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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비판 정죄하는 버릇 끝내는 법_태승철 (누가복음 6:37~4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07|조회수6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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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비판 정죄하는 버릇 끝내는 법>의 줄거리:

비판하기, 정죄하기, 탓하기. 참으로 지독하게 끈질긴 습성입니다. 우리는 이 버릇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우리의 마음을 평강과 감사가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넣게 됩니다. 주님은 본문을 통해서 그런 지독한 버릇의 이유와 해법을, 뜬금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제시하십니다. 이유는 얻으려 하기 때문이고 해법은 주라는 것입니다.


비판 정죄하는 버릇 끝내는 법

(누가복음 6:37~42)

 

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비판 정죄하는 버릇 끝내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비판 정죄하는 버릇 끝내는 법

우리에게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버릇이 배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를 통하여 이 바람직하지 않은 버릇을 끝내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계십니다.

비판하고 정죄하면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과 정죄의 효과는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내가 비판하고 정죄하여 타인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탓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비판하시고 정죄하시고 탓하시고 책임을 추궁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버릇이 되어버린 비판과 정죄는 빨리 차단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해당하는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의 내용을 하나씩 짚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평지설교의 내용을 내 것으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을 때에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지설교의 말씀을 삼각관계 안에서 이해해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원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며 시한부 인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한부 인생으로 태어나게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육체를 입고 오감을 통하여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짐을 통하여 세상을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육체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존재하고 계십니다. 이로부터 삼각관계가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에 채우려는 시도 자체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마음 채움을 위하여 육체의 감각을 통해 만나는 대상을 선택할 것이지 믿음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에게는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 채움을 위하여 기쁨을 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시한부 인생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욕구하고 사랑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까지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갈 때에 끊임없이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될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조건적으로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준다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얻으려 할 때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합니다. 배우자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할 때 부부관계는 망가집니다. 부모가 자녀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할 때 부모자식 관계는 망가집니다. 이웃이나 친구나 회사나 정치권 등에 이르기까지 사람으로부터 무엇이든지 얻으려 할 때 반드시 비판하고 정죄하고 탓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비판하시고 정죄하시고 탓하실 것입니다. 이때에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망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조건 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 채움의 기쁨을 위하여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할 때에 반드시 비판과 정죄의 버릇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쫄딱 망하는 결론으로 이끌려지게 됩니다.

 

본문은 내용이 특이합니다.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7장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같은 사건을 기록함에도 각각 고유한 관점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으로 읽으면 되고 누가복음은 누가복음으로써 읽으면 됩니다. 다만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비교를 통하여 누가복음만의 특징이 더욱 부각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71~2절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37절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38절에서 마태복음에는 없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또 이 부분이 끝난 후에 누가는 다시 마태복음에 없는 비유를 하나 더 삽입합니다. 본문 39~40절의 맹인에 대한 내용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누가복음에서는 마태복음에 나타나지 않은 두 가지 내용이 더 삽입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마태의 내용에 두 부분을 삽입하는데 첫 번째는 남에게 주라는 내용이고, 두 번째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누가가 지어낸 것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마태와 누가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고 그 과정에서 차이가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둘 때에 누가복음이 마태복음보다 나중에 쓰였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타인에 대한 비판과 정죄를 금하는 말씀에 앞서 이러한 내용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대로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강조된 내용은 결국 남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주는 쪽으로 고정될 수 있을 때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란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때 주는 쪽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돗물이 수원지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고 가가호호로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방향이 거꾸로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사람을 만날 때에 관계의 흐름은 주는 쪽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얻으려는 방향성을 취하게 된다면 반드시 비판과 정죄와 탓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상태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똑같이 비판하시고 정죄하시고 탓하시고 책임을 추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어떻게 주라는 것일까요? 그리고 얻으려고 하면 왜 비판하고 정죄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먼저 주라는 말씀에 대해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과 연관하여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친 내용이 나옵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구하는 것은 돈이었으나 베드로가 주고자 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고자 하는 방향에 있었고, 그 결과 이 사람이 원하지도 않았던 무엇인가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베드로에게는 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은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원하여 구걸하였던 것은 돈이었으나 베드로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 안에 있었던 베드로는 인간관계에서 주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자신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뜻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늘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임산부가 언제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의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식하는 동안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이 송유관이 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하는 동안에 하늘로 이어진 송유관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내려와서 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지배하는 동안 육체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수원지에서 수돗물이 흘러들어오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나에게 들어와서 차오르는 하나님의 뜻을 줄 수 있을 뿐이지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설령 상대가 천하의 악인이라 불릴지라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못된 짓을 한 사람을 보는 동안에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한다면 주는 자의 입장이 됩니다. 마음에서 그 사람을 의식하기 전에 이미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하나임을 의식할 때에 하늘로 이어진 송유관은 유지되고 하나님의 뜻은 계속해서 내려오게 됩니다. 천하에 나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지만 내 마음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나 정죄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셔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지 나 스스로 그 사람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며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틈새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주는 관계가 지속되어 가게 됩니다.

 

만약에 베드로에게 돈이 좀 있었다면 베드로는 아무 생각 없이 돈을 주었을까요?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하늘과 송유관이 연결된 상태이기에 베드로가 걷지 못하는 자를 보았을 때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갖고 계신 뜻이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걷지 못하는 자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다면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게 있는 돈을 네게 주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은 계속 내려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만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영원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나의 뜻대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위가 있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몸 하나가 있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 사람들에게 주려고 할 때에 그 뜻을 예수님의 몸이라는 캡슐 안에 담아서 주십니다.

예를 들어 내게 돈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그 돈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돈이라는 캡슐에 담아서 주는 것입니다. 돈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나 능력이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이나 봉사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었을 때에 내게는 하나님의 뜻이 비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38절을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마음은 더 많은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고 더 큰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채워지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이 빈자리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좋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빈자리가 있다면 반드시 채우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은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에게 존재하는 여러 가지 대상들을 그릇과 캡슐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타인에게 흘러가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주는 사람으로 살 때에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게 됩니다. 37절을 보면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반대로 비판하고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는 삶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주는 삶이 끝나게 되는 이유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음에서 잉태함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중단됨으로써 하늘과 땅에 있는 내 마음을 연결하는 송유관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할 때에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마음은 하나님만이 들어오실 때에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이 연결되고 열려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늘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단되면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못한 채 비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비어있게 되면 채워지고자 하는 흡입력이 24시간 작동하게 됩니다. 이때에 사람을 대하면 얻기 위한 관계를 맺고자 하게 됩니다. 이 흡입력은 배우자든 원수든 대통령이든 작동합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흡입력은 언제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얻으려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으로도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에 덩그렇게 떠있는 운석조각만도 못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사람으로부터 얻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마음이 채워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 기대감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배신감이 생겨서 비판과 정죄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얻으려고 했을 때에 비판과 정죄가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무의식중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베풀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회수를 기대하는 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녀가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성이 재벌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봅니다. 돈도 많은데 박사학위도 세 개나 있는 지식인입니다. 그러한 남편이 정치권에 들어가게 되어 결국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몸도 좋고 외모도 뛰어납니다.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남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여성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장점보다도 사소한 결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모든 장점을 합해도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에 남편을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하는 책임을 탓하게 되고 추궁하게 됩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 한편에서는 항상 불만이 존재합니다. 별의별 직함을 갖고 있어도 나 한 사람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원망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는 남편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철이 들거나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채움의 대상을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쇼핑하는 것에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자녀의 형통과 성공으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삼아보고자 합니다. 남편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에 비판과 정죄도 하지 않지만 그 비판과 정죄가 다른 대상을 향해 옮겨갔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은 사람으로는 채워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과 정죄가 생기는 근원적 원인입니다.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정치권을 비판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크든 작든 대통령이나 정치인들로부터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설령 그 대상이 원수일지라도 기대는 존재합니다. 원수는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대상입니다. 없어지기를 바라는데 없어지지도 않으니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이렇게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사람에 대한 모든 바람에는 반드시 비판과 정죄가 따르게 됩니다.

 

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비판과 정죄라는 못된 버릇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뉴스를 통해서 가정파괴범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런 나쁜 놈이 있나!”라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십자가에게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동선이 송유관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야 함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가정파괴범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게 됩니다. 직접 마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 채움을 위한 필요를 하늘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속성은 발휘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하늘을 향해야만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주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늘을 수원지 삼아서 하나님의 뜻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서만 구하고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해 주기로 결정된 사람이 복지를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한 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쁨과 감사가 젖과 꿀처럼 흐르는 삶을 직접 체험하시고 간증으로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함으로써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송유관이 열리게 하시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뜻을 만나는 사람마다 주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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