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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시한부니까 밉지만 봐주자>의 줄거리: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도대체 왜 이래야 합니까. 하늘 아버지는 내가 만나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자비로우시기 때문이랍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으신 하나님의 악인을 향한 자비의 의미가 뭘까요?
시한부니까 밉지만 봐주자
(누가복음 6:35~36)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시한부니까 밉지만 봐주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시한부니까 밉지만 봐주자’
앞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다양한 예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두 구절을 통해 결론을 짓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집중해야 할 부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하찮은 미물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감안할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에 이미 죽을 시간도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생이 시한부임을 염두에 둔다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수명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태어나서 사는 모습을 보고 계시다가 상과 벌을 주시듯이 수명을 결정하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는 것은 아닐지라도 무의식중에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기에 일단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노환이나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벌과 연관을 시키게 됩니다. 또 스스로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의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건강을 열심히 잘 돌보면 10년 살 것을 12년은 더 살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정확하지 않기에 생겨난 오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사람이 죽는 이유가 되는 질병의 종류를 1040가지로 분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다면 교통사고 자체를 지목하지 않고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한 내장파열 등을 사인으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살인범에 의해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더라도 단순히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호흡이 멎어 숨졌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볼 때에 1040가지의 사인(cause of death)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1040가지의 사인의 근간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1040가지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행해 가시는 것이지 하나님과 무관하게 생긴 병이나 사고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명까지 20년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갔더니 말기 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곧 죽으리라 여길 것입니다만 실제로는 말기 암에도 불구하고 20년을 더 살아갈 것입니다. 반대로 무척 건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이 3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건강한 몸으로 3일 뒤에 죽게 됩니다. 몸이 약해서 골다공증이 있고 혈압이 높은 것 등이 불안요소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사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되었기에 죽는 것이지 건강관리를 잘못했다는 이유에서 죽는 법은 없습니다.
설령 살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해를 당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하나님께서 살인범을 통해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살인범은 자기의 악함을 드러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함을 이용해서 죽음의 시간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악한 자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악함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이 이들의 악함에 의해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더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위해 본래 정하신 죽음의 날짜를 조정하셔서 더 일찍 죽게 하시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비롯하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자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35절의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자녀다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 될 권세를 받았으니 자녀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닮는 것입니다. 인격적 유전자가 옮겨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5절의 마지막을 보면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격적 유전자가 나에게도 옮겨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즉 원수나 악인들을 향해서도 자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백분 활용해서 자녀답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중요합니다. 특히 원수나 밉상으로 여겨지는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자녀 되는 권세를 잘 활용하였는가가 결정되고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지 못한다면 구원을 이루지도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던 바가 의미하는 것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복을 말씀하셨고 동시에 네 가지 저주를 말씀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위로란 바로 하나님 곁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대신 재물에 마음을 둔 자들은 영원토록 하나님이 계신 보좌로는 부름을 받지 못한 채로 사후의 삶이 있으리라는 의미입니다. 또 25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대신 세상으로 마음을 배불리려 했던 자들은 영원히 마음의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주린 채로 저주와 화를 당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자 한 사람들은 영원토록 웃지 못하고 애통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자비로우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저주를 선언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비로우시다는 것일까요? 애초에 자비로우시다면 천당과 지옥을 따로 만들어두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게 하시는 악인에 대한 자비로움을 찾기는 어렵게 느껴집니다.
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예수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모든 죽은 자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다 부활하여 예수님의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악인과 의인으로 구분되어 악인은 영원한 벌에 처해질 것이고 의인은 영원한 축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한다면 복음 즉 기독교 자체가 부인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자비로우시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의 실존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평지수훈은 사람의 실존 즉 삼각관계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을 보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국민이기에 앞서 인간이라는 근본적 기준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대단한 성취나 업적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천하를 호령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거짓말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결혼해서 자식 낳고 오손도손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다 죽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거짓말입니다. 나는 못났지만 자녀들만큼은 훌륭하게 키워야한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자녀 때문이 아닙니다. 보람과 행복을 위해서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 나라는 삼각관계 안에서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태양과도 같은 첫 번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왜 태어났다가 죽는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든지 그 일을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세상과 하나님과 나라는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한 기회를 제공 받은 것입니다. 세상은 육체를 통해 대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의 감각에 대해서는 가려져 계시지만 믿음 안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세상과 믿음으로 만나는 하나님 중에서 누구를 택하여 마음에 담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하다가 죽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태양처럼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을 태양처럼 바라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줄리엣 대신 하나님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로미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줄리엣이었습니다. 로미오는 하나님과 줄리엣 중에 누구를 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 하나님을 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던 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이삭 중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기회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그렇기에 천사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보다 덜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천사보다 나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는 천국에서 지음 받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좋으심에 완전히 정복당하고 사로잡혔기에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하나님의 좋으심이 가려져 있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만 하나님의 좋으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체의 감각으로 느껴지는 세상의 모든 좋음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명을 통해 한정된 시한부 인생으로 주어져있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악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십계명의 5계명 이하에 나오는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이 사람이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이유 또한 정하신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는 악한 행실을 하는 동안에도 지속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선택은 악한 행실에 구애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별의별 악한 짓을 했고 심성이 뒤틀린 사람일지라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붙잡는다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살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까지는 여전히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십자가를 붙잡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시려고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악한 자를 당장 벼락에 맞아 죽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의 순간까지 살려두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어떤 악한 자도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인내를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악인을 향한 인자하심이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한부 인생이 끝난 뒤에는 상황이 급변하여 영원한 벌과 영원한 축복으로 갈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과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면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영원한 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인생은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오히려 악하면 악할수록 시한부 인생이 끝나면 끝나갈수록 하나님의 바람은 간절해집니다. 악한 사람의 죽을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가운데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택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게 될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기회는 시한부 인생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한부 인생이 마무리되는 시점까지는 어떤 악인일지라도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통째로 주시기로 작정하신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이 바로 자비로움과 인자하심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이 기회를 낭비하고 세상을 좋아해서 돈 쓰는 맛과 돈 버는 맛에 취해 살다 죽는다면 “화 있을진저”로 시작되는 네 가지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보좌 곁으로 부름 받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 마음의 배부름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은 죽는 순간까지 세상을 아까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기다리시고 기다리셨지만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굶주림과 공허함 속에 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나와 모든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수도 밉상도 화상도 진상도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육신의 감각으로 만나는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를 바라볼 때에도 이러한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배우자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만족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는 위대한 정복가라 불리지만 이들 또한 정복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은 아닙니다. 이들의 업적을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난센스 중의 난센스입니다. 남자로 태어났든 여자로 태어났든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죽기 전까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날마다 세상 대신에 하나님을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한 분으로 영원히 기뻐하고 만족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줄을 모르는 채로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가 봐도 할 일이 없기에 지옥으로 보내져도 할 말이 없습니다.
배우자를 볼 때에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우자가 내 마음에 들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 또한 내 마음에 들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부모님도 하나님으로 행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선택해야 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태어난 목적이고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택하기 위한 기회로써 배우자가 되게 하셨고 부모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나라보다 하나님을 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라가 잘되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지 문재인 대통령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통령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대통령을 통하여 나라를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재벌 총수의 삶의 목적 또한 돈 많이 벌고 기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대신에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으로 삼으라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업과 하나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몸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몸과 하나님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결정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내 몸을 잘 가꾸고 건강 백세를 향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시한부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그 시간까지 몸으로 대하는 세상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을 반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시한부 인생으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이유로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게 잘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게는 잘못이 없는데도 나를 원수 취급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밉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내게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판단 받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한부까지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으로 선택하느냐에 대한 과제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시한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까지 하나님을 택할 수 없다면 누구나 영원한 벌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비록 밉상일지라도 시한부이기 때문에 봐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덮어줄 수 있고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처한 입장을 본인이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입장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입장을 이해하고 잘못을 덮어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구나. 네가 정말 내 아들이다”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 만나는 모든 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후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모든 악행과 죄악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과 동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단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기대하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시진핑 주석도 김정은 위원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나에게 잘하거나 못하거나를 떠나서 하나님을 택하기만을 기다리며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다운 삶을 살아갈 때에 아직 살아갈 시간이 남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쓰실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택할 수 있도록 나를 빛과 소금으로 활용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선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원수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물론이고 나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바라며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도 시한부 인생이고 저를 미워하거나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사람들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정하신 시한부까지 그들에게 기대하시고 기다리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닮고 그대로 배워서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