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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당당히 나 홀로 충만하라>의 줄거리:
넬슨 만델라가 인용한 아프리카 코사족(Xhosa)의 속담인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를 난민 정책을 호소하던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다시 인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다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갑니다. 그러나 더 멀리 가려면 반드시 함께 가는 중에도 홀로 가야합니다.
당당히 나 홀로 충만하라
(누가복음 7:18~23)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당당히 나 홀로 충만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당당히 나 홀로 충만하라’
노벨평화상을 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 대통령이 백인과 흑인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에 자주 인용한 구절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코사(Xhosa)족의 속담으로써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입니다. 이 속담은 많은 정치가들과 지도자들에게 공감을 일으켜서 자주 사용됩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난민수용 정책을 지지하며 이 속담을 인용하기도 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일 살펴볼 부분입니다만 2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백인과 흑인의 관계개선을 바랬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나 난민수용 정책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던 메르켈 총리의 인식이 영적인 영역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인류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갈등과 반목과 대립과 전쟁은 모두 함께함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홀로 가는 사람에게는 갈등과 반목과 싸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하기에 시끄럽습니다. 함께하기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부모형제와 함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문제는 나 홀로 가는 중에 함께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중에 홀로 가는 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코사족의 속담을 예수님의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써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러나 더 멀리 가고 더 화목하게 가려면 함께 가는 중에도 혼자 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들은 함께하고 있고 함께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함께하는 중에 홀로 길을 갈 수 있어야 갈등과 반목과 대립으로 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였던 이유는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백인들끼리는 이미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백인들은 함께하는 중에 나 홀로 가는 길을 몰랐습니다. 그렇기에 흑인들을 향하여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어쭙잖은 책임의식에 매이기 전에 그 책임의식의 정체를 먼저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의 성분은 결코 이타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저히 이기적입니다. 자기 딴에는 타인을 책임지고자 하지만 실은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에 감내하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의식의 실제 성분은 타인에게 빨대 꽂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고 계시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타인에 대해 책임의식을 갖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고자 하는 영적인 반란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사회와 이웃과 가족에게 상관하기에 앞서 당당히 나 홀로 충만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함께’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 홀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고 대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나 홀로 하나님으로 충만한 결과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크게는 인류를 위해 작게는 가족을 위해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어쭙잖은 책임의식에서 벗어나서 나 홀로 당당히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가족과 이웃과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이고 사랑입니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나 홀로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이웃사랑은 책임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나 홀로 충만함의 길을 가지 못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함으로써 실족의 위험에 처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이유는 마가복음 6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헤롯 대왕은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행위를 옳지 않다 비판하였고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에 헤롯은 세례 요한을 잡아다 가두었으나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죽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해서 전달했습니다.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것이나 백부장의 종을 대면하지 않으시고 중풍병을 고치신 것과 같은 사건들을 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를 듣던 세례 요한에게 의심이 생겨납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또한 다소 답답합니다.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42장의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묶여있는 예언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음을 보고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이 의심을 하게 된 경위가 이상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과 사역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의심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왜 하나마나한 대답을 들려주셨던 것일까요? 세례 요한이 의심을 하게 된 이유는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 사역의 내용과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기에 메시아 사역의 의미를 되짚어 주신 것입니다.
먼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 사역의 내용과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대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키시리라 믿었습니다. 또 다윗 왕국의 전성기가 재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한편 요한의 사역은 세례가 특징적이었습니다. 세례는 곧 하나님의 선민인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땅의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을 문제시하였습니다. 땅의 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었음을 상징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회개하라는 것이 요한의 사역이었습니다. 즉 세례는 선민들에게 메시아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끔 준비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세례 요한 또한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문제시했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은 위선자로써의 사회지배층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다면 이 위선자들을 다 몰아내고 사회조직을 뿌리부터 바꾸실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임금이 되시고 메시아를 뒤따르는 의인들이 나라를 지배하는 거듭난 사회구조로 바뀌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헤롯의 악행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메시아를 통하여 광명을 얻고 새로운 체제의 중심인물로 영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세례 요한에게 들려오던 예수님의 활동은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따로 전해주신 답도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특징은 개인적인 변화입니다. 맹인이 보게 되는 일이 굉장한 일이지만 맹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의 기대대로라면 사회적 차원의 파장이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과 사역은 화젯거리는 되었을지는 몰라도 사회적 제도적인 변화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전무후무한 기적들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을 눈 뜨게 하시고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등의 별의별 기적을 다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이 재현되고 의인들이 나라를 지배하는 새로운 사회체계에 관련해서는 미동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위선자들로 이루어진 산헤드린공회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성전에 장사꾼들을 끌어들여 이윤을 남기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의 조직도 여전히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어떠한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상황이 답답했기에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답답함을 참다못해 제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맞느냐는 질문을 하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더 답답하게 하는 것 같은 대답을 주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적의 내용을 요한은 이미 제자들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답답함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세례 요한을 몰고 가시는 대답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의심을 접하시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직접 예수님께 세례를 주었던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례 요한이 알고 있는 답을 주시며 기적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함에서 벗어나기를 요청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 전해들은 모든 기적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우주 전체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회제도가 바뀌고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 안에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그 사실이 가장 대단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반드시 실족하게 되는 조건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예수님과 관련된 계기를 통해서 외부적 변화를 추구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반드시 실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코사족의 속담을 말씀드렸습니다. 실족은 예수님이 정하신 목적지까지 함께 가지 못하고 중도하차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끝내 실족을 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대답을 받았기에 이로부터 메시아이심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회복했으리라는 희망적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이 경험한 실족이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를 통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듯이 우리 또한 크고 작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맺은 첫 번째 사회적 관계였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인 사회 안에서 서로에게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고 말씀하시며 또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우주보다 더 크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충만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하에 있었으며 산헤드린공회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에서 장사꾼과 야합하여 이윤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의 말씀과 수많은 기적과 사역들을 통하여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거나 바뀌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시를 따라 인류 구원의 사명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가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정말로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그 밖의 모든 인간관계가 걱정되신다면 먼저 그들에 대한 책임의식부터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보좌 우편까지 주님을 따라가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다면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웃사랑의 출발점이 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더 멀리 가고 더 화목하게 가려면 함께 가는 중에도 홀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법을 모른다면 더 늦게 가고 더 멀리 갈 수도 없고 화목하게 갈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은 이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미래를 향할 수 없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 하늘까지 가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책임의식을 느끼는 모든 관계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함께 있는 중에 나 홀로 충만한 길을 갈 수 있어야만 실족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당하게 사람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저 높은 곳에 계신 아버지 보좌 우편까지 실족하지 않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처럼 홀로 충만함에 이를 수 있고 충만함이 넘치면 이웃을 향해 흘러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의식을 십자가에서 당당히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 안에서 나 홀로 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향하여 멀리 멀리 올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그 충만이 넘침으로 함께하는 자들에게까지 하늘의 은혜가 미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