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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불신 지옥’ 구호의 오류_태승철 (누가복음 7:36~5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22|조회수7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신 지옥' 구호의 오류>의 줄거리:

지옥 갈까 두려워서 하는 회개나, 세상일이 잘 안 될까봐 하는 회개에 죄사함은 없습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동안 의식하는 죄가 모두 가짜 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죄를 모르면 죄의식도 죄사함도 모두 가짜가 됩니다. 진짜 죄사함의 증거는 하나님 사랑이라 하시는데 소위 죄사함 받았다는 분들이 여전히 세상 사랑에 열을 내고 있습니다.

 

‘불신 지옥’ 구호의 오류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불신 지옥’ 구호의 오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불신 지옥’ 구호의 오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전도구호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예수천당은 그렇다 치고 불신지옥이라는 말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신지옥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지옥으로 가는 판결을 피하고 천국으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의 목적이 지옥을 피하는 것에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지옥을 무서운 곳으로 생각하게 하는 구절들은 성경 곳곳에 존재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마태복음 3장 10절, 누가복음 3장 9절에서 세례 요한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22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가복음 9장 48~49절을 보면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지옥을 가지 않기 위하여 회개하라는 것이 “불신지옥”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은 이렇게 지옥의 존재를 밝히면서도 회개의 이유를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맞이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보다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 항상 먼저 등장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회개하여 천국을 가라는 말과 회개하여 지옥을 피하라는 말은 크게 다를바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 회개를 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살다보면 고통스러운 일이나 사고나 불통하는 경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피하고자 회개를 하는 경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잘못된 신앙 습관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옥을 두려워해서 회개를 한다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짜 죄를 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끔찍하고도 불행한 일들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회개를 하는 것도 죄 사함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 또한 가짜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가고자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시간 같은 항공사의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앉아 있는데 승무원이 탑승수속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채고 비행기를 바꿔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회개가 요청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잘못을 깨닫고 얼른 비행기에서 내립니다. 파리로 가면 안 된다는 마음에서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본래 목표대로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에 탈 수 있어야만 회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파리로 가는 것이 낭패가 아니라 스톡홀름으로 가서 해야 될 일을 못하게 된 것이 낭패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간 것이 낭패가 아니라 천국에 못 간 것이 낭패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지옥에 가는 것은 회개하지 않아서 당하는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 것이야말로 형벌입니다. 비행기를 잘못 탄 것이 문제인 이유는 단지 파리로 가기 때문이 아니라 스톡홀름에 가서 본래 해야 될 일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신지옥”이라는 말에는 이러한 본질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지옥의 언급들은 단지 무서운 지옥에 가지 않게 회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이미 형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모이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옥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갖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옥을 피하고자 하는 회개의 사정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지옥에 가는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한 시도이기에 나라는 울타리를 넘어 하나님까지 향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 이루어지는 회개의 사정거리는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닿습니다.

 

이러한 회개의 차이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지옥을 피하기 위한 회개는 하나님을 벌주시는 분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갖기 위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이해에서 보자면 “예수천당”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신지옥”에 대해서는 좀 더 분명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불신의 결과는 단순히 지옥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지지 못함이기 때문입니다. 지옥 자체는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갖지 못한 형벌을 받은 자들이 모여서 살게 되는 곳이 지옥일 뿐입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 발산되는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접하고 황홀경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보면서 조금도 가질 수 없는 것이야말로 형벌입니다. 그 고통이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실제로 지옥에 불이 있어서 육체적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이 죽은 뒤에야 하나님의 좋으심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하나님을 전혀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하고 그 좋으신 하나님께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죽지도 못하며 채워지지 않는 마음으로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이 세상의 불행을 피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죽어서 갈 지옥을 두려워하여 회개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죄의 개념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회개 또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가짜 죄에 대해서는 죄의식도 가짜이며 죄 사함도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계심을 알고 그 동네의 죄를 지은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이상하게 여겼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41~42절을 보면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당시 노동자가 1년에 250일 정도를 일했다는 가정 하에 오백 데나리온은 약 2년 치 연봉에 해당되는 큰돈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십 데나리온은 50일 치의 임금입니다. 금액으로만 본다면 열배 차이가 나기에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43절에서 바리새인 시몬 또한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47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이와 상반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 보였던 사랑의 표현이 커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았음이 예수님을 많이 사랑함으로써 증명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해놓고 발 씻을 물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의 풍습상 주인이 손님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관례였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흔한 감람유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던 것과는 크게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바리새인 시몬은 죄 사함을 전혀 받지 못했기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가버나움으로써 예수님의 제2의 고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의 활동이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으시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여인을 만나신 적이 있었고 죄 사함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기에 여인은 이에 감사하여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통상 여인을 향하여 죄인이라고 부를 때에는 십중팔구 창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창녀라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이 여인이 창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은 39절에서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최대한의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대체 어떤 죄를 사함 받았기에 이처럼 큰 사랑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고, 바리새인은 어떤 죄를 사함 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드러낼 수 없었다는 것일까요?

오백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와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자의 비유에서는 죄 사함의 크기가 수치적으로 명확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질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내 죄가 커야만 죄 사함도 커지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클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죄가 작은 사람은 죄 사함도 작기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작을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옵니다.

이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죄는 간단히 말해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2계명부터 마지막 계명까지는 제1계명이 지켜지지 않을 때에 나타나는 죄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길 때에는 나머지 모든 계명을 어기는 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신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바로 다른 신들의 가장 대표적인 대상이기에 재물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의 경우에는 다른 신이 외아들이었습니다. 직장인들에게는 승진과 월급인상이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건강이 다른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는 그 마음을 채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이 신이 됩니다. 이것이 다른 신의 정의입니다.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공백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엇으로 채우고자 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 외에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져서 붙잡게 된 대상이 다른 신이고, 이러한 다른 신을 믿게 된 상태가 바로 죄인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에게는 외아들이 형통하는 것이야말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다른 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원죄 즉 유전 죄의 정체입니다. 사람은 몸을 입고 태어납니다. 몸의 오감을 통해서 접하는 세상의 대상들을 다른 신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붙잡은 세상의 대상이 잘 되면 기쁘고 안 되면 슬퍼합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죄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죄로 느끼지 못합니다. 죄의식이 없으니 죄를 지으면서도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부모는 자녀의 형통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자녀를 위해 마음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은 이것이 아주 무서운 영적인 간음죄임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죄 사함과 연결되어 창녀가 언급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마음이 창녀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창녀라는 것을 알아야 죄 사함을 받는 것도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다른 신으로 섬깁니다. 돈만 있으면 마음에 만족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또한 돈이라는 다른 신을 섬기는 창녀가 된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이 여인이 어떻게 큰 죄를 용서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유일한 분이라는 확신이 생겨날 때에 죄의식 또한 생겨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창녀로써 동네가 인정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선민사회에서 창녀는 배제되고 누락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유대사회 안에 있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여인의 마음에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시라는 느낌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전과 회당 중심의 생활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기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포기하고 죄인으로써의 삶을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최고라는 소리가 밤낮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에게 속삭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최고로 유일한 분이심을 떠올리는 가운데 여인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창녀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최고라는 속삭임은 들리는데 그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죄인으로써의 자신을 보면서 죄의식을 느끼며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던 죄를 새삼스럽게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죄의식도 커집니다. 하나님을 갖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질수록 죄의식도 커집니다.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기준으로 보자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창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마음속의 기쁨과 만족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이 창녀인 것입니다. 단, 그 똑같은 죄를 어떤 사람은 크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작게 느끼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최고로 여겼기에 하나님께로 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녀는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고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게 되었기에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무엇보다 안타깝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유일한 최고의 대상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열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망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을 한 번만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죄가 나를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똑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사망의 몸이라고 말한 이유는 육체를 통해 접하는 세상의 가치들이 마음을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 것과 놀아나는 창녀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하나님께 가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만큼 강렬했음을 반증합니다.

하나님께로 가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죄의식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추악함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식이 없다면 회개 또한 전혀 다른 의도에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에서 형통 대신 불통이 주어질까봐 두려워서 회개하고자 합니다. 고통스러운 지옥에 들어가게 될까봐 두려워서 회개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음을 통탄하는 회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창녀이든 현모양처이든 동일한 큰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녀는 돈을 다른 신으로 섬기고 현모양처는 가정을 다른 신으로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으로는 똑같은 창녀의 상태입니다. 창녀와 현모양처의 차이점이라면 현모양처는 사회적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기에 자신의 마음이 창녀임을 깨닫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현모양처에게도 하나님이 오셔서 남편이 최고가 아니고 자녀가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속삭여 주실 때에야 비로소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가정에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지독한 영적 추잡함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와 자녀 때문에 하나님께 갈 수 없음을 통탄하게 여길 때에 온전한 회개 또한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속삭임에 의해서 하나님이 최고라는 생각이 확고한 사람만이 똑같은 죄의 현실을 엄청난 죄로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가고 싶은데 죄 때문에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죄 사함 또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인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주저함도 거침도 없이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좋으신 하나님께 갈 수 없었던 자신에게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경건하다고 여겨지는 바리새인의 집은 창녀인 여인에게는 금기시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붙잡게 되었고 하나님께 안기게 되자 거침도 없고 주저함도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하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감사함과 감격으로 흐르는 눈물로 발을 적셨고 머리털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다 드리고 나서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마음가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인이 이렇게 큰 사랑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큰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속삭임을 계속 듣고 있었기에 스스로의 죄가 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47절의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속삭임을 듣고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아는 사람만이 죄의식을 크게 느낄 수 있고, 큰 죄 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십자가 생활화를 계속해 나가실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삭이고 계심을 통해 끊임없이 유전 죄의 체질로 인해서 창녀노릇 할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창녀 노릇하던 나를 십자가에서 죽임으로써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한스럽고 통탄스러운 죄악 된 나를 끊임없이 죽은 자로 발견하게 하시고 그토록 좋으신 하나님을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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