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2

녹취문: 미운 사람 없이 세상 사는 법_태승철 (누가복음 6:27~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01|조회수53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미운 사람 없이 세상 사는 법>의 줄거리:

모양, 생김새, 행동거지 따위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눈에 거슬리는 느낌이 있어서 밉습니다. 눈에 거슬림은 마음에 거슬림 때문이지요.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면 본능적으로 내 앞에서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엄연히 눈앞에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건데 미워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동안, 절대로 안 되는 것 하나 있지요. 행복함입니다.


미운 사람 없이 세상 사는 법

(누가복음 6:27~34)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미운 사람 없이 세상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미운 사람 없이 세상 사는 법

밉다는 것은 어떤 대상의 모습이나 말과 행동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기에 없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미워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런데 없어지지도 않을 대상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해서 미워하는 동안에 행복은 사라집니다.

따지고 보면 잃는 것은 행복만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기 시작하면 먼저 건강을 잃습니다. 위부터 고장이 나고 뒷목이 뻣뻣해지고 혈압이 높아집니다.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서 창의성이 없어집니다.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낼 의욕과 의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동안에는 정상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왜곡되어버립니다. 남을 미워하기 위해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조차 생겨납니다. 이런 식으로 삶의 효율 자체가 떨어지는 것이 미움의 대가입니다.

한편 이러한 상식의 차원을 넘어서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미움이 치러야할 대가는 엄청나게 큽니다. 진짜 집인 하늘과 최고의 가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째로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상극인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미워하고자 한다면 계산을 해봐야합니다. 누군가 내게서 하늘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준하는 가치를 빼앗을 수 있다면 미워해도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가치도 하늘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치와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미워함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내게서 빼앗아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미워한다면 하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잃는 바보 중의 상바보입니다.

 

본문에서는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았던 평지설교의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를 기록함으로써 평지설교를 어떠한 관점에서 받아들여야할지 제시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언급된 팔복과 다르게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로써 언급된 관점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나와 세상과 하나님의 삼각관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20절을 보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기록하셨던 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마음이 재물이나 돈의 힘에 물들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재물이 없는 사람도 물들지 말아야 하며, 재물이 있는 사람도 마음은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명의의 많은 재산이 있어도 돈의 맛과 힘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24절을 보면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슬퍼하고 좌절한 사람을 북돋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레시스(παράκλησις)위안을 삼다라는 뜻의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파라칼레오는 옆으로라는 뜻의 파라(παρα)부르다는 뜻의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로써 옆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옆으로 부르시는 것이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세상에서 돈의 맛과 힘에 취해버린 부자들은 돈에게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부름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즉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시는 구원은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옛 애인과 새 애인이라는 구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삼각관계와도 같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갖고 싶어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고 하나님의 칭찬을 목말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차버리고 세상을 애인 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창녀인 고멜을 아내로 삼았던 선지자 호세아의 심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멜이 나가서 바람을 피우면 호세아는 아내가 돌이키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돈을 애인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돈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바라십니다.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동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를 쌤통이라 여길만한 상황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속에는 끊임없이 세상을 애인 삼으려는 유전적 기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제로 가난하게 되었다면 쌤통인 상황입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쌤통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에 안타까워하시고 아쉬워하시고 기다리시고 애타하시고 목말라하십니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자발적으로 쌤통으로 여겨질 자리로 끌고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가난한 자리이며 가장 주린 자리이며 가장 웃을 일이 없는 자리입니다.

나 자신을 향해서 틈만 있으면 세상을 애인 삼아서 잘 살아보자고 하더니만 결국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구나. 그것 참 쌤통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동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삼각관계의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본문의 원수사랑에 대한 말씀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조건으로 높은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고결함이 강조되었다면 우리는 누구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으며 구원받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역시 행위가 아닌 관계성에 중점을 둔 가르침입니다. 나와 하나님과 세상의 삼각관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에 대놓고 원수를 미워한다는 말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현실을 반영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원수와의 대립이 줄곧 나타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원수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즉 미움은 오히려 본능적이고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성경에서만 유난히 원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원수는 사랑할 수도 없으며 사랑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 여겨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처럼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본래 원수는 미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미움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과 바람을 피우는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자부심과 자긍심의 토대가 될 만한 대상을 찾고 그로부터 뿌듯함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고정적으로 유지될 때에 나타나는 변태적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삼각관계에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애인삼아 좋아함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원수를 미워하는 변태적 행동은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볼 때에 세상을 좋아하게 된 사람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있기에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상태도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으며 마땅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만한 상황도 아닙니다.

 

원수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빼앗아가는 존재입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가거나 손해를 끼치려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기를 바라며 몸을 아끼기에 몸에 해를 가하는 질병을 원수로 여깁니다. 또 재물과 돈을 사랑하기에 돈을 버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나 사람을 원수로 여깁니다. 성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성과를 빼앗아가려는 사람을 원수로 여깁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에게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람은 원수로 여겨집니다.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 악성댓글이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내게서 세상의 가치들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치려는 존재에 대해 미움과 복수심이 일어나는 것은 본능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기에 제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내 힘으로 제거할 수 없다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애인으로 삼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을 빼앗을 수 없고 손해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미움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을 떠올려봅니다. 성경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저에게는 예수님 다음으로 스데반 집사님이 신앙의 기준으로 여겨집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기준으로 보면 신앙은 절대로 그릇된 길로 빠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졌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이 열리고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봄으로써 마음에 하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졌기에 육체가 죽는 것조차 손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손해가 없으니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가치를 두었던 것은 육체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으로 좋아하던 하늘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실제로 갖게 되었기에 육체를 잃는 것은 손해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빼앗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나의 배설물을 가져간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원수로 삼고 괘씸하게 여길 사람은 없습니다. 배설물을 아까워한다면 변태이고 정신병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게 된 뒤로는 그동안 세상에서 좋아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써 사회의 엘리트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이러한 가치들은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 바울은 더 이상 이러한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욕하고 괴롭힘을 통해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여겼으나 바울은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들을 손해라 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차버리고 세상을 애인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셨기에 이 세상의 누구도 미워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진짜 내 집이고 진짜 내 애인이시며 진짜 내 재산이신 하나님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집이자 고향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따라 올라가야 할 하늘이지, 추석이라고 차 타고 기차 타고 가야 할 곳이 아닙니다. 누구도 나의 진짜 고향인 하늘을 빼앗을 수 없고 나의 기쁨이신 하나님과 나의 구원의 길이신 예수님과 나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니 누구를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미워할 필요가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삶의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잃지 않으려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는 하나님은 나의 애인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원수가 나의 건강을 해치려 하고, 재산을 해치려 하고, 명예를 해치려 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말처럼 원수가 뛰어봤자 벼룩입니다. 원수는 내게서 하늘을 빼앗아 갈 수 없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인생에 훼방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이쑤시개로 스테인드 글라스에 상처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은 주권자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믿음의 기준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늘의 평강이 주어질 수 있음을 선언한 사건이고, 하늘을 가졌다면 하나뿐인 몸을 죽이는 자들조차 미워할 이유가 없음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대 역사를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스데반 집사님에게 임하고 있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원수가 어떤 이쑤시개를 들고 와도 흠집을 낼 수가 없습니다. 과장된 표현입니다만 원수야 얼마든지 생겨라!”라고 외치고 다닐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에 세워두신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은 계획들에는 조금의 오차도 생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한계에서 원수를 미워하고 소모하는 동안에는 하늘을 빼앗기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의 계획까지도 망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심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악한 일들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근동지방의 기근으로부터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요셉을 선택하셨고 원수의 마음을 가진 형들을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때에 원수는 하나님의 계획을 추진하는 재료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만을 애인으로 삼는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원수는 내 삶을 진척시키기 위한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이 당시의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될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을 원수로 쓰심으로써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십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께서 원수를 이용하셔서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좋은 모델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원수는 반가와해야 될 대상입니다. 내 인생이 풍요롭기 위한 악역을 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비난하고 욕하고 내가 가진 것을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위하여 악역을 담당하게 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원수에 대한 정확한 개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있어서 돌로 치는 자들은 원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조금이라도 빨리 그토록 좋은 하나님께로 보내주고자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원수가 생기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리고 어떤 원수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구원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서는 유전 죄의 기질이 죽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의식의 자궁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을 애인 삼으려는 죄적 기질을 틀어막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을 좋아하는 자는 세상에서 미워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수는 생길 수 있지만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붙잡고 유지함으로써 이 세상을 애인 삼으려는 못된 기질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원수를 미워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시고자 쓰시는 재료임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미워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