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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산상실 두려움은 귀신역사>의 줄거리:
재산을 상실하는 것을 손해나 피해나 재앙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하면 귀신의 역사입니다. 재산과 재물은 낭비했든, 사기를 당했든, 투자를 잘못했든 상실되는 법이 없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제거될 뿐입니다. 내 마음이 첫 번째로 밀착하여 있는 재물을 제거하셔서 복지의 길을 여시려는 뜻을 귀신이 상실로 포장을 하는 겁니다.
재산 상실 두려움은 귀신 역사
(누가복음 8:26~39)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재산 상실 두려움은 귀신 역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재산 상실 두려움은 귀신 역사’
재산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귀신의 역사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비상식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재산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귀신에 감동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실감이란 소중하고 아까운 것을 잃어버린 느낌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소중하지 않고 아깝지 않다면 없어질지라도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목 뒤에 큰 혹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수술을 받아 큰 혹을 떼어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혹을 상실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숨을 위협하는 암에 걸린 사람이 암 덩어리를 제거한다고 해서 그것을 상실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필요 없고 나쁜 것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재산을 상실했다고 여기는 것은 무척 우스운 일입니다. 영적으로 재산이나 재물은 혹이나 암 덩어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참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예수님의 평지 설교를 통해 같은 내용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4절에서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영적으로 재산과 재물은 혹이자 암 덩어리와 같기에 없어진다 하여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제거된 것이지 결코 상실된 것은 아닙니다.
재산과 재물은 크든 작든 사람의 마음과 밀착하기 쉬운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말로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실제로 재산을 잃게 될 때에는 상실감을 느끼고, 마음이 첫 번째로 붙었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재물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에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재산과 재물이 되어있는 상태는 반드시 종식되어야만 합니다. 암에 의해 육체가 죽어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사망이라는 상실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우리를 본다면 재산과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하거나 잃었다고 상실감을 느끼는 상황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분이심을 알고 있는 천사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은 재산과 재물이 없어졌다고 왜 저렇게 상실감을 느끼고 섭섭해 할까? 이제야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는데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서 재산과 재물을 없애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재산과 재물을 떼어내고 격리시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재산과 재물을 제거하는 방식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재산과 재물을 공공단체에 기부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거나 쇼핑으로 탕진해버린다고 해서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재산과 재물에 붙어있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기부나 구제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떼어내기 위해 실제 재산과 재물에는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내 마음과 재산과 재물 사이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모셔 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음에서 재산과 재물을 격리시키고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날마다 반복할 때에 마음에서 재산과 재물은 점차 격리되기 시작합니다. 재산과 재물을 하나님의 주권에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거지 나사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나사로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복음적 용어의 의미를 풀어보자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거지 나사로와 같은 마음 상태가 되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의 상태를 유지해나감으로써 마음에서 밀착되어 있는 재산과 재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산과 재물을 마음에서 제거할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면 잃었을 때에 상실감으로 느끼고 두려워합니다. 그럴 때에 본문에 나타난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똑같은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서 재물과 재산에 대해 죽어야 함을 사랑으로 권고하시며 경고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십니다. 이곳은 갈릴리 북동편에 있던 이방인의 땅입니다. 이방인의 땅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은 동토와 같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귀신들에게는 낙원이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의 낙원인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찾아가십니다.
28절을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을 향해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방문은 귀신들조차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만남에서 귀신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담고 있는 말씀의 내용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최고로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반드시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하며,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책임과 이끄심 속에서 공짜로 살아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 인간의 마음을 연결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귀신들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과 비교해보자면 귀신들은 이렇게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께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귀신들의 마음은 원망과 증오와 적대감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사탄의 왕 바알세불도 하나님을 직접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증오심과 적대감과 원망으로 똘똘 뭉쳐진 오기로 사람을 겨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과 밀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신들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믿어서 그것에 밀착하도록 유도합니다. 또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이렇게 귀신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삼을 수 없도록 목숨을 걸고 방해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귀신이 만나게 되었고 동상이몽의 현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귀신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 레기온(λεγεών)으로써 로마식으로 6,000명에 해당하는 규모의 부대를 의미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했으니 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귀신이 들어와 있었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의 인격이 귀신에게 물들고 취해서 귀신의 기운을 강하게 발산하는 등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하십니다. 29절을 보면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러자 귀신들은 31절에서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저갱이란 곧 귀신을 위해 예비 된 지옥으로써 귀신의 활동이 끝나는 곳입니다. 이 귀신들은 더 활동할 수 있도록 은퇴를 미루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대신에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귀신의 요청을 허락하십니다.
이 모습이 참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부탁을 들어주시고 기적과 말씀을 베푸시는 모습은 참 감사하고도 좋고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의 요청을 들어주셨던 것일까요? 그 결과 돼지 이천 마리가 죽어서 주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쫓겨나가는 귀신과 쫓으시려는 예수님 간의 동상이몽의 상황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는 귀신의 의도는 명백하였습니다. 귀신들은 거라사인의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이간질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붙잡게 될 것이기에 그것을 막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에서 귀신들은 예수님을 막대한 재산을 상실하게 만드는 분으로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예수님’ 하면 재산 상실이라는 상황을 연상하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두려워하도록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계획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방 땅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재산과 재물이 최고로 좋다는 귀신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옥토가 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이 개입하시는 것을 막고자 했고, 사람들은 예수님과 연결되면 큰 손해를 입는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귀신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할 때 나쁜 이미지를 가진 사람과는 관계하고 싶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의 대표로 여겨 키우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은 돼지를 귀중한 재산으로 여겨 키웠습니다. 돼지를 이천 마리나 잃는다는 것은 막대한 재산의 손실입니다. 이 재산의 상실을 예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하고자 한 것은 불리한 상황을 한 판에 뒤집을 수 있는 놀라운 지략이었습니다.
이러한 귀신들의 행동은 양동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귀신들은 이스라엘 땅에서는 작전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첫 번째로 밀착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마음에서 첫 번째로 붙잡고 있는 재산과 재물을 더 잘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줄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한편 이방 땅에서는 작전을 거꾸로 세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마음에서 첫 번째로 붙잡고 있는 재산과 재물을 반드시 잃게 된다고 설득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귀신의 계획은 적중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37절을 보면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라고 하였습니다. 군대 귀신이 들려서 난동을 피우던 사람은 내버려두다가 이 사람이 정상으로 되돌아오자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합니다. 그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귀신이 돼지 속에 들어가서 몰살시켜 버렸는데 그 원인을 예수님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같이 있다가는 남아있는 재산도 모두 상실할까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천 마리의 돼지가 죽은 것에 대해서는 손해보상을 요청하지 않을 테니 떠나만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얼마나 두려워하였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돼지를 잃은 것이 화가 났다면 예수님을 트집 잡아 변상을 청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재산까지 잃을까 두려움이 컸던 나머지 그저 떠나기만을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귀신의 작전이 잘 먹힌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귀신의 작전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허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귀신과는 다른 동상이몽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천 마리의 돼지는 주인에게는 엄청난 재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것은 이 재산권이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대기업 회장들은 대단한 재산가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대로라면 그 재산은 그들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 상실되게 하실 수 있으며 원하시는 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사 이래 사유재산을 인정해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사유재산을 인정할지라도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부정함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대표적인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셀류쿠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나라를 정복해서 헬라화 하고자 할 때에 성전을 모독하고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를 잡아 피를 바르고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며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과 끊어지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과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끊겨서 이 세상의 재산과 재물에 마음이 밀착된 상태는 귀신이 들어가는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이천 마리 돼지 떼에 귀신이 들어간 것이 상징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재산과 재물에 밀착이 되었다면 부정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귀신을 담는 용기가 된 것입니다.
귀신이 들어온 상태에서는 돼지 떼가 언덕 아래로 내달려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반드시 멸망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마음을 재산과 재물에 붙이고 살던 거라사인 지방의 이방인들은 모두 귀신을 담는 용기와도 같은 부정한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상징하는 이천 마리의 돼지 떼가 몰살당하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마음에서 재산과 재물을 제거하러 오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음에 밀착돼있는 재산과 재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되찾게 하시고자 재산과 재물이 제거되기를 바라십니다. 마음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재산과 재물뿐만이 아닙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나 자녀나 부모나 형제자매일 수도 있으며 내 몸까지 제거될 때에야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하는 일은 이와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내 마음에서 제거될 재산과 재물을 상실로 둔갑시킵니다. 마음이 붙어있는 재산은 제거되어야 할 악성 종양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과 밀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귀신들은 하나님과의 밀착을 막기 위해 재물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가 제거되는 것을 상실로 느끼게 합니다. 이 귀신의 작전에 지구의 75억 인구가 모두 넘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백만 원을 사기를 당했습니다. 이때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로 붙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으셔서 백만 원을 제거하신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재산을 첫 번째로 붙들고 있는 사람은 백만 원을 상실했다고 여기며 안타까워합니다.
또 다른 예로 친척 간에 재산상속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서가 유언장을 조작하여 재산의 반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때에 상실로 생각한다면 귀신의 역사입니다. 귀신이 충만하여 귀신의 감동을 받았기에 내 몫을 상실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내려다보고 계시는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동서가 유언장을 조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온전히 내 몫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동서의 손목을 부러뜨리셔서라도 막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하셨다는 것은 그 돈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들어오면 돼지 떼와 같이 귀신을 담는 용기가 될 수 있음을 아셨기에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그것을 재산과 재물의 상실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사유재산이라 여기는 재산과 재물을 그대로 인정하시는 이유는 인내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재산과 재물을 마음에서 격리시키고 떼어내고 제거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용도를 위해서 드려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렇게 재산과 재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면서 먹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구제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재산과 재물로 무엇을 사고 어떻게 쓰느냐가 아닙니다. 재산과 재물이 내 마음에서 제거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밀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밀착한 사람은 설령 사기를 당해서 재산을 다 잃었다고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마음을 밀착시키기에 유리한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제거하신 것이지 상실한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방법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사유재산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제거되기 전에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에서 재산과 재물을 재고정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어는 몸까지도 마음 바깥에 내놓고 제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산이나 재물을 마음 바깥에 내놓는 것은 상실이 아닌 하나님을 갖기 위한 제거입니다. 내 몸이 죽어도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마음이 온전히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육체가 제거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실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물리적 차원에서 제거가 일어나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자발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 죽기를 바랍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들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 첫 번째로 밀착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 태어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적든 많든 재산과 재물이 나의 마음에서 제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십자가를 놓치고 귀신으로 충만하여 제거를 상실로 느끼는 어리석음이 종식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