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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 패턴_태승철 (누가복음 8:14~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28|조회수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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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패턴>의 줄거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담고 있는 하나님 말씀이 내게서 결실을 보려면, 대범한 심리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대범한 대신에 대담한 심리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결실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대담한 심리 패턴이 되면서 인생은 가시밭길이 됩니다.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 패턴

(누가복음 8:14~15)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 패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 패턴’

계속해서 네 가지 밭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은 가시떨기의 심리 패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범 대신 대담한 심리 패턴’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대범했어야 하지만 대담한 심리적 반응 상태를 보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대담하다는 말은 “겁이 없고 용감한 기운이 아주 크다.”라는 뜻입니다. 좋은 의미로도 쓰이고 나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는 말입니다. 한편 대범하다는 말은 “성격이나 태도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너그럽다.”라는 뜻으로써 좋은 의미로만 사용됩니다. 너그럽다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도량 즉 수용하는 힘이 크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범과 대담을 공식적인 언론에서조차도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뉴스에서 “최근 마약 밀매 조직들은 시내 한복판에서 버젓이 교통경찰이 있는 가운데 대형트럭으로 마약을 운반하는 대범함을 보이고 있다.”라는 문장을 쓴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대범함이 아니라 대담함을 써야 맞을 것입니다. 또한 “그 범인은 대낮에 명동 한복판에서 길가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흉기를 휘두르며 금품을 갈취하는 대범한 범행을 저질렀다.”라는 경우에도 대범하다는 표현을 쓴다면 범행을 미화하는 말이 되기에 대담하다는 말로 고쳐 써야 맞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 또한 앞서 살펴본 길가와 돌밭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응하는 우리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심리 상태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에서 들려오기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도대체 하나님 말씀은 언제 어디에서 반응해야 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드렸는데 질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어려워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이 비유에 대해서는 마음 밭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디에서 들리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면서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해보고자 합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의 내용을 축약하여 생활 속에서 기억할 수 있도록 바꾸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모든 사람과 나 자신에게 하나님만이 최고로 좋으시다.”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삼각관계 안에서 삶의 현장을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있고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사건과 문제들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말씀 속에서 내가 의식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모든 사람과 나 자신에게 하나님만이 최고로 좋으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삶의 문제에 대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동원하여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자가 되셔서 이미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 문제는 달라집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이 나를 하나님께 갈 수 있게 해주는 길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는 옥토로서의 심리 패턴입니다. 이러한 심리 패턴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심리 패턴 갖기와 열매 맺기가 제목에서 말씀드린 대범함과 대담함과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대범함과 다르게 대담함은 나쁘게 쓰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대담함은 바로 가시떨기 같은 심리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생의 염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가시떨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이 세상 삶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런데 이 가시떨기로 표현되는 마음은 돌밭과 마찬가지로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유일하게 최고로 좋으신 분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주관하시며 당신의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심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돌밭의 심리 패턴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부분을 종교적인 언어 안에서만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최고로 좋게 여기는 것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 대상은 건강이나 돈이나 자녀의 형통이나 승진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최고라며 찬송도 부르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칠 수 있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건강이나 돈이나 형통이나 승진 등의 세상 가치들을 최고로 여기는 이중언어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말라죽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편 가시떨기 밭의 심리 패턴은 돌밭과 비교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두 번째 부분에 대한 반응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이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권자시라는 것은 나의 삶의 모든 일에 대해 관장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유일한 주체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가시떨기의 심리 패턴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대하여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인정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믿는다고 말하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심도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에 계획을 가지시고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정리해봅니다. 돌밭의 심리 패턴에서는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을 종교적 언어체계 속에서는 받아들이고 예배당 안에서는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편 가시떨기 밭으로 비유되는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주권자이심을 종교적 언어체계 속에서는 받아들이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인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어느 곳에 사용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무엇이 문제라는 것일까요? 종교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지만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책임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현상이 염려입니다.

염려는 모순적이게도 가장 대담한 행동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백주대낮에 명동 한복판에서 부녀자들에게 흉기를 휘두르며 금품들 갈취하는 대담함을 보인 범인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대담함입니다. 언제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주체의 자리를 갈취하는 범행을 저지르는 꼴입니다. 이보다 더 대담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가시떨기의 마음은 종교적인 언어 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고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조차 주관하심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활동을 벗어나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적용하지 않고 무시해버립니다. 내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며 이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표현방식으로써의 염려를 주야장천 드러내게 됩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염려는 결코 불쌍하거나 도와주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부인하고 내가 주권자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대담함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주권자가 되는 대담함을 보인 가시덤불의 심리 패턴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인생은 정말로 가시밭길이 펼쳐지게 됩니다. 염려는 곧 책임감의 표현입니다. 단 하나도 옳게 되는 일이 없는데도 책임감을 가지고 인생을 헤쳐 나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실로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누가 시켜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담하기에 그 비참한 가시밭길에 겁 없이 뛰어든 것입니다.

가시덤불의 심리 패턴에서는 두 번의 대담함이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스스로 주권자가 되고자 하는 대담함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시밭길이 되어버린 인생길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는 대담함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 참여하신 집사님께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제게 석회암 바위층이었던 것은 승진이었고 돈이었습니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 애를 많이 썼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에 그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승진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분만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삶은 가시밭길입니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대담하게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왔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이 대담함은 내가 주체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대담함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결과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은 내 삶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다 주관하시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 계획을 모두 휴지통에 집어넣어버립니다. 대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스스로 삶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고 염려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라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재물은 책임감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이생의 염려의 대부분은 돈 문제입니다. 돌밭의 심리 패턴에서 재물은 좋아함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가시떨기의 심리 패턴에서 재물은 단순한 좋아함의 대상이 아닙니다. 생을 책임지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지만 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돈 자체에 욕심을 내지 않더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녀도 교육시켜야 하고 때때로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도 돈은 필요합니다. 때로는 이웃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특별히 돈에 욕심을 내지 않더라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래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것이지 결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면 필요한 만큼의 돈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것들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삶을 책임지려고 할 때에 설령 돈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돈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바닷가를 산책하다 공원에 앉아있다 보면 연금으로 생활하는 어르신들을 보게 됩니다. 이분들은 특별히 돈을 더 벌겠다는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분들에게는 돈보다는 건강이 최고의 관심거리입니다. 누구나 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에 좋아하지도 않는 돈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향락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에 앞서 올바른 대범함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된다면 이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대범해지게 됩니다. 세상의 문제들을 시시콜콜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좋으심에 비교해보면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좋음은 너무나 사소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좋음을 기대하지 않으니 대범해질 수 있습니다.

대범함은 작고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넓은 도량을 가지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 성을 빠져나왔을 때 뒤를 돌아보았던 이유는 소돔 성에서의 삶을 사소하게 여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돔 성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던 것처럼 대범할 수 없다면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에 비교하자면 사소하다 못해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한다면 세상의 일들에 매이게 됩니다. 세상일을 주체적으로 책임지려 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염려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없기에 공허를 느끼게 됩니다. 마음의 공허는 심심함, 외로움, 무료함, 지루함 등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이때에 세상에서 향락을 추구하게 됩니다. 향락이란 말에서는 변태적인 취미를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흥밋거리, 재밋거리, 취미들이 향락의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이러한 향락에 강하게 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루하고 외롭고 심심하다면 취미나 흥미에 몰두하기에 앞서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이 흥밋거리나 재밋거리들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내 마음을 채워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롭고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해서 그것을 취미나 흥미로 때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 그것들에 몰두하게 될 때 구원 자체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1년간 비지팅 스칼라(Visiting Scholar)로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가 어렸기에 집사람은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가끔 몸을 움직이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아는 분의 집에 골프채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빌려서 연습장에 가서 해보게 되었는데 20달러에 공 120개 정도 줬던 것 같습니다.

대개 지독하게도 공이 안 맞았는데 어느 날은 공이 깡깡 명쾌한 소리를 내며 아주 잘 맞았습니다. 이제 비법을 알았다는 생각이 들자 앞으로 더 자주 와서 골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신나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느닷없이 팔목만한 시커먼 전선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내려 보니 주변에는 전깃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는데 차에 시커먼 고무자국이 나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골프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심심하고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해서 골프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는 목 베임을 당하듯이 죽겠다는 두려움이 생겨나게 되었고 골프를 끊어버렸습니다.

 

살면서 골프를 칠 수도 있고 다른 흥밋거리나 재밋거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할 수밖에 없어서 하게 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마음의 공허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중에 어쩔 수 없이 골프를 치러 가게 된다면 하시면 됩니다.

골프 혹은 다른 취미나 오락거리 자체를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마음을 대신하려는 시도가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취미든 오락이든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서 책임감을 느끼면 마음은 하늘로 갈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염려입니다. 염려하며 사는 가운데 마음이 공허를 느낄 때에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채울 대상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꾸 향락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쁨을 채우기에 부족한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 되실 자격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떤 취미든 오락이든 다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으로 채우고 난 후에 하나님의 뜻이라면 해도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주체가 되겠다고 하나님을 뿌리치는 모습은 참으로 대담무쌍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담함에서 비롯된 책임감은 염려를 만들고 가시밭길을 만들어갑니다. 이 대담함으로 인해서 재물에 대한 염려와 향락으로 빠짐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대담이 아닌 대범해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대범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가시밭길이 아닌 이 세상의 일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대로 다 이루어지는 탄탄대로를 갈 수 있습니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평강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대범하게 뿌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자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대담함을 버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재물에 대해 염려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을 표현하며 세상의 향락을 좇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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