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말씀에 몸이 안 열리는 이유>의 줄거리: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신 예수님이 우리가 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지 몰라서 물으시겠습니까? 아니요. 우리 자신이 대답하라고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답을 말하자면 귀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귀가 열리면 몸도 열리게 되지요.
말씀에 몸이 안 열리는 이유
(누가복음 6:45~47)
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말씀에 몸이 안 열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말씀에 몸이 안 열리는 이유’
제목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말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몸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본문을 통하여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고 읽기는 읽는데도 몸에서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는 같은 내용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에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각도에서 비추어질 수 있습니다. 공생애를 끝내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나 누가를 비롯한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다각도로 비추어질 수 있는 말씀의 의미를 고유한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의도적으로 최후의 심판 분위기를 걷어내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결과로써 주어지게 될 최후의 심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삶을 결정짓는 요소로 판단하고 있는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똑같은 말씀이 지금 당장 살펴보고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의 말씀에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러한 기술의 차이로부터 강조하고자 하는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45절의 말씀을 보면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계심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45절을 정확히 직역하면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물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마음의 악한 보물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마음에 보물로 여겨지는 대상이 있습니다. 보물은 지금 마음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그 보물에 대한 생각과 관심과 욕구로 가득 차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입을 열면 반드시 그 보물과 연관된 언어의 체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마음의 보물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하여 마태복음과는 차별화된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보물이란 마음에서 최고로 좋아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에서 보물을 붙잡은 상태가 말과 행위라는 열매를 맺는 나무로 비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위에 앞서 말에 대해 말씀하신 이유는 말이 생각이라는 언어 체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러한 언어 체계가 행동으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언어 체계에 부합하는 행동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행위는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서 돈을 최고로 좋아하여 보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모든 언어 체계는 돈과의 연관성에서 구성됩니다. 이 사람이 연구직에 있는 친구 둘과 만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두 친구의 관심은 연구이기에 그 주제로 대화를 하는데 이 사람은 연구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흥미가 생기지 않으니 친구들과 있어도 말이 나오지 않고 실천할 행동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산책을 나가면 공원의 정자에 나이 드신 분들의 대화가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 분들의 대화는 80% 이상이 건강에 관한 것입니다. 육체가 한창 건강할 때에는 건강이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아플 때에야 비로소 육체를 의식하게 됩니다. 건강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젊은이들은 그 대화에 낄 수가 없습니다. 건강을 중심으로 한 대화에 흥미가 생기지도 않고 그 대화를 듣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행동의 의지도 생기지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젊은이들은 잠을 더 자는 쪽을 택하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배드민턴을 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건강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20대는 연애에 대한 언어의 체계가 구성되어 있기에 연애에 관련된 일에는 관심을 갖고 애인과 하는 일들에 대해서 적극적이 됩니다. 연애와 관계된 일들에 대해 부담이나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언어와 보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소중히 여기는 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보물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지면 기쁨과 만족이 주어진다고 믿어지는 대상 또한 마음의 보물이 됩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반드시 보물과 연결되게 됩니다. 의미가 없는 언어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개가 짖는 소리는 기차에 아무 의미가 없기에 들을 필요가 없고 듣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이처럼 언어의 생명은 의미이기 때문에 내가 보물로 여기는 대상과 연결된 언어라야 의미 있게 들리고 또한 말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본문의 말씀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6절에서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보물로 여기시는 대상과 내가 보물로 여기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보물로 여기시는 대상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께 보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향하고 계셨지만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땅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담고 계셨기에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동은 하나님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예수님과 같은 행동이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마음의 보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하신 것은 이유를 모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고 지금은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며 되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 말씀의 앞뒤 맥락을 통해 보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마음속 악한 보물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언어의 체계가 바뀌지 않았기에 행동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전히 재산과 재물과 돈이 보물로 여겨집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과 장수가 보물입니다. 어떤 부모에게는 자녀의 형통이 보물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물로 갖고 계셨던 예수님과 같은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 언어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보물이 돈인 상태에서는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언어를 말씀하셔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설령 듣는다 하여도 의미를 바꾸어 이해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에게서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돈을 보물로 가진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언어로 바꾸어 설교를 하고 듣게 됩니다. 이러한 설교는 영적으로 난장판인 상태입니다. 지금 돈이나 건강과 장수가 보물이 된 마음에 성경말씀이 의미 있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보물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말씀을 돈이나 건강과 장수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 둔갑시켜서 전하게 됩니다. 설교가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난장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세 살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사십 일 동안 제자들을 모으시고는 곧바로 승천하셨습니다. 마치 하늘에 꿀단지라도 있는 것처럼 서둘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 하늘의 꿀단지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하신 예수님께 돈이나 건강이나 장수는 보물일 수 없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다 가지실 수 있으셨던 예수님께서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귀중하고도 유일한 보물로 여기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언어를 세상의 가치들을 보물로 여기는 언어를 가진 채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십자가 복음방송의 모든 말씀은 예외 없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버러지 같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일한 답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말씀은 모두 이 두 가지 기둥 안에서 만들어지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상태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방송을 시작하던 시기에 집사람에게 이 방송은 공중에 뿌려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75억 인구 중에 마음에 하나님이 보물인 사람이 아니면 이 방송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목사님들조차도 부흥이나 큰 예배당을 보물로 삼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보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그러한 생각이 박살이 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예배당을 보물로 여기는 목사님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계신 예수님의 언어가 들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듣는 대로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행함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언행일치는 군자의 덕목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에는 큰 노력이나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언행일치는 실은 굉장히 쉬운 일입니다. 마음의 보물로부터 나오는 언어 중에 행해야 된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다면 전혀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비단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지라도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에 대해 행함이 어렵다고 느끼지는 이유는 성인들의 보물과 듣는 대중들의 보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행함은 먼저가 아닙니다. 언어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과 내 안에 있는 보물이 같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공중에 뿌리듯이 또 버리듯이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는 상태에서 말씀을 뿌리기에 하나님을 보물로 가진 분들만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여전히 세상의 악한 보물을 담고 살아갑니다. 그런 중에 땅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은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에는 여전히 세상의 가치가 보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말씀이 들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보물로 삼은 악한 언어들이 들려오며 마음에서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인격적 체질 또한 악한 보물로부터 나오는 언어들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복음방송을 전하는 제가 십자가를 붙잡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께서도 십자가를 바짝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 나가게 되면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언어가 아닌 세상의 가치들을 보물로 삼는 언어에 휩쓸리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돈이 안 벌리면 걱정하고, 승진 못하면 화가 나고, 해가 되는 사람은 미워하고, 득이 되는 사람은 예뻐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인간관계를 해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결국은 보물의 문제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라는 보물이 세상의 가치라는 악한 보물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못한 상태로 혼재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하나님을 최고의 보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 살 때에는 어느덧 세상 사람들의 언어에 따라 돈이나 건강을 보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보물로 받아들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악한 보물에서 나온 언어들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보물이신 상태를 유지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세상에서 보물로 여겨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적인 체질 때문에 십자가를 놓칠 때마다 마음에는 세상의 가치들이 보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에서 하나님을 보물로 가지셨던 예수님의 언어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몸이 열리지 않고 좋은 열매 또한 맺지 못합니다.
마음은 결국 힘이 강한 쪽에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십자가 복음방송을 30분 정도 듣는 것 외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언어를 접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악한 보물에서 나오는 언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면서 어느덧 보물이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몸이 예수님의 말씀을 향해 열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게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샤워하는 시간을 빼놓고는 십자가 복음방송을 계속 들으셨다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 설교를 특별히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에게 들으시라고 요청하는 것 자체가 죄송하고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십자가 복음방송 설교는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일점일획도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보물로 삼은 상태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현 세태에서는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상태에서 나오는 언어를 쉽게 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설교가 표현력도 뛰어나고 재미도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 능력이 부족하여 그렇지는 못할지라도 한 가지는 확언드릴 수 있습니다. 한마디 한 글자도 예외 없이 하나님이 보물이신 상태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설교가 성경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현시대에 맞추어진 언어라는 점입니다. 이 시대에 맞게 하나님이 보물인 언어 체계로 바꾸고 있는 것뿐입니다.
시즌 1부터 지금 시즌 2까지 계속되고 있는 십자가 복음방송은 일종의 들판이고 집이고 관광지입니다. 이 안에 들어오셔서 말씀을 순례하듯이 경험하신다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있는 언어들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의 언어 체계가 하나님을 보물로 삼도록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는 세상으로부터 쇄도해 들어오는 악한 보물로부터 만들어진 언어들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향해 몸이 열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남자이거나 여자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아빠나 엄마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직원이기에 앞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보물로 삼기 위함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돈을 보물로 여깁니다. 건강과 장수를 보물로 여기고 직장에서는 승진을 보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향해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틈나는 대로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보물로 확보하시고 확인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이 내 입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 열매 맺는 인격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의식의 첫 번째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악한 보물로부터 나오는 언어들이 홍수를 이룰지라도 하나님이 보물이심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향하여 몸이 열리며 말과 행동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