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어쩔 수 없음이 참 성공이다>의 줄거리:
모든 사람의 인생 성공에 대해 하나님은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십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일생을 걸쳐 성공을 주시려고 섭리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대부분은 이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을 달가워하지 않고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어쩔 수 없음에 도달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음이 참 성공이다
(누가복음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어쩔 수 없음이 참 성공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어쩔 수 없음이 참 성공이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영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감동이나 설득이나 호소력은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오직 영적인 사실을 전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기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영적인 사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어쩔 수 없음이 인생의 참 성공이라는 것은 지당하고도 논리적인 귀결이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언어화하여 살고 있지 못할 뿐이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음이 성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죄악 된 체질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죄악 된 체질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세상에서 마음의 보물을 찾고자 함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보물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보물을 정하고 나면 이제 실제로 그 대상을 얻기 위한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삶입니다. 한편 이미 얻은 것을 보물로 여기는 중이라면 그것을 유지하고 확장해나가는 과정 또한 삶입니다.
사업가에게는 사업이 마음의 보물일 수 있습니다. 사업은 세상에 속한 가치이기에 이것을 마음으로 붙잡은 상태는 죄악입니다. 죄악이란 하나님 외의 대상을 마음의 보물로 붙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악의 상태에서 사업가는 노력하고 수고함으로써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면 죄악이 더욱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이 부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업가는 천지사방을 돌아다니며 부도를 막기 위해 돈을 빌리려고 애를 썼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기한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업가는 인생을 성공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죄악의 체질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사업을 붙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쩔 수 없을 때에야 죄악의 체질이 중단될 수 있기에 이것을 참 성공이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목사님들에게 일어나는 원치 않는 성공이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던 수적인 부흥에 대한 집착이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예배당에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목사님들의 집착은 결코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모일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영적인 관점에서는 목사님들의 무더기 성공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 대신 목회와 부흥을 보물로 붙잡고 있던 죄악 된 상태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생각치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던 최고의 성공 단계에 직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악 된 체질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님들 또한 하나님 외에 세상의 가치를 마음의 보물로 삼고 있는 한 죄악 된 체질을 가지고 삽니다. 이러한 목사님들이 목회에 대한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씀드렸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과의 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업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인 성의 과부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영적인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유대사회에서 남편이 없는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과부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보물 중의 보물은 바로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은 것으로도 부족해서 외아들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아들이라는 마음의 보물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을지라도 살아만 있었다면 희망은 계속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과부는 이 상태에서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마음에서 하나님 대신 외아들을 보물로 끌어안았던 죄악 된 체질이 중지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과부는 이제까지 인생에서 없었던 최고의 성공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의 보물로 담는 것이 죄악이라면 그러한 죄악을 쌓아가는 삶이 성공일 수 없습니다. 점점 더 심각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고 점점 더 큰 실패로 빠져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에 들어가시려고 하실 때에 성 안쪽에서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관에 담겨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었고 예수님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모두 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일어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살아났고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을 어머니에게 돌려보내십니다.
먼저 예수님과 장례 행렬의 만남이 우연이겠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새가 땅에 떨어지고 팔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나 실은 이 사소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과부의 남편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고 외아들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을 마감한 아들을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리십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독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던 순간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 밖에서 살아가던 사람을 이렇게 보시다가 천사들과 의논하신 끝에 더 살게 하시거나 더 빨리 죽게 하시거나 결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과부의 아들을 죽게 하셨고 다시 살리신 것일까요? 이 청년에게는 시한부 인생이 아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이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신 덕에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살리신 것일까요? 정부에서 본예산이 부족하다 여겨질 때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것처럼 추경생애를 결정하신 것일까요?
물론 결코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시한부 인생이라는 전제를 놓고 생각한다면 청년의 시한부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청년을 죽게 하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들어가실 때에 장례 행렬과 만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과부를 불쌍히 여겨 아들을 살리실 것도 의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의도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본문 말씀의 의미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외아들을 마음의 보물로 붙잡고 있었습니다. 과부와 외아들의 밀착상태는 바늘 끝도 들어갈 수 없이 견고했을 것입니다. 과부의 마음에서 아들을 붙잡은 장악력은 설령 핵폭탄으로도 깨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핵폭탄을 맞아서 과부의 몸이 사라져 죽을지언정 외아들을 보물로 여기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 하나님을 대입시키면 하나님은 제로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로상태를 바꾸기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바로 아들을 죽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죽어서 관에 실려 공동묘지로 나가는 것을 보면 어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어머니의 마음은 더 이상 아들을 보물로 삼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장례 현장은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실려 나가고 있는 것은 아들의 시체였지만 이 현장에는 두 개의 죽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육체의 죽음이 있었고 어머니의 생명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곧 살아야 될 이유입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외아들은 살아야 될 이유였습니다.
본래 사람이 살아야 될 이유는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며 생을 살아가는 것이 본래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아들을 위해 생을 살아가고 있었고,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과부의 생의 의미는 어쩔 수 없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마음이 살아가야 될 이유가 없어진 죽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 어머니의 마음에서 밀착관계를 깨뜨리는 죽음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두 죽음을 뚫고 예수님을 통하여 개입해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살려내시고 어머니에게 아들을 데려다주십니다. 예수님은 단지 아들을 다시 보물로 삼으라고 건네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라는 캡슐 안에 예수님을 담아주셨던 것입니다. 아들이 죽었다 살아나서 처음 만난 존재가 예수님이었으며, 어머니가 되살아난 아들을 건네받은 존재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들도 어머니도 서로의 밀착관계는 끝이 나고 각자가 예수님과 밀착될 관계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이들의 관계를 예수님이 붙잡고 유지시켜 나가시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가 마음으로 아들을 붙잡지 않아도, 아들이 마음에서 어머니를 붙잡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모자의 관계를 붙드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기에 앞서 각자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어야 할 관계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인간관계는 서로 좋아서 달라붙어야 할 관계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를 좋아하여 마음에 달라붙음을 유지하다가는 일 년도 가지 못해 관계는 박살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을 때에 그 관계는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관계를 붙잡으시고자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다.
본문의 중심인물은 살아난 아들이라기보다는 과부입니다. 과부에게 외아들은 마음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과부를 어쩔 수 없음으로 몰아가십니다.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이 무엇일까요? 아들이 멀쩡히 살아있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며 잘 나갈 때에 어머니의 마음이 기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말씀드리자면 마음에서 이렇게 서로를 붙잡음이 유지되는 동안에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실패의 구덩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아들에 대해 어떤 방면에서든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하나님 대신에 아들을 보물로 붙잡는 죄악의 체질이 중단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죄악의 체질로 살아가는 중이라면 죄악의 체질에서 벗어난 어머니야말로 유일하게 성공한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녀 혹은 인간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업가나 목사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쩔 수 없음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쩔 수 없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대표적 사례를 보자면 야곱과 요셉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의 마지막 지점까지 이 세상의 가치들을 복으로 알고 추구했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야곱의 인생은 악착같았고 거짓과 사기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 것을 모으기에 열중하던 야곱이 요셉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야곱이 편애하던 요셉을 형들이 시샘하여 애굽에 팔아넘기게 되었고,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짐승의 피를 묻힌 옷을 준비하여 맹수에게 잡혀먹었다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남을 잘 속이던 야곱은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의 죽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제 야곱의 생애에서 요셉과 관계된 영역은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세상을 마음에 담는 삶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기근을 만나게 됩니다. 이제는 갖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와야 했고 그것도 부족하다면 죽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의 보물로 여기던 재산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곡식을 사러 아들들을 보내는 과정에서 요셉이 살아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의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을 접하게 됩니다. 야곱이 어쩔 수 있다고 여기며 노력하고 열정을 갖고 세상의 복을 긁어모으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삶의 영역에서 요셉을 통하여 근동지방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역사를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어쩔 수 있다고 여겼던 영역들은 대기근이라는 재난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영역으로 내쳐지고 맙니다. 그리고 진즉에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대역사와 마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외아들의 시한부 인생이 마쳐지기도 전에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마음에서 아들을 떼어내시고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과부와 아들의 마음에 각각 개입해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이 130년이나 되는 인생을 살고 나서야 겨우 도달했던 결론 또한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보물들을 향해 어쩔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았던 야곱은 그 생애가 어쩔 수 없음으로 끝나고 나서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진정한 복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130년 만의 생애 끝에 어쩔 수 없음의 성공의 자리에 도달하고 감회가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즉에 포기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요셉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사를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쩔 수 없음을 절감하는 시점이 하나님께서 행동을 개시하시는 시점이 됩니다.
사업가는 사업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 참 성공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사업을 내리치셔서 망하게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서 사업을 붙잡은 죄악의 상태에서 사업이 계속 번영한다는 것은 실패에 실패를 더해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을 내리치셔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면 영적인 사실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최고 경지의 성공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부모자식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보물로 여기는 자녀들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자녀를 보물로 붙잡는 죄악 된 체질이 중지되는 것이고 영적인 사실의 차원에서 가장 성공적인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죽여야 되고 딸을 죽여야만 합니다. 사업가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사업을 죽이셔야만 합니다. 또 건강을 보물로 삼고 있는 사람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건강을 죽이셔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때에 비로소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목회를 보물로 붙잡고 있을 때에 성공을 위하여 목회를 쳐서 망하게 하셔야 합니다. 목회를 보물로 붙잡고 있는 죄악 된 체질에서 목회가 부흥한다면 그것은 실패에 실패를 쌓아가고 멸망에 멸망을 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업이 망하기 전에, 아들과 딸이 죽기 전에, 목회가 바닥으로 내쳐지기 전에, 성공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혔기 때문에 사업에 손 댈 수 없고, 자녀에 대해 손 댈 수 없고, 목회에 대해 손 댈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사업을 붙잡고 자녀를 붙잡고 목회를 붙잡으면서 씨름하는 동안 실패의 실패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음을 고백한다면 세상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됩니다. 회사에서 승진을 하든지 못 하든지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사업이 흥하든 망하든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건강하든 못하든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자녀가 살아있는 동안에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 된 체질을 고려할 때에 어쩔 수 없음만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쩔 수 없음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밥 먹고 물마시듯이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참 성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여 이 세상 삶에 대하여 참 성공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하다못해 집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나는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되어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역사하실 것이며 참 성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만을 삶의 내용으로 채우시는 성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내가 보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시고 없애시고 망하게 하셔서 어쩔 수 없음의 성공을 찾게 하시기 전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함으로써 크고 작은 모든 일들에서 참 성공을 이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