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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_태승철 (누가복음 7:13~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16|조회수6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의 줄거리:

세상에 사는 것이 불쌍한 것인데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불쌍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악함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도 마음만은 하늘로 가야 합니다. 세상 안에는 나를 불쌍하게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없거나 못 가지면 불쌍하게 될 그 어떤 것도 이 세상 안에는 없습니다. 마귀는 나의 불쌍함을 악함으로 바꾸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

(누가복음 7:13~15)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

‘법’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많이 씁니다. 이 말이 율법을 연상시키기에 듣기에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법이란 자연스럽게 터득될 수 없어서 꼭 배워야 하고 알아야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은 저절로 혹은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그 길을 걸을 때 나를 불쌍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은 분이십니다. 지난 말씀에서 하나님의 직업은 명령하시는 분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명령의 성분을 조사해보면 90% 이상이 긍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영역에 들어오실 때는 거의 모든 일에 긍휼의 명령을 하십니다. 따라서 나는 하늘에 대한 관계이든 이 땅에 대한 관계이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앞에 불쌍하게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쌍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으로 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성으로부터 비롯된 자발성과 자유를 통하여 인간은 독자적인 판단의 주체로써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차 대전과 2대 대전을 거치면서 계몽주의에 대한 반성도 나타났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사람이 될 때 삶에는 문제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또한 긍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처지가 아닌 악한 처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면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처지임을 잊고 악한 처지임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악한 처지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푸실 수 없습니다. 불쌍함이 악함으로 뒤바뀐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오물이 잔뜩 묻은 그릇에는 요리를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역점을 두고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다루게 된 이유는 13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신 이유를 주석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왜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된 여인이 하나 있는 아들을 보물이자 의지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마저 죽게 되었으니 불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식선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주석에서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불쌍함이 악함으로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나를 불쌍하게 보시는 대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하게 여기신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대로 나도 나 자신을 불쌍하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이유를 따라서 나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쌍함의 처지를 악함의 처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따라 불쌍함을 유지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긍휼 또한 받을 수 있습니다. 불쌍하게 여기셔서 은혜를 주시는 대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탄이 끼어들어서 다 된 밥에 재 뿌리듯이 불쌍함을 악함으로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탄의 전략이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주석가들의 해석에까지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4장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표현대로만 보자면 예수님께서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15장 32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 또한 표현대로만 보자면 예수님께서 굶주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 20장 34절에서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선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눈을 고쳐주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납니다. 아프고 굶주리고 장애를 가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셨다면 이 세상의 병자들을 일시에 고쳐주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습니다. 노숙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관점이 사람들의 관점과 달랐다는 점은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살갗이 다 찢어지신 채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지에서는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시기는커녕 울고 있는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불쌍하게 여기는 관점이 예수님과 다른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불쌍하게 여기는 여인들의 마음이 오히려 악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불쌍히 여길 일이었다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순교 또한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면 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관점이 예수님과 전혀 다르기에 우리는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보는 법’을 깨달아야 하고 배워야만 합니다. 자연적으로 터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으로 느끼는 불쌍함이야말로 불쌍함을 악함으로 바꾸어 놓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처해있는 처지를 불쌍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근본적 원인이 병들고 배고프고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처지가 있고 부수적인 처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없는 아이가 밥을 못 먹어서 배고파합니다. 이때 불쌍하게 여겨지는 근본적인 처지는 부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수적인 처지는 밥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없다는 근본적인 처지로부터 아프거나 헐벗는 다른 부수적인 처지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 부수적인 처지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지만 부모가 없다는 근본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재벌인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대학병원 특실에 입원을 시키고 국내최고 수준의 의료진이 아이를 돌보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이가 병에 걸렸어도 불쌍하다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재벌집의 아이가 헐벗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부모가 왜 신경을 안 쓰는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입는 것이 멋이거나 유행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근본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근본 처지를 보고 계십니다. 병들고 굶주리고 장애를 가진 것은 부수적인 처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시고도 밥보다 말씀을 우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한두 끼 못 먹어서 굶주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예수님을 향해 우는 여인들을 불쌍하게 여기신 이유는 이들의 근본 처지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셨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대로 나인 성 과부는 남편을 잃었고 이제는 하나 있는 아들마저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던 이유는 이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8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인 이삭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까지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으로만 불쌍하게 여기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과부를 중심으로 볼 때에남편과 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더라도 마음에서는 죽여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입니다. 과부의 마음도 공백입니다. 이 여인이 결혼을 할 때는 남편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보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므로 과부가 되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아들이 있었고 잘 자라서 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마음 공백을 메우는 유일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하게 여기신 것은 남편과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과부가 마음의 공백을 채울 대상이 없게 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태초의 무(無)의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마음 채움 대상을 잃은 과부가 직면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 태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느끼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직면할 때에는 무섭고 두려움으로 스스로 죽기를 바라게 됩니다. 육체가 죽어서 더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의식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죽은 것 때문이 아니라 과부가 더 이상 마음 공백을 채울 대상을 찾지 못하게 된 상태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나 아들이 과부의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을 통하여 과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직면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가짜 보물이라도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남편이 죽고 아들까지 죽고 나자 더 이상 붙잡을 가짜 보물도 존재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 과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 상태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살려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다시 아들을 마음의 보물로 삼으라고 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라는 그릇에 예수님을 담아서 주신 것입니다. 아들이 살아나는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게끔 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근본 처지를 알 때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비어있고 태초의 무의 상태가 존재합니다. 이 태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직면하지 않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을 찾습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채움 즉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이 거짓된 기대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내 속에 태초의 무의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육체를 죽일 수밖에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가진 마음 상태를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는 사람만 불쌍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죽은 후의 세상보다는 그래도 지금 이 세상이 좋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이 바로 나의 불쌍함이 악함으로 바뀐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이런 말이 나올 수 없고, 이러한 생각이 잠시라도 마음에 머물 수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 그 자체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육체가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면 그만큼 세상이 좋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좋게 여기는 것 자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함입니다. 이 세상을 그 정도로 좋게 느끼고 확신과 생각이 지속되면 그대로 영벌을 받는 지옥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세상이 정말로 좋은 곳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그토록 좋은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유배를 떠난 것입니까? 천국은 유배지이고 세상은 출세하며 형통하고 낙원을 이루어 살 수 있는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천국보다 훨씬 더 좋게 창조하심으로써 당신이 계신 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을 유배지로 오는 불쌍한 사람들이 되도록 만드셨습니까? “죽는 사람만 불쌍하다.”라는 논리대로라면 부활하시고 천국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말의 미련도 없이 훌쩍 떠나신 세상을 그토록 질기게 좋아하는 우리가 한심하고 바보 같은 존재들입니다. 내가 불쌍한 이유는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33세에 미련 없이 떠난 세상에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돈을 못 벌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불쌍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하였고 또 8절에서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것을 탄식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불쌍하게 본다는 의미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아직도 세상에 살아있는 나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또한 이렇게 나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도 33세까지는 이 세상에 계셨으니 저 또한 버티는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에서 33세까지만 사시고 그토록 좋은 천국으로 가셨으면서 왜 저는 40살이 넘고 50살이 넘고 60, 70, 80이 넘도록 세상에 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불공평하신 것 아닙니까?”라는 심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는 사람만 불쌍하다.” 또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의 생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할지라도 이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세상에 사는 것을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보다 좋게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불쌍함이 악함으로 바뀐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나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왜 아직까지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탄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좋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지금 당장 올라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35절을 보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신 이유를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신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떠나실 세상에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들을 살리셨던 이유는 아직 십자가 사건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바로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나사로와 과부의 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에 죽었기에 천국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은 그것을 불쌍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로 가지 못하고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불쌍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보물이신데 아직도 돈을 보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건강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자녀가 형통하지 못함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막아버립니다.

하늘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상태가 불쌍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는 상태가 불쌍한 것이고 하나님을 내 보물로 갖지 못하는 상태가 불쌍한 것입니다. 돈이 없거나 병에 걸리거나 일찍 죽는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33세까지 사시고 승천하셨으니 수명에 대해서 우리는 불평할 거리가 없습니다. 행여 33세 이전에 예수 잘 믿다가 죽었다면 그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천국의 좋음을 알고도 살아있는 게 불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었기에 과부가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은 마음의 보물로 삼았던 남편이 죽고 아들도 죽음으로써 태초의 무를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무엇으로도 마음을 채워야 할지를 모르게 되어버린 상태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의 기도 또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나를 33세 넘게 살도록 내버려두고 계십니까? 나를 통해 이루고 싶으신 일이 있으셔서 살려두고 계신다면 불쌍히 여기셔서 제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가질 수 있어야만 제가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 수 있겠으니 아버지로 충만하게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불쌍한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으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충만하게 갖지 못했기에 불쌍한 것입니다. 이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세상에서 살아있는 이유와 사명 또한 명백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세상을 떠나 예수님께로 가고 싶어서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돈이 좋고 건강과 장수가 좋고 자녀의 형통이 좋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명백해질 수 없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아버지께 가지 못하는 상태를 불쌍히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은 살아있음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도록 세상의 가치들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죽는 사람만 불쌍하다.”고 유혹하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유혹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가족과 돈과 건강과 명예와 인기를 버려두고 어떻게 세상을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유혹합니다. 이렇게 불쌍함의 처지를 다 악함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불쌍함이 악함으로 바뀐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수 없기에 하나님 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유전적 체질이 되어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자꾸 세상을 좋아하게 되고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해 나가야만 합니다. “아버지! 세상에 살아있는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버지로 마음이 충만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버지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저의 마음이 주님 따라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살아있는 동안은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기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스스로를 불쌍하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서 마음 붙이고 살아있는 나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불쌍하게 보시는 시선과 같은 시선을 갖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의 긍휼이 임하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를 통째로 나의 몫으로 갖는 축복을 누리게 하시고 온전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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