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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비천함이 내 인생목표다>의 줄거리:
비천함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고귀함도 부요함도 형통함도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향한 소원이 불행의 원인이고 멸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땅 위 인간 세상 안에서는 비천해져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야, 비로소 하늘의 하나님 한 분만을 가지기 위해 예수님을 내 의식 안에 임신할 수가 있게 됩니다.
비천함이 내 인생목표다
(누가복음 1장 39절~56절)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비천함이 내 인생목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비천함이 내 인생목표다’
본문 39~45절까지는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46~56절 까지는 마리아의 찬가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옳게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한 인생의 목표는 비천함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회적으로 고귀한 생을 목표로 할 수 없고, 재정적인 차원에서 부요함을 목표로 할 수 없으며, 지식의 차원에서 유식한 학자나 대학총장이 되기를 목표로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르게 믿는다면 생의 목표는 비천함에 이르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 찬가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를 연상해봅니다. 이 상태는 그 자체가 진리를 선언하는 형국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교리이며 그 자체가 가르침입니다. 본문에서는 두 임산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임신한지 6개월이 된 엘리사벳과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만나게 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때의 마리아는 임신 약 4주 쯤 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이 두 임산부의 만남에는 특징적인 점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만났을 때에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기뻐하였고 동시에 6개월 된 태아도 뱃속에서 뛰논다고 표현할 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6개월 된 아기의 태동이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다만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를 마주하였을 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동을 느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충만했듯이 뱃속의 아기도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이 외출 나온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엘리사벳과 뱃속의 세례 요한을 통해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에 기뻐하실 일은 없습니다. 세상은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께 기쁨을 준다는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예수님의 세례 때에 잘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기뻐하십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하신 기쁨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예수님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기쁨을 얻으실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이 품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를 품은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뻐했고 뱃속의 세례 요한 또한 기뻐 뛰놀았던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표출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식이라는 자궁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마리아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를 의식했던 것처럼 우리는 의식의 자궁 안에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기억하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땅을 떠나 하늘로 가야 하는 사람임을 늘 자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바라보시며 이러한 모습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준으로 할 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예수님을 호출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임신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호출하는 사람과 임신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을 호출하는 사람은 의식 속에 임신하는 대상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사람은 의식 속에 돈을 임신한 것입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합격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의식 속에 자녀의 서울대를 임신한 것입니다. 반드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정치인은 의식 속에 권력을 임신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예수님은 밖에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대상을 위하여 예수님을 호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동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잉태한 상태에서는 결코 예수님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면 때가 되어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은 나타나시게 됩니다. 배우자를 만날 때에 자녀를 만날 때에 일할 때에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가 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마음이 비천한 사람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마리아의 기쁨의 노래가 나옵니다. 먼저 46절을 보면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해보자면 ‘내 혼이 주의 위대하심을 선언하고 내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 내 구주로 채워져 기쁨과 만족이 생기는 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를 찬양한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주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밝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면 세상 것은 작게 보입니다. 하늘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반대로 마음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가치가 크게 보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작아 보입니다. 이는 성전에 있는 금촛대가 의미하는 바와도 같습니다. 금촛대는 하나님이 태양이 되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크고 제일 먼저 보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47절에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는 것은 성전의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배부름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임신한 상태에서 기쁨과 만족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임신하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크게 보이고 제일 먼저 보는 상태가 됩니다. 상대적으로 이 세상 것들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서 예수님이 잉태될 때에 나타나는 일들이 이와 같습니다. 마리아는 자나 깨나 어디를 가든지 잉태한 예수님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마리아와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잉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천함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비천함에 대해 마리아의 사회적 상태가 우리에게 힌트를 줍니다.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부인이었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당시에 낮은 신분이었던 목수인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예루살렘 중앙에 살지도 않았으며 변방인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환경적 조건이 마리아가 자신을 비천하게 여긴 이유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적 조건이 비천함이라는 상태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비천함이란 바로 인간 세상 안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를 두고 48절에서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천함을 돌보신 결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를 갖지 못하고 가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비천함이고 이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50절을 보면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두려워한다는 말은 헬라어 프호베오(φοβου)로써 공포심이기도 하지만 이 맥락에서는 경외를 뜻합니다. 공포심은 내게 주어지거나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경외심은 내게서 상실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비천함과 두려움이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다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천함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이 비천함이 운명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사회에서 태어났기에 비록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자녀는 금수저로 키우고야 말겠다는 꿈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서 비천함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비천하든 고귀하든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성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거지나 똑같습니다. 재벌회장도 노숙자도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숙명적인 비참함을 가지고 있던 마리아는 마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했을까요? 마리아는 인간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 거리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채울 길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라는 구절 속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마리아의 비천함에 대해 정리해봅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환경적 조건에 놓여있었기에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하나님으로 마음 채움을 경험할 수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까지도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스스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 혹은 형통이나 건강과 장수 등의 가치들로 마음을 채워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숙명적인 비천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상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채울 대상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방법을 찾지 못했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가진 비천함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두려워하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잉태한 채로는 예수님을 호출할 수 있을 뿐이지 예수님을 잉태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로 가지 않는다면 아버지께로 갈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마음속에 비천한 마음을 주실 때에 하나님만을 가지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예수님을 잉태할 때에만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게 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인 승천하심과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바라보면서 마리아의 비천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는 예수님의 승천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상태를 통해 그 답을 선포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비천함으로 책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비천함에 이를 수 없다면 예수님을 잉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천함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잃을까봐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심정이 되어야만 예수님은 잉태될 수 있습니다.
51~53절을 보면 비천함과는 반대되는 교만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이 나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천함과 대비되는 교만함이란 비천함을 거부하고 비천한 상태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를 많이 얻음으로써 가진 자로써 살아가고 무엇인가를 이룬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무조건 비천해져야만 합니다. 비천함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비천함을 목표로 삼아야만 합니다. 설령 대통령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인정하고,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자라고 해서 마음까지 비천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돈이 많은 자리로 가야겠다고 여기는 동안에 마음은 교만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 세상에서 얼마든지 비천함을 극복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에 대한 믿음이 바로 교만입니다.
예를 들어 아가씨가 혼기가 되어 신랑감을 찾고 있습니다. 좋은 신랑감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마음은 교만한 상태입니다. 좋은 신랑감이 있어야만 비천함을 벗어나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데도 세상의 가치를 가짐으로써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교만일 뿐 실제로 그 마음이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들은 재정적인 부요함을 통해 기뻐하고 만족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에 쫄쫄 굶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가 하나도 없어서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도 마음은 채워져야만 합니다.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을 믿는 과정을 생각해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어 세상을 빠져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과 연합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의 속성상 비천함을 목표로 달려갈 수가 없습니다. 원죄는 우리를 세상을 향하게 하고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싶어 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바깥에 계실 수밖에 없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호출하는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원죄의 속성에 지배되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의인의 슬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을 잉태하는 것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비천함에 이르고자 하는 생각과 자각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이고 이를 위해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온하게 삶을 사시다 하늘로 다시 승천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가 가진 원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형통하셨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세상의 형통을 좋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는 비천함에 이르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비천함에 이를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비천함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고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가치도 마음에 잉태되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망하도록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통하여 비천한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자리에 있는 자도 마음은 채워져야만 합니다. 세상에서는 채울 것이 없기에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늘의 하나님을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고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수련을 하더라도 반드시 이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잉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속적으로 붙잡을 때에 마음에 들어오는 세상의 가치들은 유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비천함에 이를 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잉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로 마음이 같이 올라가서 아버지 하나님을 나의 소유이자 아버지로써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마리아는 본문의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운명적으로 비천한 환경에 놓여있었기에 세상에서는 그럴듯한 가치를 소망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가질 방법을 찾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떠나실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던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상실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온전히 하나님을 가진 여자가 되었으니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고 노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는 부활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비천함에 이르게 하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언제 어디서든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들에 대한 소원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가장 비천한 자리를 향해 가고 비천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도 연합하여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비천함이 전제된 위에서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하나님만 소망할 수 있는 비천함에 이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만을 기억하고 십자가만을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비천함에 이르게 하시고 비천함에서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자가 되게 하셔서, 예수님이 보좌 우편까지 이끌어 가실 때에 따라 올라가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나의 아버지로 가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