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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혈연은 참 가족 아닌 프로그램>의 줄거리: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는 영원히 함께할 진짜 가족이 아니라 한시적인 프로그램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하나하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 보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아내 사라나 독자 이삭의 존재 의미와도 같지요. 서운하십니까? 내가 이 프로그램을 잘 수행할 때 혈연 가족도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혈연은 참 가족 아닌 프로그램
(누가복음 8:15~21)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혈연은 참 가족 아닌 프로그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혈연은 참 가족 아닌 프로그램’
오늘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마지막 절인 옥토에 관한 말씀과 등불 비유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족의 정의를 내리신 부분을 한데 묶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셨겠습니다만 등불 비유와 가족에 관한 예수님의 선언들은 모두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또한 이 말씀에 대해 어떤 심리 상태로 반응하는가를 패턴화하여 제시해주신 것이었고, 이러한 비유를 통해 마음의 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었습니다.
15절을 보면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마지막 비유로써 옥토가 나옵니다. 옥토 비유와 연관하여 등불 비유를 요약해보자면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옥토의 심리 상태를 보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등불이라는 내용입니다. 세상은 빛이 없고 실제 생명이 없고 기쁨과 만족이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속에서 등불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옥토의 심리 패턴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둡고 공허한 세상을 밝히는 등불들 하나하나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될 진짜 가족입니다. 우리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피붙이의 끈끈한 정과 유대감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혈연상의 가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옥토로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끈끈한 정과 유대감을 가지고 계십니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가족의 구성을 보면 제가 있고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고 부모형제가 있습니다. 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는 부부, 부자, 모자, 부모, 형제 등으로 성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가 다 진짜 가족이 아닌 프로그램입니다. 그렇다면 혈연상의 가족이라는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혈연상의 가족을 구체적인 기준으로 삼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7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가장 가까이 있고 늘 보고 있는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부부생활은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부자관계는 아버지는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 볼 수 있고 아들은 아버지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부모나 형제자매에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러한 가족관계들은 프로그램이기에 진정한 의미의 가족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소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가족뿐인데 어떻게 피붙이를 가족이 아니라고 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나의 살같이 소중한 가족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기준으로 제시된 프로그램일 뿐이라니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운한 마음이 들수록 더욱 더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프로그램의 목적을 충실히 살려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녀들보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우선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럴 때 혈연상 가족이었던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진짜 가족이 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께서는 반대 의견을 내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배우자가 철천지원수 같은데 이런 배우자를 기준으로 어떻게 프로그램의 목적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옥토가 될 때 가족이라는 본연의 프로그램의 목적은 달성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옥토가 된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 있든지 등불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밝히 보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가장 높은 곳 등경 위에 두어서 온 집안에 빛이 퍼지게 합니다. 또 17절을 보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드러내기 위하여 숨겼으며, 알리고 나타내기 위하여 감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옥토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으심과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게 하려고 감추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며 또한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비할 수 없이 좋은 곳임을 사람들로부터 감추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옥토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마음이 옥토가 된 자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옛날 미국에서 금광 개발이 유행할 때의 일입니다. 모든 가정의 남자들은 금광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녔습니다. 발견하면 자신의 것이 되기에 뭉쳐 다니지 않고 흩어져서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광의 발견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금광을 발견하기 위하여 돌아다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금광을 발견했냐고 물었지만 이 사람은 찾지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고 나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새벽에 몰래 장비를 챙겨서 집을 빠져나갑니다. 실은 금광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금광을 파기 시작하는데 주변이 왁자지껄 시끄럽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따라온 것입니다. 놀라서 대체 어떻게 알고 쫓아왔느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이 집에 돌아온 뒤로 항상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입으로는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기쁨을 감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금을 캐보고자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옥토가 된 자들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금광을 발견했으면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금광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기쁨이 가득 찼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존재를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된 자들의 마음이 옥토입니다. 금광을 발견한 사람이 얼굴에 기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듯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등불처럼 빛을 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는 다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숨기고 감추셨다는 말씀에 담겨있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감추어진 금광을 발견한 사람처럼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그 얼굴에서부터 티가 나게 하시기 위하여 감추신 것입니다. 말씀 속에 다가오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등불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좋으심은 증거 됩니다. “진짜 저 사람을 보면 우리가 모르는 좋은 것이 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성경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아직 사울이었던 시절의 바울은 그 광경을 보고서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의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평강의 빛이 날 수 있으며 돌로 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사울에게 등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혹독하고 참혹한 순교의 상황 속에서도 금광을 발견한 좋음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금광으로 발견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등불들은 또한 영원히 주님을 모시고 하늘나라에서 함께 살 가족들이기도 합니다.
이 등불이자 가족을 결정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은 마음이 옥토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어떠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옥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이 옥토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성경 66권의 내용이기도 하며 지금도 24시간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첫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게 유일하고도 최고로 좋으신 대상이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만이 내 삶의 유일한 주체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의 동선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어와 결실할 때에는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결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결실을 맺는 상태가 바로 옥토의 상태입니다. 하늘로 결실이 맺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땅에 결실이 맺어진다는 것은 나의 삶의 현장에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주권이 내려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주권이 땅으로 내려와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복지를 살아가는 모습이자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옥토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씀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현장에서 나의 주체성을 대체해야만 한다는 말씀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옥토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 상태가 유지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옥토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관계하는 모습은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남자나 여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또 가정에서는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십자가에 걸려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충분히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정착되고 유지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유지되는 상태에서만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시며 세상의 주권자이시라는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옥토의 상태 즉 등불이 될 때에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은 24시간 쉬지 않고 들려옵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세상의 말씀 또한 24시간 쉬지 않고 들려오게 됩니다. 이 세상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4시간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은 모습을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 옥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뒤집어보자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 옥토인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서 살아갈 때 24시간 들려오게 되는 세상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이 길가, 돌밭, 가시덤불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 말씀이란 곧 세상의 언어체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웃들은 거의 다 세상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등불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말씀에 대한 마음 상태가 등불 됨을 결정짓게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첫째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사람들을 통해서 전하는 세상 말씀은 이 땅 위의 인간세상 안에 온갖 좋은 것이 다 있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가질 때에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삶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체이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대로 세상 말씀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여겨지는 온갖 좋은 것들을 갖기 위해서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말합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곧 주체성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꿈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라, 열정적으로 노력하여 대가를 치르고 쟁취하라고 말합니다. 진인사대천명이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으며, 고진감래이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합니다. 성공하라, 형통하라, 번영하라, 승진하라, 비전을 바라보고 긍정의 힘을 활용하라, 새벽형 인간이 되어라, 일만 시간의 법칙을 적용하라고 합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될 수 있다, 나도 도달 할 수 있다, 나는 내 생애의 주인이고 주체다. 이러한 말로 끊임없이 격려하지만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이것이 세상 말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옥토인 사람들은 세상 말씀에 대해 길가이고 돌밭이며 가시덤불과 같이 반응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유지되는 가운데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유지되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첫 번째 현실이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현실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옥토인 사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며 첫 번째 체감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느낄 때 세상의 상황은 잠재적 현실로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운영하는 회사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합니다. 부도라는 상황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유일한 주체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 말씀은 부도라는 상황에 빨리 대처할 것을 요구합니다. 해결책을 찾아 발품을 팔고 아는 사람을 찾아가 돈을 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자는 부도라는 상황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선적인 현실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럴 때 안절부절 못하고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평강을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았을 때에 나타나는 체감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현실로부터 상황을 전달받게 됩니다. 첫 번째 현실이 돈 없는 상황이라면 그로부터 걱정과 두려움을 전달받을 것입니다. 첫 번째 현실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느낌을 전달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채우기에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불안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을 때에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삼은 사람에게는 금광을 발견한 사람과 같은 표정이 나타납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이 진짜로 계신다는 사실이 등불처럼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첫 번째 현실이 되실 때 그에 상응하는 평강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마음에는 세상이 담길 여지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의 마음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세상이 마음에 담기지를 않습니다.
설령 여러분께서 은행에 잔고가 두둑하다고 하여도 마음은 십자가에서 은행의 잔고에 대해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에 더는 마음에 잔고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건강문제에 대해 직장문제 등에 대하여 십자가에 죽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거지 나사로처럼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거지 나사로에게는 비록 세상의 가치들은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만 가지는 옥토의 상태가 됨으로써 세상에 대해서는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덤불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등불에 대한 말씀에서 18절 하반부를 보면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한 분 가지느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갖느라 하나님을 갖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입니다. 스스로는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조금도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늘에 금광이 있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등불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끈끈한 정을 느끼며 가족이라 부르십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모르고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최고이시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체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등불이 되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같이 사는 가족들로 모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이 옥토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늘을 금광삼아 바라볼 수 있는 등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 하시는 영적인 가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