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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발산하라_태승철 (누가복음 8:16~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0.30|조회수6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발산하라>의 줄거리: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야 하지만 사실 75억 명 중에 이미 등불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서 이미 다 등불입니다. 등불의 심지가 기름에 물들고 그 기름에 취한 심지에 불이 붙어 빛을 발산하듯이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첫 번째 대상에 물들고 취하여 그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입니다. 무엇이 그 첫 번째인지가 문제지요.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발산하라

(누가복음 8:16~25)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발산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발산하라’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마지막 구절인 옥토에 관한 말씀과 등불의 비유와 진정한 가족이 누구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광풍노도를 만난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말씀의 배열이 특별합니다. 마태나 마가에 비해서 누가의 의도가 강하게 느껴지는 단락들의 배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일된 맥락으로 옥토의 의미를 알 때 등불에 대해 알 수 있고 참 가족이 누구인지와 광풍노도를 만난 사건이 새로운 측면에서 비춰지게 됩니다. 이 세 사건을 같이 묶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옥토와 같은 마음 상태의 사람이 세상을 만날 때 등불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다는 것과 내 머리털까지 세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 주관하시는 주권자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하신 하나님께 마음이 도달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옥토와 같은 마음 상태의 사람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심과 주권자 되심을 발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등불의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때에 삶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 어떤 신분이냐 앞으로 무엇을 이루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때에 따라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고, 만들려고 하고, 성취하려 하고, 꿈과 비전을 쫓아가는 삶에는 종지부가 찍힐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상태에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과 주권자 되심을 드러낼 수 있으면 됩니다.

대통령이면 대통령의 일이 있고 9급 공무원에게는 9급 공무원의 일이 있습니다.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으심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나타낼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의하여 이끌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전달되고 있고 창조주이시자 주권자로써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실 수 있을까요? 또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등불이 될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이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날 때에 가능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첫 번째 대상에 물들고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대상에 물들고 취하여 내뿜는 기운을 통하여 다른 모든 대상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등불이 타오르는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등불의 구조를 보면 심지가 기름에 젖어있습니다. 기름이 심지 끝까지 완전히 스며들 때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등불의 심지와 같습니다. 첫 번째 대상에 물들고 취하여 그 기운을 발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로 들자면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로미오의 마음은 줄리엣이라는 존재에 물들게 되었고 줄리엣이라는 기운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는 줄리엣이라는 존재의 자취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줄리엣 또한 로미오에 대해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나인 성 과부의 경우에는 외아들이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었습니다. 과부의 마음은 외아들이라는 존재에 물들고 외아들의 기운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과부는 외아들을 드러내는 말과 행동을 하는 등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첫 번째로 만난 대상을 드러내는 등불로써 살아갑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등불이 되라는 의도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무엇인가의 등불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마음을 밀착시킨 대상에 의해 마음은 물들고 취하게 되고 그 기운을 발산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마음이 첫 번째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연습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혈연상의 가족입니다. 지난 시간에 혈연상의 가족은 프로그램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나기 위해 연습하는 태권도장 같은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맺는 관계 중에 혈연은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설령 가족이 없을지라도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과의 관계는 혈연과 동등한 위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물건일지라도 마음에 첫 번째로 관계할만한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혈연으로 상징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한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보다도 내 마음에서 첫 번째로 가까운 밀착의 대상이 되셔야만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세상의 대상들에 물드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싫든 좋든 마음에서 첫 번째로 붙잡은 사람은 남편의 기운에 물들고 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달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편의 등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난 상태에서 하나님께 물들고 하나님의 기운에 취하여 등불을 발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히려 남편 앞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자녀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하여도 마음에서 자녀가 첫 번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에 자녀에게 물들고 자녀의 기운에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 앞에서 자녀의 기운을 내뿜는 등불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마음이 하나님과 첫 번째로 밀착되기를 요청합니다. 자녀 앞에서 하나님께 물들고 취해서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뿐만이 아닙니다. 배우자 앞에서 부모 앞에서 말과 행동과 표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하는 하나님의 등불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종교인의 삶을 사는 동안에는 이와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족들의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로 사는 것을 신앙생활로 여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가정뿐만 아니라 직장이든 학교든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있는 장소에서 하나님과 밀착해서 하나님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직장에 가면 마음이 사장님에게 밀착하고자 하였고 승진이나 월급인상에 밀착되어 그 기운을 내뿜고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직장은 승진과 월급에 물들어 그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들의 모임입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마음을 첫 번째로 권력에 붙이게 되어서 권력의 기운에 물들고 취하여 그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모든 등불들은 빛을 내고 기운을 발산하고 있지만 모순되게도 그 빛은 어둠의 빛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은 등불들로 가득함에도 어둠으로 차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의 빛을 발산하는 등불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광명의 빛을 발산하는 진짜 등불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것을 위해 마음이 하나님과 첫 번째로 밀착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렇게 물들고 취하고 발산함의 극단적인 예가 우리가 살펴본 본문입니다. 광풍노도를 만난 사건에서 그러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의 수면보다 200m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헬몬산을 비롯한 산지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의해 큰 기압차이가 발생하고 바다의 수면을 끌어올리는 강한 폭풍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일엽편주에 의지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 동쪽의 이방 땅으로 향하던 중에 이러한 광풍노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를 만난 일엽편주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계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은 어부로써의 경험과 대처능력 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는 속수무책의 상태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두 종류의 등불이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좋으시다는 것은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대상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마음은 하나님께 첫 번째로 밀착된 상태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되시는 하나님의 좋으심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또 그 좋으심에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노도 속에서 주무심으로써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발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의 마음은 광풍노도를 첫 번째 대상으로 밀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은 광풍노도의 기운에 물들고 취하게 되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몸부림침으로써 광풍노도의 기운을 발산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일엽편주에 몸을 맡긴 채로 광풍노도를 만났을 때에 두려워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이 광풍노도를 첫 번째 대상으로 붙들고 밀착하게 되었기에 그 기운에 물들고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광풍노도의 기운이 움직이는 대로 미치광이처럼 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십니다. 광풍노도를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지도 않으셨으며 제자들을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으셨고 그 결과 하나님의 좋으심이 발산되는 등불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광풍노도의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이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광풍노도의 기운에 사로잡힐 때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미치광이가 되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상의 광풍노도가 불어 닥치게 되었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삶에서 어떤 광풍노도가 불더라도 그곳에는 동시에 최고로 좋으신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삶의 현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설령 우주에서 몇백 광년을 움직인다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은 항상 내 곁에 와 계십니다.

따라서 건강상의 광풍노도가 일어났을 때도 마음은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붙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건강상태를 첫 번째 대상으로 붙들고 마음이 물들고 취하게 된다면 그 기운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빠진 건강상태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걱정으로 몸부림치는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짓은 미치광이의 춤에 지나지 않습니다. 걱정과 염려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마음을 붙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일 뿐입니다.

건강이 아무리 안 좋아도 하나님께 마음을 붙이고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발산하는 등불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문제나 자녀문제가 광풍노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의 의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마음이 격리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밀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할 일은 하나님께 마음이 물들고 취하여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결코 문제에 마음을 붙여 물들고 취하여서 미치광이 춤을 추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만나 물들고 취하여서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과 첫 번째로 만나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이 광풍노도를 만난 상황에서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광풍노도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게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주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으로 내려오신 하늘이셨습니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늘이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은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한낱 목수였던 예수라는 청년 안에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마치 당의정과 같습니다. 당의정이란 어린이가 쓴 알약을 먹을 수 있도록 달콤한 옷을 입힌 것입니다. 당의정은 뱃속에 들어가서 녹고 약기운이 몸으로 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의정이십니다. 예수님을 먹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성찬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예수님을 먹으면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주권자 하나님이 우리 안에 밀착되십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끌어안음으로써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었습니다. 풍랑 만나 침몰할 위기에 놓인 배에서 제자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어부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배가 뒤집히든지 말든지 예수님을 끌어안음으로써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고 깊이 주무셨던 예수님과 같은 평강이 임할 수 있었습니다.

광풍노도 속에서도 열두 제자가 하나님의 기운에 물들고 취하여 예수님과 더불어 깊은 잠에 빠져있는 광경을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신비롭고도 은혜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아기들이 잠을 잘 때 엄마의 손가락을 붙잡고 안심하여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빛을 발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습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광풍노도를 만나더라도 마음이 밀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도 그것은 마음이 첫 번째로 밀착해야 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주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가 끌어당겨서 마음에 붙인다면 말도 행동도 광풍노도에 장악되어 그 기운을 발산하면서 미치광이의 춤을 출 수밖에 없습니다. 두렵고 떨리고 쫓기며 염려와 근심에 찌든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은 비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광풍노도를 만날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 광풍노도 속에서 주무실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광풍노도도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찻잔 속에서 일어나는 태풍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문제도 나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께 밀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끌어안으면 마음은 하나님께 밀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어떤 광풍노도에도 마음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에 미치광이의 춤을 추게 됩니다. 나의 의식으로 예수님을 기억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은 세상을 끌어안아서 더러워져 있던 마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과 밀착되어 계시기에 우리의 마음 또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을 끌어안는 것이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밀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통해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은 유지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첫 번째로 밀착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느냐 마느냐, 돈을 버느냐 마느냐, 목회 현장에 교인이 오느냐 마느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에서 등불이 되고 목사님이 등불이 되면 됩니다. 제가 강릉에 와서 십자가 복음방송을 한지도 10년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날마다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시고 하나님이 주권자 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과 밀착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끌어안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든 실직한 상태이든 하나님의 좋으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끌어안고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밀착을 이루면 됩니다. 실직한 상태일지라도 우선되어야 하는 일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직업입니다. 목사님들도 목회가 직업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등불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목회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로서도 하나님의 등불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부모 노릇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이 아닌 사람이 온전한 아내이고 남편일 수도 없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등불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등불이 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끌어안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당의정이신 예수님을 의식으로 붙잡을 때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게 됩니다. 이때 마음은 기쁨과 만족과 평강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물들고 취하여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로써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 된 사람마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어디를 가든지 의식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끌어안고 있는 동안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게 하셔서 좋으심에 물들고 취하여 그 기운을 발산하는 등불로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등불 된 자들을 주님의 교회로써 붙들어 주시고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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