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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_태승철 (누가복음6:46~4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12|조회수4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의 줄거리:

단지 비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 차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수십억씩 하는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집을 단지 선물로 받으세요.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의 마음과 의식의 집입니다. 진정 유일하게 마음에 참 보호와 쉼과 평안이 주어지는 집이 바로 하나님을 유일한 보물로 삼아 지어진 언어의 집이지요.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

(누가복음 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가의 럭셔리 아파트를 꼽는다면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작은 평수도 30억 원을 호가하고 큰 평수는 100억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어의 집을 잘 짓는 것에 비하면 타워팰리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는 언어의 가치와 힘이 평가절하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저 사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혹은 “저 사람은 매번 말뿐이다.”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행동이 말보다 위에 있는 가치처럼 여겨집니다. 말없이 행동하는 것을 신뢰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애쓰고 땀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보아도 말에는 대단한 가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이 평가절하되는 이유는 말과 마음속 보물과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행위보다 못하기에 “저 사람은 매번 말뿐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보물과 언어가 일치하지 못하는 위선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도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물이란 가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되리라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이 보물과 연관된 언어로 말하는 것들은 반드시 행동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반대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마음속 보물과 연관성이 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에 말의 가치는 떨어지고 행동과 일치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전제로 알아야 될 선이해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6절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전부 예수님의 마음속 보물에서 나온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시는 보물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보물로 여길 수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 말씀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말씀이 지켜지고 있다면 내가 훌륭하거나 잘났거나 행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닙니다. 마음속 보물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45절에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선한 사람은 그 마음의 선한 보물로부터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의 악한 보물로부터 악한 것을 내고 사람은 그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느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음속 보물과 언어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한편 본문은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속 보물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는 다른 보물에서 나온 언어대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또한 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보물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행하게 됩니다. 이 모습이 48절에서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라고 비유됩니다. 반대로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마음의 보물이 예수님과 달라서 언어 체계가 다른 사람의 모습은 49절에서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라고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홍수가 나서 탁류가 밀려와도 요동하지 않으나 흙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서 파괴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마음 속 보물과 언어의 관계를 집에 비유하신 것일까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오늘 말씀의 제목을 ‘타워팰리스 대신 언어의 집’이라고 붙였습니다. 마음 속 보물이 집의 기둥이라면 언어는 집을 감싸는 벽돌입니다. 보물인 기둥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언어들은 벽돌처럼 쌓여서 집을 이루게 됩니다. 집은 외부와 구분되는 장소이자 쉼과 보호와 평안이 있는 장소입니다. 이처럼 보물로 만들어진 언어의 체계는 마음과 의식이 머무는 집이 됩니다.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육체의 집은 될 수 있으나 마음과 의식의 집은 될 수 없습니다. 몸이 쉬는 곳에서 마음과 의식도 쉴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은 오해입니다. 마음과 의식은 항상 언어의 집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 언어의 집이 튼튼하고 좋으면 마음과 의식은 쉼과 보호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육체가 타워팰리스 같은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을지라도 언어의 집이 부실하면 마음과 의식은 쉼이 없고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쪽방에 살지라도 언어의 집만 잘 지으면 마음과 의식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고, 타워팰리스에 살아도 언어의 집이 부실하면 마음과 의식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 때에나 나타날 일이 아닙니다. 심판 때에 가서야 집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늘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추라는 말이 중요 어휘로 등장합니다. 선한 보물이 반석이고 악한 보물은 흙입니다. 악한 보물에서 나오는 언어들로 집을 지으면 마음과 의식은 탁류가 부딪치매 무너져 파괴됨으로 결코 쉼과 보호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선한 보물에서 나오는 언어들로 집을 짓는다면 몸이 처한 환경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마음과 의식은 언제나 보호와 쉼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언어의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내가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있는지 무너질 집을 짓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재물 즉 돈을 하나님과 대치되는 마음의 보물로 가정해보겠습니다.

돈을 마음의 보물로 삼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돈을 보물로 느낀다고 해서 무조건 돈이 많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돈의 힘을 믿어서 돈을 보물로 붙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의 보물로써 붙잡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하나님만이 나의 보물입니다. 이 고백처럼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진짜 보물로 느껴지게 해주옵소서.”라는 내용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돈이 마음의 보물이 되어서 그 이름을 붙잡습니다. 그러면 언어로 붙잡은 돈이 기초가 되어서 모든 언어들이 돈과 연관성을 가질 때에 의미가 있는 언어가 됩니다. 언어의 집을 지을 때에 최초의 벽돌은 “돈이 최고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돈이 있어야 대우 받는다.”라는 벽돌이 쌓이고, 이어서 “돈이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다.”라는 벽돌이 쌓입니다. 돈이라는 보물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언어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어의 벽돌은 계속 쌓여갑니다. “돈만 있으면 노후가 두렵지 않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사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가족이 기죽지 않는다. 돈이 있어야 사회생활도 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언어들이 유기적으로 엮이며 체계가 생겨납니다. 체계가 생긴다는 것은 곧 언어의 벽돌로 만들어진 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과 의식은 돈을 기반으로 한 언어의 집에서 쉼을 얻고자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보물에서 언어가 나오고 그 언어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부를지라도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과 마음의 보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보물을 가진 것입니다. 이는 곧 언어의 체계가 예수님과 같다는 것이고 예수님과 같은 집을 짓는 것입니다.

언어의 집은 곧 마음과 의식이 머무는 곳입니다. 쉼을 얻고 보호를 받고 평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보물로 삼은 돈이 충분치 않은 상태라면 어떨까요? “돈이 없으면 망한다.”라는 언어의 벽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탁류가 오면 집이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탁류는 바로 마음속 보물을 원하는 대로 갖지 못한 상황입니다. 돈을 원하는데 돈을 가질 수 없다면 탁류가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원하는 만큼 보물을 가질 수 없다면 이제 그 보물에서 비롯된 언어로 만든 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집의 벽돌이 빠져나가면 그만큼 노출되어서 쉼과 보호와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의 일이 마음과 의식에서도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최고로 여기는 돈이 없다는 사실은 탁류가 되어서 돈이라는 언어로 지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돈 없으면 망한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을 하는 사장님이 대출을 갚지 못해서 부도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자살까지도 합니다. 이 사람이 죽는 이유는 돈이 없다는 객관적 사실 때문은 아닙니다. 돈으로 만들어진 언어의 집이 무너지면서 마음과 의식이 불안하고 아프고 괴로워집니다. 말 그대로 천장의 벽돌이 떨어져서 집안에 있는 사람이 맞고 있는 형국입니다. 돈과 연관된 모든 언어가 사장님을 공격합니다. “너는 돈이 없기 때문에 패배자다. 돈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지옥 같은 삶에 몰아넣을 것이다. 유학 간 자녀의 학비를 댈 수 없으니 자녀도 망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단지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서 비롯된 언어들이 끊임없이 마음을 공격하기에 견뎌낼 수 없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돈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언어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더욱 확장되고 증축됩니다. 마음에서 돈이 보물인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돈에 대한 언어는 나뿐만이 아니라 결혼 상대를 향하게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최고의 배우자다.”라는 생각부터 떠오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남자의 직업과 재력을 따지는 것은 예로부터 당연시되어 왔으나 여자의 직업과 재력을 따지는 것도 한참 되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는 여자가 공무원이나 선생님이기를 바라고, 여자는 남자가 집은 해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잣집 외동딸 외동아들이면 금상첨화입니다.

돈에서 비롯된 언어의 집이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와 연관되어서 확장되고 증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집이 커진다는 것은 무너졌을 때의 피해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된 단어들과 말들로 만들어진 언어의 집안에서 살면서 돈이 벌리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희로애락의 청룡열차를 타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절대로 사실 자체를 직접 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사실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 자체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 사실은 마음에 객관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언어의 창문을 통과하며 주관적으로 전달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 사실을 직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드시 마음은 언어라는 집의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사실만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돈을 보물로 여기는 상태에서는 돈이 없다는 사실은 비관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돈이 안 벌리는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을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나의 보물이신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관하시니 오늘 돈이 안 벌린 것도 하나님의 주관하심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돈을 못 벌게 하신 것은 돈을 버는 것이 내게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광야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설령 내가 길바닥에 나앉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사랑은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이 안 벌리는 것과 삶이 망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보물로 삼은 언어의 집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돈이 없는 것을 곧 망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돈이 없다는 현실이 탁류가 되어 돈에서 비롯된 벽돌집을 무너뜨리면서 나를 괴롭게 합니다. “돈이 없으면 망한다. 돈이 없으면 실패자다. 돈이 없어서 쫓겨나게 생겼다.”라는 벽돌들이 무너지며 마음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최후의 심판 앞에서만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보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는 동안 이미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주님께서는 본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실이 주어지더라도 그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많이 벌린다고 좋아할 수 없고 돈이 안 벌린다고 해서 싫어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 단지 언어의 집 안에 머무르는 마음과 의식이 받아들이기 나름일 뿐입니다. 삶에서 어떤 사실들이 몰려왔을 때 언어의 집이 무너지느냐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무너지고 공격당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무너지지 않는다면 평안합니다.

스데반 집사님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도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있는 언어의 집이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 집사님은 언어의 집 창문을 통해 오히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언어는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하나님을 보물로 삼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의 집은 땅의 일들로 무너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은 육체가 돌에 맞아 죽는 사실에 대해서도 평강이 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다르게 사람들은 건강으로 인해 걱정합니다. 특별히 몸에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걱정이 앞서고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돈에서 비롯된 언어로 만들어진 집이 돈이 없을 때에 무너지듯이, 건강에서 비롯된 언어로 만든 집이 건강이 안 좋다고 여겨질 때에 무너져서 무차별적으로 마음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 뿐입니다. 돈이 없는 것은 돈이 없을 뿐이고, 병에 걸렸다면 걸렸을 뿐입니다. 본래 이러한 사실들은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나 마음과 의식이 어떠한 언어의 집에 들어가 있느냐에 따라 집을 부수는 탁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주무셨지만 제자들은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풍랑이라는 사실은 같았으나 받아들임이 달랐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어의 집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건강 장수하고 자녀들이 형통해야 복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많고 건강하고 자녀가 형통해도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몸이 놓여 있는 사실과 마음이 거하는 집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어의 집안에 마음과 의식을 둡니다. 우리가 죽기 살기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죽은 자의 의식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질 때에만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보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물로 삼았을 때에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집을 짓듯이 성령이 임하셔서 언어의 체계를 만들어가시게 됩니다.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의 모습이 불의 혀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혀는 곧 언어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마다 성령에 의해 말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보물로 삼아 만들어진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을 때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빈익빈 부익부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29절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보물로 삼는 악한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이 무너지는 공격을 받아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없는 자가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형국입니다. 한편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습니다. 세상에 있는 가치를 보물의 후보군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같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보물로 삼게 됩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보물로부터 나온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확장되고 증축되어 갈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거하심을 크게 느끼며 마음의 쉼과 평안도 커져갑니다.

구약성전의 존재의미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해 택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언어로 붙잡는 보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보물로 여길 때에 우리의 마음은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곧 성령님의 집인 동시에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거하실 것이고 영역을 넓혀 가실 것입니다. 성령님이 언어를 확장시켜 나가실 때에 스데반 집사님처럼 되고,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하는 언어의 체계가 점점 더 확장되어 삶의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 결혼 자녀양육 건강 부부관계를 비롯한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확장시켜 나가실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삶의 영역마다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통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이 전쟁이 의미하는 바는 이 세상 사람들이 쓰고 있는 언어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보물인 상태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보물이 상태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또 부모는 자녀형통이 보물인 상태의 언어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를 하나님이 보물이신 상태의 언어로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 분야의 영역마다 악한 보물에서 비롯된 언어의 벽돌들을 하나님이 보물인 상태로 바꾸어나가며 정복하는 것이 우리가 치러야 할 복지 전쟁입니다.

결혼이나 건강이라는 한 단어만 해도 수많은 언어군(言語群)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개념과 사건들마다 형성되어 있는 언어군에 대하여 하나님을 보물로 하는 집을 증축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성령이 거하실 장소는 점점 넓어지며 삶의 영역마다 하나님의 집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복지의 모습입니다.

삶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을 보물로 삼아 만들어진 언어의 집을 부숴버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보물인 언어의 집이라면 돈이 안 벌릴 때에 부서질 것입니다. 건강이 보물인 언어의 집이라면 몸이 아플 때에 부서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의 집은 땅의 사실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평안이 유지되었던 바와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집안에 마음과 의식이 머물렀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이 땅의 모든 보물 후보들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보물은 하나님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하나님은 나의 보물이 되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없다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은 세상에 있는 것을 마음의 보물로 갖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없다면 입으로는 하나님을 보물이라 말할지라도 실제로 마음에서 세상을 보물로 삼는 상태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태를 외식하는 것 즉 위선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포기한다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기독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일은 위선적이 아닌 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지될 때에 나머지 과정은 성령께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복음방송의 모든 언어는 하나님이 보물인 상태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의 목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가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온라인 교회는 복지전쟁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지가 그냥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계속해서 전쟁을 해나갔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언어의 전쟁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언어의 집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고 증축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느 한 영역이라도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로 증축될 수 없다면 허물어진 곳으로 탁류가 밀려들어와 언어의 벽돌을 무너뜨리고 말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삶은 두렵고 고통스럽고 걱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타워팰리스에 살아도 언어의 집이 무너진다면 마음은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쪽방에 살지라도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의 집이라면 평안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물로 삼은 언어의 집이 지어지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떤 탁류가 몰려올지라도 무너지지 않는 집에서 하늘의 쉼과 보호와 평강을 누리는 복지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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