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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굉음 뚫고 하늘 듣기>의 줄거리:
많은 제자 중에 12명을 택하셔서 사도로 세우십니다. 제자와 사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자도 아니고 사도도 아니고 단지 종교인인 사람은 어떻게 구분 될 수 있을까요? 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하늘의 부르심입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대한 입장과 태도에 따라 제자 사도 종교인이 갈라집니다.
세상 굉음 뚫고 하늘 듣기
(누가복음 6:12~16)
12.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굉음 뚫고 하늘 듣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굉음 뚫고 하늘 듣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택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파악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자는 누구이고 사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는 왜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사도로 부르셨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심으로써 십자가의 고난은 시작됩니다. 가룟 유다에게 팔리시는 길 외에 십자가를 지실 다른 길은 없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통해 가룟 유다의 배반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팔 것을 아시면서도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와 사도들로 부름을 받은 최측근이라는 자들 중에도 예수님을 팔 사람이 있음을 예고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가 누구이고 사도는 누구이며 예수님을 파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이 우리의 올바른 믿음의 길잡이가 될 수 있으며 매일매일 일상에서 믿음을 통해 받는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이때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으로써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날에 있을 모든 일들을 아버지께 들으시는 대로 현장에서 활동하시면서 공생애를 사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로부터 제자와 사도의 구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使徒)란 어떤 사람일까요? 히브리서 3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7장 18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사도이셨고, 또한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들이 사도인 것입니다. 오리지널 사도이신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신 셈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사도로 보내셨고 사도이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입장을 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사도이셨으며 제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제자가 누구이고 사도가 누구인가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24시간 지구의 75억 명 각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십니다. 마치 MRI로 전신을 스캔하듯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불꽃같은 눈으로 오장육부와 생각까지도 바라보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혹은 “너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들에 핀 백합화도 스스로 피어난 것이 아니며, 하늘을 나는 새도 스스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꽃이 피게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새가 하늘을 날게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24시간 75억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으로 깨달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내용을 감안하셔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고 그대로 살 수만 있다면 어떤 문제나 걱정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삶의 모든 것을 감안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보시기에 좋은 선한 길로 이끄시고자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돈이 부족한 것이 문제일 수 없고 배우자가 문제일 수 없고 자녀가 문제일 수 없고 나랏일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식이 이 세상의 굉음 속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 2km도 안 되는 곳에 공군기지가 있습니다. 전투기들이 이륙할 때면 고막이 찢어지는 굉음이 들려옵니다. 그렇기에 봄 여름 가을까지 베다란 문을 조금이라도 열어놓는 동안에는 전투기가 뜰 때마다 대화나 TV시청은 중단됩니다. 이야기를 해도 들리지 않고 TV의 볼륨을 높여도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10년을 살았는데도 아파트 값이 오르지를 않습니다. 전화라도 오면 소음이 없는 곳을 찾아 화장실에 가서 전화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반복되는 소음에는 익숙해지지도 않습니다. 심장이 떨릴 정도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이 세상 또한 우리에게 이러한 굉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큰 문제가 생겨서 하나님께 나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이 안 되는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판단이 생기고 사업의 방향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업이 나의 의식에 굉음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는 사업에 대해 기도하고자 무릎을 꿇기도 전에 이미 사업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제자란 배움이 끝나면 스승을 떠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님에 묶이고 매여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도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너희를 자녀로 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그러한 본보기를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24시간 말씀하시고 계시는데도 사람들은 세상의 굉음 때문에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굉음을 차단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전투기가 뜰 때에 전화를 받으려면 소음이 차단되는 공간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한다면 세상의 굉음이 차단되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봅니다. 제가 아내와 마주할 때에는 아내를 의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아내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굉음을 내는 전투기가 됩니다. 자녀를 강하게 의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은 의식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사업이 의식을 붙잡고 있으면 사업이 굉음의 전투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대상들이 의식 안에 들어올 때에 굉음을 내게 됩니다. 배우자나 자녀, 사업이나 건강 문제 같은 것들이 의식에 굉음을 일으킬 때에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에 쉬지 않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전혀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배우자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의식은 배우자라는 전투기의 굉음으로부터 차단되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항상 마음에 품고 다니는 자들이 바로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여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본질입니다. 나는 스스로 못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받아들이시고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세상의 굉음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라는 전투기, 자녀라는 전투기, 건강 문제의 전투기, 회사라는 전투기 등이 의식에 들어올 때마다 굉음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이러한 세상의 굉음을 차단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과 대결하여 이기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9장을 보면 이에 분노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공언을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싸울 때의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들어갔다가 탈진하게 되었는데 로뎀 나무 아래에서 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먹고 힘을 내서 호렙 산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데 그 광경이 대단히 신비롭습니다.
11~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의 관점에서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서 산이 갈라지고 바위가 쪼개질 때에도 하나님은 계셨고, 지진이 나고 불이 날 때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다만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세벨의 공언을 듣게 된 엘리야의 마음 상태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마음 상태를 산과 바위와 지진과 불로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의식에서 모든 일들이 조용해진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연합해야 할 예수님의 생애의 포인트는 십자가입니다. 공생애의 기적의 현장만을 바라본다면 세상에서 버려진 예수님과 연합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제자들은 성숙하면 스스로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과 영원히 연합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의 굉음에 대한 차단입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의식 속에서 세상의 굉음은 차단되고 24시간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다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이 지속되는 동안에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부르심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될 기도는 “하나님! 제가 사업이 힘든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십니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하고 계실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때조차 하나님은 자장가를 부르시듯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자장가처럼 듣고 계셨기에 풍랑을 두려워하실 이유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세상의 굉음에 대해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굉음을 차단하는 공간이 되어주십니다. 세상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채로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살아갈 수 있다면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굉음에 너무나도 민감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탈선한 기차처럼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기차가 탈선하여 모래밭에 놓여있으니 한 걸음도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선로 위에 놓인 기차는 나아갈 방향이 정해져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겠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할까 말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을 이룰 수만 있다면 마음에서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주어지게 됩니다. 다만 세상의 기준에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오히려 염려스러울 것입니다. 배우자와 자녀와 사업과 건강 문제 등의 전투기가 들려주는 굉음을 들어야만 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염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을 방해합니다. 세상의 일들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종교인이 되게끔 합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가 한 마리가 아니고 사납기 그지없는 개가 천 마리 만 마리가 모여서 나의 인생을 향해 짖고 있다고 생각해봅니다. 배우자나 자녀 문제로부터 사업이나 건강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상 일이 끊임없이 사납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으로써는 이 사나운 개들 앞에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로 위에서 달리는 기차가 된다면 설령 만 마리 개들이 짖는다고 하여도 어떤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를 마주하더라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소리를 차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소리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하나님의 노선을 따라 달리는 내 인생을 멈출 수도 없으며 방향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기차가 선로를 따라 달릴 때에는 설령 만 마리 개가 짖을지라도 기차를 세울 수도 없고 방향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 기차가 될 수 없다면 만 마리 개들의 짖음에 벌벌 떨고 반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을지라도, 건강이 좋지 않을지라도, 가족과 문제가 있을지라도 내 인생의 경로는 눈앞에 보이는 문제들 속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으면 나의 대처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나의 인생의 경로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 속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은 내 인생이 달려갈 선로처럼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면 삶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제자들은 스승을 떠나기 마련이지만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의식의 주머니에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어떠한 사람들일까요?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사도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제자의 삶을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으니 그 음성을 들으라!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삶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세상의 굉음을 차단하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이러한 제자들 중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평생 십자가 생활화만을 외치며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 십자가만이 답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에 평생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한편 그 사도들 중에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사람이 얻고자 하는 것은 돈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판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팝니다. 입으로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들이 바로 종교인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굉음을 차단시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음성을 굉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차단시키려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말을 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처분하듯 팔아버리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잘 따르다가 변심하여 팔았던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얻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던 중 마침내 예수님이 불필요해졌다고 여기게 되었기에 팔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이 세상에 표현되는 삶을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가지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늘의 부르심이라는 키워드를 통하여 이 세 부류의 사람을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식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품고 연합함을 통하여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자 삶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제자 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대신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고 그로부터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합니다.
오늘도 세상의 굉음은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올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연합의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굉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만 마리의 개가 짖는 소리가 되어서 나의 의식을 장악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눌리고 두려움에 찌들려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고 계시지만 세상의 굉음으로 인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제자 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연합이 지속되면 세상의 굉음은 차단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이 없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세상의 굉음에 정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제자의 삶을 사는 동안에 때로는 사도의 일을 하게 할 때도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평생을 사도로 살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는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제자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도의 삶 또한 열려있습니다. 단지 지금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제자의 삶을 사느냐 사도의 삶을 사느냐로 구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가 되어도 제자 중에 되는 것이며, 사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신 때에 택하심을 통해 되는 것이오니, 제자 됨에 총력을 기울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함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굉음들이 나의 의식에서 차단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밝고 또렷하게 들으며 하나님의 뜻의 선로를 달리는 기차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 마리의 개가 짖어도 상관없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