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쌤통 느낌 드리기>의 줄거리:
그것참 쌤통이다. 그것참 고소하다. 이런 말을 자주 쓴다면, 그 사람에게는 적이나 미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남이 낭패를 당하거나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는 심보를 가지고서야 어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저주받은 세상에서 사는 나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께 쌤통 느낌을 드리는 것이 잘사는 것임을.
하나님께 쌤통 느낌 드리기
(누가복음 6:17~26)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쌤통 느낌 드리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 쌤통 느낌 드리기’
제목을 풀어보자면 세상을 애인으로 삼고 있는 우리를 24시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쌤통이라는 느낌이 들게 해드리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드리면 좋아하실 것이 무엇일까요?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나 같은 버러지 같은 인간이 드릴만 한 것 중 유효하고도 기쁨이 될만한 것이 정말 있을까요? 그것을 쌤통이라는 느낌으로 표현해볼 수 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게 생일 선물을 하고자 합니다. 그때에 나름대로 아빠의 입장을 생각할 것입니다. 아빠는 무엇을 좋아할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선물합니다. 아이의 기준에서 장난감은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른에게는 장난감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필요 없다며 밟아버리지는 않습니다. 아빠는 자기의 장난감을 주는 아이의 마음을 받고 기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과 우리의 관계를 보시면서 “쌤통이다!”라는 느낌이 들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입니다.
본문을 보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겹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표현적으로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 3절을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 20절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팔복을 다 언급하지 않고 몇 가지를 추리듯이 기록하면서 마태복음에 없는 저주받을 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대체 왜 이러한 표현을 했는지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을 산상수훈이라고 한다면 본문은 17절의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라는 언급으로부터 시작되기에 평지설교라고 불립니다.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있기에 동일한 사건과 자료들을 가지고 어떠한 관점에서 보았느냐에 따라 기록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차이점을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을 읽을 때는 마태복음이 전부인 것처럼 읽으면 되고 누가복음을 읽을 때는 누가복음이 전부인 것처럼 읽으면 됩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조차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편 19절을 보면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에서는 예수님이 능력을 가지시고 임의로 베푸신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통해서 능력이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 능력을 만지려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시는 모든 일이 스스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하시는 일이심을 누차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상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까이 와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우리와 관계하시고자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입장이 되었을 때에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본문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씨라고 하기보다는 심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입니다. 심보는 마음을 쓰는 바탕을 의미하지만 마음 씀씀이가 좋지 못함을 뜻하는 부정적 어감의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좋지 못할 때 심보가 고약하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단어를 하나님께 사용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드러나는 마음이 마냥 따스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심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네 번의 ‘복이 있나니’가 반복되고 또 네 번의 ‘화 있을진저’가 반복됩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복을 받을 만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으로써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생겼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한편 화가 있다는 것은 화가 주어진다는 뜻이지만 그보다 앞서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에 진노가 생겼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복을 내리기를 원하시고, 진노하셔서 화를 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마음의 움직이는 기준을 심보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20절을 보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라는 단서가 붙어있습니다만 누가는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난은 헬라어로는 프토코스(πτωχός)이고 히브리어로는 ‘아나’로써 외부의 부당한 압제나 억압이 가해져서 꼼짝 못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최소한의 끼니와 입을 것에 대한 대책이 전무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난할 때에 오히려 기분이 좋으셔서 복을 주신다고 하시니 다소 의아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재물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애로 비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애인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돈이 더 좋아서 하나님을 차버리고 돈을 애인 삼았습니다. 돈에게 계속 구애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돈과의 관계가 계속 나빠집니다. 돈이 원하는 대로 벌리지 않고 점점 더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며 “그것 참 쌤통이다!”라는 생각을 하실만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자면 이러한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이 가난을 기뻐하시고 기뻐하시다 못해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복의 정체는 바로 하늘나라를 통째로 안겨주시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애인이 떠날 때에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붙들고자 할 때도 있고 통곡하기도 하고 차이기 전에 찼어야 한다고 분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까지 연관된 경우에는 헤어져라 어쩌라 하면서 복잡해집니다. 이때 으레 나오는 말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축복하며 보내 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때로는 나를 떠나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라며 보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런 설득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기준을 하나님께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나를 통째로 가지시기를 바라며 만드셨고 또한 내가 하나님을 통째로 갖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을 애인 삼고자 할 때에 “그래 이제 새 애인과 잘 살라!”고 보내주는 사랑을 하나님은 절대로 하실 줄 모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나를 양보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나를 통째로 갖기를 원하시고 또 내가 하나님을 통째로 갖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담의 원죄를 유전 죄로 갖게 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관심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특히나 애인 삼고자 하는 대상은 재물 즉 돈입니다. 그런데 열렬히 돈이라는 애인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돈을 벌고자 했지만 오히려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가 되었다면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시다 못해 천국을 주시고자 합니다. 천국의 기운을 한 번 쐬고 나면 이 세상의 재물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천국은 부요함의 진수입니다. 세상 대신 천국을 통째로 안겨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접하며 배워야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돈하고 잘살아보겠다고 열렬히 사랑하더니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참 쌤통이다.”라고 느끼실만한 상황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천국을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과의 관계가 끝나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으면 됩니다. 다만 이것이 실질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상태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가난한 상태에 처해있는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가난한 만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쉬운 조건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통장에 돈이 많다고 해서 가난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통장에 대해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가난한 자가 됩니다.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닙니다. 부자는 돈맛과 돈의 힘에 취해있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림의 떡처럼 여기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내 돈이 아니라고 여길 수 있다면 부자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있는 동안에만 가난한 자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돈을 애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중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라는 자아의식으로 철저하게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새 애인을 버리고 옛 애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우리를 반드시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리고 부요함의 진수인 천국을 통째로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가 가난함을 심령에 국한시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다는 것은 세상일에 쓸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누가는 더욱 현실적인 가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돈에 대해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21절을 보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린 자’라고 번역된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굶주리다’라는 뜻의 페이나오(πεινάω)의 현재분사 형태입니다. 일시적인 굶주림이 아닌 계속해서 굶주림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에서는 이 부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또한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옛 애인을 떠난 사람이 새 애인과 데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옛 애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 애인과 비교해보니 새 애인에게 자부심을 느낄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음을 느낍니다. 외모도 옛 애인이 더 낫고 재력도 옛 애인이 더 낫습니다. 새 애인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의 근거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옛 애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차버리고 가더니 기껏 저런 사람하고 사귀다니 참 쌤통이다.”라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세상적인 기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만 열등의식이 생겨나는 상황자체는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앞에 두고 세상의 가치를 통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에 대해 하나님께서 실제로 쌤통이라 여기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이 나를 쌤통으로 여기셔도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구나.”라고 느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될 것을 이 세상으로 만족해보겠다고 하던 삶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부심과 자긍심의 토대가 하나도 없는 상태가 바로 ‘지금 주린 자’가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린 자가 되어있는 상태를 합당한 때로 여기셔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설령 이 세상의 왕 앞에 설지라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자부심과 자긍심입니다. 재산이 없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고,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눅 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자부심과 자긍심의 토대가 되어주십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얼마나 쌤통이라고 여기실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돈 벌겠다고 했는데 돈 한 푼이 없습니다. 평생을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고자 추구했는데 오히려 초라해졌습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쌤통이라고 여기실 때에 비로소 돌이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21절의 하반부를 보면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옛 애인이 볼 때에 제일 기분 나쁜 장면이 무엇일까요? 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웃음을 새 애인에게 보일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을 새 애인 삼아 활짝 웃으며 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새 애인과 함께 하는 동안 울기만 합니다. 그러면 옛 애인은 쌤통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애인 되어 살아온 기간이 깁니다. 앞으로도 육체를 입고 있는 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전 죄의 성향 때문에 세상을 애인 삼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예 목표를 세상에 대해서는 우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확정 짓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자부심과 자긍심의 토대가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한 자로 살아갈 것을 마음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22절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옛 애인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고자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세상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쫓겨나 이름도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끝장이 났을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유전 죄를 가지고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심보입니다. 가난한 것을 즐거워하시고, 이 세상에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지 못할 때에 기뻐하시고, 미움 받을 때에 복이 있다고 하시며 상을 주신다니 심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웃을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기를 좋아하시기에 마치 우리를 향해 “쌤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에 대해서 쌤통이라 여기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여길만한 상황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에 대해서, 세상이 주는 자부심의 근거에 대하여, 세상적인 웃을 일들에 대해서, 세상의 무대에 내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는 마음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24~26절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나타납니다. 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애인 삼았는데 관계가 아주 좋아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돈의 힘과 맛에 취한 자들에게는 화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하셨고 26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보는 겨우 배가 아픈 수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배부를 일이 생기고 웃을 일이 생기고 대단하다고 칭찬을 들을 때에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화를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애인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통째로 가질 수 있도록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차버렸고 세상을 새 애인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질만한 배부를 일들에 대해서, 세상의 웃을 일들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는 일들에 대해서, 세상 무대에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구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하늘의 부요함을 주실 것이며, 하늘을 자긍심의 토대로 삼게 하실 것이며, 하늘이 웃을 이유가 되게 하실 것이며, 하늘의 칭찬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쌤통이라고 여기실만한 상황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상황의 절정이 십자가의 못 박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새 애인인 세상과의 관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돌이킬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동안 세상을 애인삼아 살아왔고 틈만 있으면 육체를 근거로 하여 기쁨과 만족을 구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실 때에 쌤통이라고 여기실 상황을 만들어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옛 애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