를 양식으로 삼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