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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살아서 세상졸업 천국입학>의 줄거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 말씀이 칭찬일까요 비난일까요? 마치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전국 초등학교 6학년 학생 중 일등이다. 그러나 전국 중학교 1학년 학생 중 꼴등보다 학년이 더 낫다' 그렇습니다. 살아서 세상 졸업하고 천국 입학하여야 합니다.
살아서 세상졸업 천국입학
(누가복음 7:24~35)
2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살아서 세상졸업 천국입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살아서 세상졸업 천국입학’
언젠가도 설교 중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대사가 한동안 회자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솔직히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이 대사를 본문의 주제와 연관하여 패러디 해보면 “세상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빠져나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하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바꾸어서 오래 오래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래 살 곳이 아닙니다. 세상의 상황이야 좋든 싫든 살아생전에 졸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으로 세상을 졸업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바보들은 죽기 전까지 열심히 세상을 향해 질주하지만 본래 세상은 그렇게 질주해야 할 곳이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조기 졸업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며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졸업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적용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배우자를 졸업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졸업해야 합니다. 사업가들은 사업을 졸업해야 합니다. 사업을 잘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사업에서 마음이 빠져나오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이 있고,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걷는 사람입니다.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업을 졸업한 사람은 나는 사람입니다. 사업을 졸업하는 것과 은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업을 하는 중에 사업을 졸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혼을 했다면 걷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면 뛰는 것입니다. 결혼했지만 배우자에 대해 졸업한 사람은 나는 사람입니다. 자녀를 낳았다면 걷는 것입니다. 자녀를 잘 기르고 있다면 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졸업한 사람은 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시작하였다면 걷는 것입니다. 목회를 잘해서 대형목회를 이루게 되었다면 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가 크든 작든 목회를 졸업한 목사님들은 나는 것입니다. 목회를 은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졸업과 은퇴는 전혀 다릅니다. 목회의 졸업은 목회를 하는 동안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졸업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졸업하면 제일 좋은 것은 시험을 안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도 고등학교 시절에 시험 보는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라도 문제를 잘 풀지 못합니다. 제가 악몽같이 기억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21번이었는데 제 뒤에는 22번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피를 뽑아 팔면서 그 돈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도 아르바이트로 학생을 가르치며 공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가게 되었고 저는 본고사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 친구가 특히 수학시험을 볼 때면 시험지 밑의 책받침에서 문제 푸는 소리가 다닥다닥 났던 것이 기억납니다. 무슨 문제를 그렇게 빨리 푸는지 저는 그 소리가 신경 쓰여서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 문제를 풀 필요가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생으로써 풀어야 될 문제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졸업하면 세상에서 풀어야 될 문제가 없어집니다. 배우자와의 관계를 졸업하면 배우자에 대해 풀어야 될 문제가 없어집니다. 자녀와의 관계를 졸업하면 자녀에 대해 풀어야 될 문제가 없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풀어야 될 일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졸업하면서 세상의 문제로부터도 졸업하게 됩니다. 돈 문제를 졸업하고 건강 문제를 졸업합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서 세상을 졸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서 세상을 졸업할 수 있다면 풀어야 될 세상 문제가 없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을 졸업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 생활화는 바로 이 세상의 문제를 졸업하는 것입니다. 삶에는 쉬운 문제가 있고 어려운 문제도 있으며 가벼운 문제가 있는가 하면 무거운 문제도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죽고 세상에 대해 졸업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 구절은 내가 세상에 대해 졸업했으므로 이제 세상에서는 풀어야 될 문제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풀어야 될 문제로써 제시되는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험의 문제를 풀던 꿈에서 깨어나면 이제는 그 과정을 다 마친 사람이라는 것에 안심합니다. 혼자 놀라고 혼자 안심하는 모습이 바보 같을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이런 일이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안심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문제를 풀려는 것이 아니라 졸업하면 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세상을 졸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보고 싶어 했던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조직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헤롯 왕의 행실을 비난함으로써 나타났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이 일은 부도덕하였지만 당시의 왕들에게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당나라의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를 아내로 삼은 것에 비하자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민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계속하여 문제시했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러한 요한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불의를 묵과하지 않으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메시아로써의 권세와 능력을 통하여 요한과 같이 헤롯 대왕에게 저항하거나 요한을 위한 구명운동이라도 해주시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헤롯을 여우라고는 부르셨지만 요한처럼 지속적으로 헤롯의 부도덕함을 지적하지도 않으셨고 세상을 바꾸고자 능력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요한의 처지에서 보자면 예수님께는 큰 그림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목표가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관심하셨던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2~13절을 보면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상황을 위하여 메시아의 직분을 수행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평소에 세례 요한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생각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참 기가 막힙니다. 2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셰익스피어 열 명을 데려다 놓아도 나올 수 없는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셰익스피어가 아무리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늘이 열리지 않았기에 이러한 표현은 나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을 칭찬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자면 요한을 비하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비유적으로 적용해봅니다. 대한민국 전국의 초등학교 6학년을 하나로 묶었을 때 그중에 일등을 한 학생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입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는 말씀의 의미와 부합합니다.
한편 전국의 중학교 1학년 학생을 다 모은 상태에서 꼴등을 한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을 전국 초등학교에서 일등인 학생과 비교해봅니다. 초등학생은 일등을 했지만 여전히 초등학생입니다. 그리고 전국 중학생들 중에서 꼴찌인 학생은 꼴찌이기는 하지만 엄연한 중학생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등수 매김의 기준에서 볼 때에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는 일등이었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지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돈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세상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도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의 공백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노자도 마음의 공백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백은 본래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함에 있어서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졸업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이 광야에 살며 메뚜기나 석청을 먹었던 것은 금욕주의적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소망이었기에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점이 바로 요한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점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세상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돈을 벌어서 마음을 채우고자 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고 자녀의 형통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함으로써 마음을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소망하게 되자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살아도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기쁨과 만족에 대해서 졸업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돈 문제를 풀 일이 없었고 권력에 대한 문제를 풀 일도 없었으며 건강에 대한 문제를 풀 일도 없었습니다. 죽어서 세상을 졸업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세상을 졸업했으니 이러한 점에서는 모든 사람 중에 일등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로부터도 이와 비슷한 모습은 발견됩니다. 석가모니는 색즉공 공즉색(色卽空 空卽色)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체가 없으며, 실체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조차 허상에 사로잡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부터 무구(無垢)한 본연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이만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세상을 졸업했다고 여겨집니다. 공자도 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의 영역에서 깨달은 사상을 전파하여 성인으로까지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문제 자체를 깨닫는 데에는 성공하였습니다. 도저히 세상에서는 마음을 채울 수 없음을 알았기에 석가모니는 색즉공 공즉색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공자는 오직 법을 따라 행동할 뿐이고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몰랐기에 마음을 채울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해주시기 전까지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알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공백이기에 기쁨과 만족을 추구해야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석가모니나 공자나 노자와 같이 깊은 사상적 표현을 했다는 기록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답으로 알았기에 이 세상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최고였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철학적 사고를 통해 답을 얻고자 하였으나 결국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너희들은 너희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들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지혜였습니다. 이에 반해 요한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답이심을 알고 있었고 세상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학생 중에 꼴등을 하더라도 그 학생은 중학생입니다. 초등학생 중에서 일등을 하더라도 그 학생은 초등학생입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보다 학년이 높은 것은 깨달음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살아생전에 천국에 입학하라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명을 받아 메시아의 사역을 예비하는 자로 살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천국에 입학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차원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길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아직 하늘길의 비전이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례 요한은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세상을 졸업하였으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위기였던 것입니다. 마치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중학교로 돌아와서 기존의 교육과정을 뜯어고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등학교가 제시되지 못했기에 중학교에서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교육과정을 뜯어고치는 사람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한의 한계는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갖는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전에는 누구도 살아서 하늘로 마음을 보낼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루어진 뒤에는 마음을 하늘로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어리석음이 되었습니다. 요한의 한계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 같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일등이었던 사람조차도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헤롯의 행실을 비판하고 부패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할지라도 세상을 좋아하던 지도자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고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아직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다는 비전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비전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한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간접적인 예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나타나게 될 십자가 사건을 보고도 이 세상을 졸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이 마음을 세상으로 채우고자 한다면 오히려 세상과의 관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배우자로 마음을 채우고자 한다면 배우자와의 관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배우자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 계속해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졸업하고 천국으로 마음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배우자를 졸업하고 천국에 입학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비전을 갖지 못한 요한처럼 배우자와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일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중학교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교육과정을 바꾸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자녀에 대해서 그렇게 합니다.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라는 단체의 이름으로 이 세상의 정치나 사회제도를 바꾸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세상을 졸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던 바와 같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모두가 십자가로 이 세상을 무조건 졸업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세상을 졸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세상을 졸업할 때에 세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갖는 것을 문제로 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었다면 대학생의 문제를 풀어야 하듯이 천국에 입학했다면 천국의 문제를 풀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갖는 것이 천국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세상을 졸업한 상태를 유지하며 하늘을 바라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에 걸린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을 번다는 비유적 표현을 씁니다만 우리가 실제로 달려가서 주머니에 챙겨 넣을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을 졸업하고 마음을 하늘로 향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은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등지고 졸업하여 마음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자취에 의해서 세상의 변화는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세상을 졸업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졸업할 때에 세상은 문제가 없는 곳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졸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도가 어떻든 문제가 하나도 없게 됩니다. 배우자를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를 졸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풀어야 될 문제는 없어지게 됩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자녀를 바꾸고 자녀의 문제를 끌어안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자녀를 졸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자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꼭 체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대통령이 문제로 여겨진다면 대통령을 졸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북한이 문제로 여겨진다면 북한에 대해 졸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졸업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졸업했기에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살아있는 동안 십자가를 붙잡아서 세상을 졸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문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어마어마한 변화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세상을 졸업하게 하심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맺는 모든 관계를 졸업함으로써 아무것도 바꾸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바뀌는 기적의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게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반복하는 동안에 문제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