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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_태승철 (누가복음 7:1~1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14|조회수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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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의 줄거리:

천지창조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령을 하실 때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지면서 광명과 질서와 평강이 나타나게 되었잖아요?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때처럼 내 삶에서 하나님이 내가 만나고 접하게 되는 모든 대상과 영역에 대해서 쉴 새 없이 명령하신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요? 그래요 내 생을 위해 하나님의 명령만이 최고 입니다.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

(누가복음 7:1~10)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

본문 구절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귀하기에 특정한 부분에 대해 놀랍다, 귀하다, 깊은 의미가 있다는 표현을 쓰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말씀을 접했을 때에 새삼스럽게 본문이 굉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나님 명령을 받는 법’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흔히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하나님의 명령은 그냥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받는 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의 로마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을 잘 돌보고 회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백부장이 심정적으로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합니다. 심정적이라는 이유는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로마에서 공식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했더라면 백부장을 계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회당을 지은 것도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 지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편제상 백 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대장입니다. 치안을 담당하고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을 색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식민치하의 유대인으로써는 상당히 적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의 종들 중의 하나가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면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하였는데 사랑하는 종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또 7절에서는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파이스(παῖς)는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로부터 백부장이 이 종을 크게 아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 종은 소유물로 취급되었기에 백부장의 심성이 특별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은 아들같이 여기는 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데 직접 예수님을 찾지 않고 유대인의 장로들을 청하여 대신 부탁을 합니다. 그 이유가 이후의 구절들에 나타나는데 6~7절을 보면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주석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꺼려하는 풍습을 알았기에 배려하여 한 일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본문 말씀의 의도를 살펴보자면 여기에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가 숨어있습니다.

 

본문은 중풍병에 걸린 종을 고치기 위한 백부장의 간청이 중심내용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실은 백부장의 간청은 종의 중풍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간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치유의 기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본문의 대단함이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는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는 마음가짐을 큰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백부장의 태도를 생각해봅니다. 백부장은 살펴보았던 대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오시는 것도 만류하고 자기가 예수님을 직접 뵙는 것도 피합니다. 어떻게 보면 염치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칭찬을 염두에 둘 때에 유대인을 손님으로 받기가 싫어서 피하고자 했던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진심은 8절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부장의 이 말에는 예수님께서 명령만 내리시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백부장에게 있어서 문제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명령만 받을 수 있다면 대면하지 않을지라도 종의 중풍병이 낫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명령하시는 분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이 놀랍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직 파악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이 드러내신 능력과 지혜가 자신들의 인생의 성공을 위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핑크빛 미래를 전망하고 있었을 뿐 예수님이 정말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백부장은 자신의 직업과 연관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군인으로써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광활한 로마 제국 아래에서 유일한 권세자는 황제입니다. 황제 밑으로 원로원이나 장관이나 총독들이나 사령관이 있었고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있었지만 모든 권세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위임받는 것입니다. 백부장을 따르던 부하들은 백부장을 통해서 로마 황제의 권세를 마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관점을 바꿔보자면 백부장의 부하들은 로마 황제의 권세에 따르지만 죽을 때까지 로마 황제를 마주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계단을 내려오듯 하달된 권세의 끝에 있던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백부장을 통해서만 로마 황제의 명령을 하달받을 수 있었고 권세를 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부장 또한 상관들의 명령을 들어야만 했기에 이러한 관계구조를 예수님께 그대로 적용시킨 것입니다. 백부장에게 있어서 권세가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면 예수님은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셨습니다. 상명하복의 권세 구조에서 예수님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판도가 광활하고 대단하여 황제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아무리 그 권세가 대단해도 중풍병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에게 친화적이었기에 예수님의 소문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기적의 현장을 직접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백부장은 예수님은 어떤 병이라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로마 황제와는 비교될 수 없는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 같은 분으로써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사렛 출신의 남루한 목수였지만 행하시는 일을 보고 하시는 말씀의 능력과 지혜를 경험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신이라는 존재의 현존이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백부장이 예수님을 집에 모시기를 마다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개 백부장이 로마 황제를 자기 집안일을 부탁하기 위해 집에 모실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백부장이 느끼는 예수님은 로마 황제보다 높으신 분이셨습니다. 자기 집을 향해 오고 계신 예수님의 움직임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자기 집에 오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데 로마 황제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진 삼라만상과 인간의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예수님을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결국 유대인의 장로들을 통해서라도 예수님께 부탁을 했던 것은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부탁을 들어주시기 위해 오시겠다는데 어떻게 감히 막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백부장이 구한 것이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백부장이 구했던 것은 종의 중풍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차이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백부장의 심정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이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심을 압니다. 일개 백부장인 제가 로마 황제를 알현할 수 없고 거동을 요청할 수도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도 요청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사정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신다면 그 명령을 받들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이 제게 도달되기만을 바랍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백부장이 예수님의 명령이 임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자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으면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외의 영역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 찬 상태였습니다. 이 영역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빛이 있어라, 하늘이 있어라, 땅과 바다가 있어라”고 명령을 하실 때마다 그 영역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광명과 질서와 평강의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창조는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이 임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들여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못 지키는 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할 뿐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삶에 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모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둠고기, 모둠전, 모둠쌈 같은 음식들이 있습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 명령의 모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직업이 있다면 명령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창조주는 곧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명령이 직업이신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신다면 중풍병과 같은 삶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대해 없어질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이 임할 때에 삶은 광명의 삶이 되고 열매 맺는 삶이 되고 평강의 삶이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사람에게 바라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원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땅을 향해서는 삶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냥 명령하시면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사모하고 그리워하기를 바라시며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각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이 받아들여진 만큼 삶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제거됩니다. 열매 맺는 삶이 되고 평강이 지배하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천지창조 때에 보시기에 좋았던 것처럼 나의 삶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제거하는 창조적 명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란 무엇일까요?

명령은 윗사람과 아랫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명령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원하는 바가 있을 때에 내리는 요청입니다. 다만 바라는 바는 위에서 아래로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아랫사람도 윗사람에게 바라는 바는 존재합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랄 때에는 간청을 하게 됩니다. 요청과 간청의 공통점은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바라는 바를 명령함으로써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직접 명령할 수는 없으나 간청이라는 형태를 통하여 바라는 바를 간접적으로 명령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병을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간청을 하는 형태입니다. 형태적으로는 간청을 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바라는 바를 이루어달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바라는 바를 명령함으로 요청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한편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라는 경우 간청이라는 형태로 명령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라 여겨지는 예수님께 바라는 바를 간청하는 것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종의 중풍병이 나았으니 백부장 또한 요청의 방식으로 예수님께 명령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백부장의 태도는 기존의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백부장에게 있어서 종의 중풍병이라는 상황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백부장은 이러한 상태를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드러내 보이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명령이 직업이신 예수님께서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할 때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자”는 말을 해왔습니다. 이것을 위해 주여 삼창을 외치기도 하고 삶에서 원하는 바를 강하게 요청하여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백부장에게서 드러난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백부장은 자신이 일개 군인으로써 로마 황제를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며, 로마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황제라면 예수님을 움직일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명령을 받을 뿐이지 요청을 가장한 명령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9절에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백부장의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과 명령을 구하는 것의 차이는 이전에 말씀드렸던 삼각관계의 구조 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각관계 안에는 내가 있고 세상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내가 세상의 문제를 먼저 마음으로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요청하는 방식으로 명령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간청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직업으로 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먼저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면 삶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접하는 모든 사람과 대상들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원하는 바가 없어집니다. 오직 내가 대하는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대할 때에 나와 배우자와 하나님의 삼각관계는 형성됩니다. 이때에 마음에서 먼저 배우자를 담게 되면 하나님께 요청의 방식으로 명령을 하게 됩니다. 내 뜻에 맞게 배우자를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을 담지 않는 한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이러한 형태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법’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마음에 이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보다 우선하여 받아들이는 상태에서는 요청의 방식으로 명령을 할 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배우자를 대하는 중에 하나님을 먼저 마음에 담는다면 백부장과 같은 마음가짐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하나님을 먼저 모시게 되면 배우자의 문제에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명령으로 임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명령이 직업이신 하나님께 명령의 길을 열어드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원하십니다. 자발적으로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기를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다급한 문제가 벌어지더라도 마음에서는 문제보다 하나님을 먼저 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백부장이 보여준 믿음의 내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주권자로써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황제이심을 알았습니다. 백부장이 감히 로마의 황제를 마주할 수 없고 자기의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집으로 모실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명령하시는 분이심을 알았기에 그 명령이 도달해야 될 부분을 예수님께 보여드렸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마음가짐을 표현해보자면 “예수님께서는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집안에 중풍병 걸린 종이 있는데 이 자에게 명령하시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먼저 하나님을 담은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구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세상을 먼저 담은 사람은 하나님께 명령을 합니다. 이 미세한 차이가 백부장의 마음가짐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그저 중풍병 걸린 종이 낫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이 임하기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요청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의 차이점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확연히 드러납니다. 다급한 문제가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 상태를 마음에 담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께 요청의 방식으로 명령을 하게 됩니다. 간청하는 기도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그러한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명령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명령이 원활하게 도달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믿음으로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과 하나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나를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에서 먼저 붙잡고 끊임없이 붙잡을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와 같은 분으로써 생각하였습니다. 단지 명령이 직업이신 분으로써 알았을 뿐이지 자신의 아버지가 되심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통째로 주시려 하심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백부장과 같은 믿음조차 보일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세상보다 하나님을 먼저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눈으로 보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명령하시옵소서! 제가 귀로 듣는 문제들에 대해 명령하시옵소서!”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삶의 곳곳에 뻗어나가게 할 때에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으로 칭찬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명령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이 먼저 들어온 마음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생활화함으로써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먼저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명령이 직업이신 하나님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모든 삶의 영역에 명령을 구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자발성에 의해서 삶에 가득 차게 될 때에 얼마나 멋진 삶이 될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에 삶의 문제가 먼저 들어오는 대신에 삼라만상과 생사화복의 황제이신 하나님이 먼저 들어오심으로써 자발적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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