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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리를 가리는 교리를 버리자>의 줄거리:
예수님은 교리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유일한 진리를 가르치셨고 자신이 진리이셨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천 년 기독교 역사는 마치 진리를 가리려는 몸부림의 역사처럼 느껴집니다. 참 선민이 모래알처럼 많은 것이 아니라, 교리가 별처럼 모래알처럼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교리가 진리를 덮어 가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가리는 교리를 버리자
(누가복음 6:39~42)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진리를 가리는 교리를 버리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진리를 가리는 교리를 버리자’
지난 시간에 본문을 충분히 살펴보지 못했기에 오늘은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리가 교리에 가려지는 현실을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에 비유하시며 상황정리를 해주고 계십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저는 서울여대 강사로 출강을 하고 있었는데 영락교회의 임영수 목사님의 부름을 받아 부목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영락교회에는 임영수 담임목사님이 계셨고 그 밑에 22명의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들이 다 모여서 성경공부반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반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존에 전도사님께서 2년 동안을 이끄신 성경공부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님께서 교회 규정에 따라 임기를 마치고 떠나게 되어서 다른 인솔자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성경공부반이 특이한 점은 성경을 가지고 공부를 해왔던 것이 아니라 캘빈의 기독교강요로 공부를 했습니다. 목사님들께서도 설교 준비로 바쁘신 와중에 따로 기독교강요 연구를 하시며 인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황이기도 하였지만 저는 다른 이유로 이 공부반을 없애야 마땅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캘빈의 기독교강요라는 책은 양날 선 검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강요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은 세살 아이가 칼을 쥐는 것같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강요를 가르치던 전도사님이나 참여하던 분들을 무시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캘빈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가르쳐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저의 지도 교수님은 세계캘빈학회의 대표자이셨고 제가 박사학위로 구두시험을 볼 때에도 조직신학 분야에서 캘빈을 주제로 정하여 발표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발표 마지막에 캘빈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는 제안을 받고 대답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다섯 분의 교수님과 학장님께 박수를 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얼마든지 캘빈에 대해 유식한 분들이 계시겠지만 저 또한 나름대로 캘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 공부반을 없애자고 말씀드린 데에는 이러한 공부법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쉐프가 복어를 다루는 것과 같습니다. 캘빈의 사상은 복어의 독을 제거하는 것처럼 주의를 집중해서 다루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임영수 목사님이 이유를 물으셨고 저는 “장담컨대 2년 동안 공부하신 분들의 신앙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귀에는 더 이상 설교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실지라도 문자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캘빈의 기독교강요의 교리에 맞는지 틀린지를 판가름하고자 하게 될 것이며,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드렸습니다.
결국 그 공부반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기에 그런 말을 했던 제가 공부반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공부반에 모인 분들이 교리에 관한 관심이 많음을 알았기에 로마서로 교재를 바꾸게 되었고 이에 반발해서 나가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참여하시는 분들과 한 분 한 분 만나 대화를 해보면 여지없이 말씀드린 상태에 놓여계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기독교강요의 이런 점을 무시하고 있고 또 어떤 목사님의 설교는 기독교강요의 저런 점에서 어긋나있다는 식의 비판과 정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리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비판과 정죄라는 칼을 쥐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일화를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갑자기 맹인의 인도와 선생과 제자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39절을 보면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였고 40절에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맹인 선생이 가르칠 때 맹인 제자는 맹인 선생처럼 완벽한 맹인이 될 것이고, 참된 선생이 가리키면 선생이 참된 만큼 제자도 참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비판에 대한 교훈은 7장에 등장하는 한편 맹인의 인도와 선생과 제자에 대한 비유는 10장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들보의 비유에 앞서 이 두 비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누가에게 이렇게 역사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과 같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던 내용은 기본적으로 율법조문 613가지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모세오경의 율법 외에는 가르치지 않던 사두개인도 있었습니다만 대부분은 율법조문 613가지를 기본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 율법에 대한 해석과 삶의 적용 단계에 있어서 설득력 있게 이론을 펼치는 자들이 랍비 즉 선생이라 불렸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선생들 밑에는 제자들이 있었고 또한 백성들에게 가르침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파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가르침을 두고 논쟁을 벌였고 비판과 정죄가 이스라엘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선생끼리 싸우고 제자들은 제자들끼리 싸우는 가운데 비판하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로 정리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난장판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앞선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맹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도 이들을 비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비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5~16절에서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판단을 받아들여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줄 수 있는 자만이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판단하셔서 비판하셨던 것이 아니라 난장판이 되어버린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전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도 선생들 중의 한 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다른 선생들을 맹인으로 취급하시며 차별화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와 진리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이 대표적이었고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도 백성들을 가르칠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라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다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르쳤던 것은 교리였습니다.
교리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이론과 교훈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고자 합니다. 선생들은 그러한 내용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며 다른 선생들과의 차이를 찾고 헤아리고 논쟁하였으며 다르면 비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이것을 학술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다만 진리와 비교해본다면 교리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나고 예수님과 다른 선생들과의 차이도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던 것은 교리가 아닌 진리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나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그 하나님을 나의 몫으로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평지설교의 내용은 이렇게 하나님을 가졌을 때에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선민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이론과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교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사과를 그려온 화가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화가는 사과의 형태를 아주 좋아하여 각종 사과를 그려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사나 홍옥으로부터 시작해서 갈라, 레드딜리셔스 등의 온갖 사과를 관찰해서 그렸습니다. 그런데 사과의 모양은 좋아하지만 정작 사과의 맛을 싫어해서 먹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던 선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사과를 한 번도 먹어본 적도 없고 사과를 먹으라고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사과의 그림만을 수천 장을 그리며 사과에 대해 안다고 자부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하나님을 먹어본 적도 없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먹을 것을 제시하지도 못했습니다. 교리라는 하나님에 관한 그림만을 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과를 먹어보라고 제시하시듯 하나님을 직접 먹도록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셨고 스스로 진리임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은 하나님을 제시하지 못한 채 하나님에 관한 교리만을 가르쳤기에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는 영적인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백두산 천지만을 그리던 화가가 계십니다. 세종대 교수이기도 하신 분이셨는데 이미 고인이 되셨습니다. 이분께 그림 한 장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께서는 백두산 천지를 그리기 위해 계절별로 날씨별로 열 번도 넘게 백두산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렇게 들락거려도 되는지 여쭤봤던 기억이 납니다. 이 분은 이렇게 백두산을 직접 경험해보셨기에 백두산에 대해 잘 아실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좋으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좋으신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우리에게도 맛보도록 제시하셨습니다. 사과를 깨물었을 때 달콤한 즙이 나오는 것처럼 실감나게 하나님을 가지도록 예수님 자신을 길로 제시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 선생들의 교리가 바로 들보였습니다. 이들의 교리 속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욕구도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교리에 파묻혀 평생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맹인과 같은 상태였고,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에 관한 교리라는 그림을 제시할 뿐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좋아함이 없고 하나님께 접근하고자 하지도 않는 상태가 바로 눈에 들보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만을 가지고 맞고 틀림을 반복하며 침 튀기며 싸우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논쟁의 진실입니다. 참혹한 영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실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교리논쟁에 매진하게 되었을까요?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원론이라는 분야에서 캘빈의 예정론을 두고 사람이 노력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현장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의 관심은 오직 논쟁에서 이기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목을 매게 된 이유는 한 마디로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는 대신에 이 땅에 있는 것들을 좋아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잘해야 돈과 명예와 인기와 존경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선생이라 불리게 되고 제자들이 몰려오며 영향력이 생기며 학파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평생을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만 하다가 죽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전체의 의미를 축약하시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완성시키는 단계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21~22절을 보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24절을 보면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가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론이나 화해론이나 창조론 같은 교리나 이론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나와 함께 너희 마음이 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서 하나님 보좌 옆에 앉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을 통해 실제로 그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따를 때에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한 가지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이 세상과도 바꿀 수 없이 좋으신 분임을 경험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자는 말 외에는 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 그 증거는 삶의 현장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평지설교의 내용처럼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이신 이유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진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길을 가는데 루터나 캘빈이나 츠빙글리의 신학이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의 독일 유학시절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저는 20세기의 교부라 불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연구했습니다. 칼 바르트는 캘빈파 개혁신학자였고 저의 지도교수님은 그 칼 바르트의 마지막 제자였습니다. 그 지도교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이미 많은 박사학위소지자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다시 교수자격 논문을 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그러한 제자들 중에서 저를 칼 바르트의 손자라고까지 부르셨습니다. 저의 논문이 그만큼 교수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한 만큼 신학을 버립니다. 캘빈과 루터와 츠빙글리의 교리를 버립니다. 캘빈의 예정론이라는 교리 하나만으로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정죄와 비판이 이루어져 왔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리를 선택했느냐 안 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시해주시는 진리의 길을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뜻을 사람들에게 주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 중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지혜가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지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율법의 한 글자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율법이 다 지켜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풍성한 이론이 생기리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따라 하나님께로 가면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지켜지리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교리나 이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지켜지는 것이지 연구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일과 미국을 비교해보면 독일은 여전히 정통교리신학에 대한 연구가 왕성하게 진행 중입니다. 한편 미국은 정통교리신학을 고리타분하게 여겨서인지 실생활에 적용을 위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미국 신학교의 핫이슈는 동성애와 같은 시대적 문제들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복음주의라고 자칭하는 크리스천 저널리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들 중에 십중팔구는 영혼의 양아치들입니다. 그러한 저널리스트들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을 분깃으로 갖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가 무슨 말을 하든지 독일의 신학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루터나 캘빈이 무슨 말을 했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루터나 캘빈도 공부할 만큼 한 사람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루터도 버리고 캘빈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을 붙잡을 수 있으면 됩니다. 이 동선을 통해 하나님을 가질 때에 루터보다 캘빈보다 더 풍성한 지혜의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교리가 진리를 가로막는 모습은 어렵잖게 발견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캘빈의 예정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예정론이라는 기준에서 듣게 됩니다. 저 자신 또한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고, 또 16장 13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과 세상 가운데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예정론이라는 교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캘빈이 예정론을 이야기할 때에는 일종의 이론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복음을 전해 봤을 때에 깨달은 바를 전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복음대로 살려고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면서 노력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탄식도 하고 수고도 하고 노력도 나타나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예정론을 잘 알게 되면 구원에 더 가까워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아 사는 가운데 노력하고 수고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발견하는 것이 예정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때마다 선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수고하고 선택한 모든 시간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정론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때마다 의지를 가지고 세상 대신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점점 더 하나님과 친해지게 됩니다. 내가 수고하고 선택한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돈 대신 선택했고, 내가 아내나 자녀나 나의 몸보다도 예수님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가 있었기에 그러한 선택도 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예정론에 대해 배우는 것과 예정론을 배워서 그것이 전부인줄로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으니 구원은 정해진 일이고 성도의 견인을 따라 살게 된다고 마구잡이로 가르치고 배워왔습니다. 그리나 그것은 맹인이 맹인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교리가 진리를 막아버리고 비판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교리에 치우친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로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삶에 필요한 모든 지혜와 뜻을 주실 것입니다. 전문 영역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책을 읽으라고 구체적인 뜻을 전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보낸 상태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내 맘대로 책을 정해서 먼저 읽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모든 신학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천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값싼 영혼들이 주절대고 있는 쓰레기 같은 글자들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고 십자가가 있고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을 갈 때에만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끝이고 전부입니다. 아버지를 만난 뒤에 어떤 풍요로운 삶이 펼쳐질 것인가는 여러분이 경험하실 내용이고 여러분의 간증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을 뿐입니다. 교리를 버리시고 진리를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한 분만을 붙잡고 모든 교리와 이론과 신학들을 깡그리 버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