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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속 속삭임이 나의 운명>의 줄거리:
본문 말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도 가르침과 추종자들이 있고,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도 가르침이 있고 추종자들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그룹 사이에는 절대로 서로 교류나 이동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 관계 같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를 바꿀 수가 없지 않은가?"
마음속 속삭임이 나의 운명
(누가복음 7:31~35)
31.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32.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속 속삭임이 나의 운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속 속삭임이 나의 운명’
제목은 마음속의 은밀한 속삭임이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서는 한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세례 요한의 가르침도 틀렸다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도 틀렸다 함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최우선하는 공통분모가 있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세례 요한은 아직 마음을 하늘로 보내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을 소망하고자 세상의 가치들을 멀리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마음에는 최고의 가치이신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신 상태였기에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일에서 자유로우셨습니다. 이미 마음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먹고 마셨기에 세상에 취할 일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은 시장에서 장례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로 비유되고 예수님은 잔치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거의 절망과 체념을 드러내시며 35절에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오히려 번역은 정확합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면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틀렸다고만 하시며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세례 요한은 아직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지는 못한 상태였기에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심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지고 계셨기에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우실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반대하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애초에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다만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공통적으로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점이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비난했고,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제자들, 세례 요한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공평한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서로가 자기들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물론 정확히 구분하자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닮은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계에서 지혜를 언급하십니다. 지혜는 곧 가르침입니다. 석가의 가르침을 지혜로 여겨 따르는 추종자들이 불교도이고, 공자의 가르침을 지혜로 여겨 따르는 추종자들이 유교도입니다. 석가의 추종자들은 석가의 가르침을 옳다고 여기고 공자의 추종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옳다고 여깁니다. 추종자들은 서로를 옳다고 여기기에 교류와 이동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를 바꿀 수 없고 부모가 자녀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옳게 여기기에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바리새인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이 가르침에 대한 관계가 부모와 자식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녀의 신분을 갖는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옳다고 여길 것이라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바꿀 수 없듯이 이동이 일어날 수 없기에 다분히 절망적인 내용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옳게 여겨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각의 가르침을 지혜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지혜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솔로몬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중 연결되어 나타나는 생각을 지혜로 여겼던 것입니다.
지혜는 곧 최고로 좋은 대상과 연결되어 있는 생각입니다. 솔로몬에게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최고로 좋은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돈 문제를 겪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돈에 대해 나타나는 생각을 지혜로 여기게 됩니다. 또 자녀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자녀에 대해 나타나는 생각을 지혜로 여기게 됩니다.
한편 최고로 좋은 대상이 하나님이 아닐 경우도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돈을 최고로 좋은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였으나 마음에서는 돈을 최고로 좋아하였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은 돈과 연관되어서 나타나는 생각을 지혜로 여겼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보편적 관점에서의 지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 최고로 좋아하는 대상이 있고 이와 연관되어 나타나는 생각을 지혜로 여기며 가르침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이 각각의 지혜는 그 가르침을 받는 자녀 즉 추종자들에게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 최고로 여기는 것을 최고로 여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최고로 여기는 대상을 똑같이 최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에서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다르기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도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올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마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와 같아서 부모가 자녀를 바꿀 수 없고 자녀가 부모를 바꿀 수 없는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최고로 생각하는 하나님을 똑같이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옳게 여겨져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최고로 생각하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좋아하고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좋아하기에 가능한 많이 모으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고로 좋아하는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좋아할 이유가 없는 것은 다릅니다. 좋아할 이유는 있지만 필요를 느끼지는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최고로 좋아한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필요를 주관적으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이유는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음속 속삭임입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5~16절을 보면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대답에 깜짝 놀라시며 대답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마음속 속삭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자면 베드로의 마음속에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속삭임이 아버지로부터 주어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속사임이 들려오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주관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역시 네가 똑똑하구나. 네가 영적으로 깨어 있구나. 너의 영성이 월등하구나. 너는 참 제자가 될 소질이 많다”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은 내가 원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초월한 대상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의 마음속에 속삭이신 대답이 바로 복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곧 마음을 다 드릴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이유는 내가 마음을 다 드렸을 때 나의 마음을 데리고 세상을 빠져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드린 자들을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구출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빼내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리에 데려다 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은 아들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십니다. 계속해서 아버지를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들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최고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자리까지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그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자리로 나를 데려가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속삭임을 듣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재물을 최고로 좋게 여기는 사람들 또한 속삭임을 받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자인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유는 존재합니다. 사탄이 돈을 좋아하라고 속삭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최고로 좋아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돈에 대한 가르침으로 바꾸어 지혜라 전하게 되었습니다. 얼핏 돈과 지혜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하는 존재임을 염두에 둔다면 지혜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혜는 곧 가르침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속삭임으로써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게끔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을 들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생겨난 생각을 옳게 받아들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고 재물이 최고라는 사탄의 속삭임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에 대해 체념하시며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틀렸다고 보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바리새인을 틀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극복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마음의 속삭임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는 하나님의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는 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혜로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만드신 후에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임의로 뽑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셨을 뿐입니다. 그 중에서 가룟 유다 같이 예수님을 팔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삼으신 자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최고라는 속삭임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추종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에 이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여 십자가 사건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자면 전도에 대한 이해도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도를 어부가 그물로 고기를 잡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물을 던져서 고기가 많이 낚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많이 낚인다는 개념은 전도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전도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라는 마음의 속삭임을 듣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속삭임을 받는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시며 그 하나님을 갖기 위해 마음을 하늘로 보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에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속삭임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같이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마귀의 속삭임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땅으로 끌어내리고자 합니다. 돈이 최고라는 마귀의 속삭임을 받아들여서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그것을 이루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열성을 다하여 섬기면 그 보답으로 돈을 많이 벌게 해주시리라 여깁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율법주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귀의 속삭임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는 가장 좋아하는 것 즉 궁극적인 가치와 연결된 상태에서 나타나는 생각이자 가르침입니다. 이 궁극적인 가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최고로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를 최고로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유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돈이 좋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통 때에 못 먹는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역시 돈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승차감이 끝내주는 외제차를 타면서 “역시 돈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돈이 좋다는 근본적 이유는 아닙니다. 이미 마귀가 속삭여서 돈이 좋다고 믿게 된 상태에서 확증을 하게 된 것일 뿐이고 돈이 좋다는 정당성을 넓혀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좋다는 것에 대한 믿음은 속삭임에서 나오게 됩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가질 때에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리라 믿는 마음입니다. 이 믿음은 속삭임에서 생기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은 복음에만 관련된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의 형통이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게 되었다면 그렇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마귀가 자녀의 형통이 최고로 좋은 대상이라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들도 마귀의 속삭임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합리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존재 즉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근거가 생각함에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함을 통하여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생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생각 위에 모든 근거와 사상을 쌓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도 마귀의 속삭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마음속에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최고로 귀한 가치다.”라는 속삭임을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자들에게 마귀는 “감정이 최고로 귀한 가치다.”라고 속삭였습니다. 칸트나 헤겔 같은 도덕주의자들은 의지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또한 “의지가 최고로 귀한 가치다.”라는 마귀의 속삭임의 결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가치와 연관된 생각을 지혜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합리성이 최고라고 믿는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제자가 됩니다. 자유주의신학의 시조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감정으로 환원시켰고, 감정을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낭만주의자들이 제자로써 모이게 되었습니다.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의 말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마귀의 속삭임을 받은 사람들은 돈과 연관된 생각을 지혜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돈을 많이 번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의 말을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제가 볼 때에는 이들의 가르침이 옳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최고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이처럼 마음에서 하나님이 최고라고 속삭이는 사람들을 골라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생활화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최고로 좋은 가치이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다.”라는 것을 전했을 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에서 하나님이 속삭이는 것입니다. 거부한다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도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다른 계통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강이 있고 벽이 존재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말씀에는 예수님의 궁극적인 체념이 담겨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속삭이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운명은 결정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틀렸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속삭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계속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속삭임을 따라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좋게 여기다가 떠나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대해 다양한 이유로 반응하셨지만 하나님의 속삭임이 없었기에 지속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해석이 색다르다.” 혹은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라는 이유에서 말씀을 들으셨다가 전파되는 말씀이 오직 십자가 생활화뿐이니 떠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하나님의 속삭임이 계속되는 분들은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말씀이 지겹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바보 같아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24시간 반복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고 계신다면 이유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로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심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전하고 들으며 함께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불철주야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속삭이고 계시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우리의 자발성을 보태서 십자가 생활화에 박차를 가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최고로 좋은 분으로 여겨 더 많이 갖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