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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자>의 줄거리: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면 유익이 많습니다. 힘들고 지치고 막막하고 불안하세요? 당연하지요. 세상 원주민 삶의 특징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고 하늘 이민 가세요.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서 사는 겁니다. 이렇게 보냄을 받은 자로 신분만 바뀌었는데 세상 삶은 문제 제로의 상태가 됩니다.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자
(누가복음 9:1~9)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4.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5.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6. 제자들이 나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원주민 신분을 포기하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세상 원주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문제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우리의 신분은 하늘 이주민이 되고 이 땅의 삶은 하늘 이주민으로 보냄을 받아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인데 인생의 모든 문제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꼭 이러한 체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체험이 여생 동안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제가 문제가 없어진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꼭 체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우리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이어져온 세상의 원주민으로서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사는 삶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이유는 세상의 소유권이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창조주이자 주권자로서 세상을 소유하고 계시고 이끌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분입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원주민에서 하늘 이주민으로 바뀌게 된 신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삶에는 어떤 문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은 세상의 일들로 보냄을 받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에 대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미국에서는 실권을 발휘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보냄을 받은 대사의 행동에도 반드시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기에 미국 내에서 대한민국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문제를 푸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대사라는 직분이 바쁘고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냄을 받은 곳이 보낸 분의 소유라면 사정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 신분을 바꾸기만 한다면 삶의 질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셨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몸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은 오직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몸이 속한 삶의 문제들 또한 싹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말씀은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을 하시는 여러분을 위로하거나 격려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로하거나 격려하기를 포기한지는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마음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전히 나의 몸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보냄을 받아 사는 삶이 됩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에서는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세상 원주민 신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늘 이주민의 신분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몸이 속한 삶의 문제 또한 전부 사라지게 됩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누가만의 독특한 관점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파송을 누가만의 특이한 맥락을 통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나은 사건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을 연결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삶이 죽은 상태였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육체가 죽은 상태였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두 사건을 영적으로 상호보완하며 완전한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삶이 죽은 상태였던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성인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독립적 인격체로 맺어야 하는 시점에서 죽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셨기에 결과적으로 이들에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사는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누가는 이렇게 보냄을 받아 사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제자들 파송의 사건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보냄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문제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없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권위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절대적인 미래의 보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이유에서 삶에는 어떠한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를 막을 사람이 없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내 미래에 대해서는 좁쌀알만큼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보장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이러한 일은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에게서나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다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믿어본 적이 없고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아본 적이 없기에 이러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세상 원주민의 신분을 바꾸어본 적이 없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믿어서 신분이 변하여 보냄 받은 자가 되었다면 반드시 힘과 권위와 미래 보장의 경험은 주어지게 됩니다.
첫 번째로 능력이 주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로써 무엇을 하게 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원동력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힘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기에 삶에서 귀신이 문제가 된다면 귀신을 제어하게 될 것이고, 병이 문제가 된다면 병도 고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우리의 자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신을 쫓으라 하신다면 쫓을 것이고 병을 고치는 것이라면 고칠 것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능력이 엄청나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과제로 삼느냐가 아니라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맞아떨어질 때 안 될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어떻게 받을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방법은 세상 원주민 신분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원주민이자 영주권자라는 증서나 신분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신분을 버릴 수 있을까요? 세상 원주민의 습관을 버리면 원주민의 신분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 이주민의 신분을 획득하고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보냄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꼭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등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 원주민의 습관 버리기는 쉽습니다. 생각을 올바르게 가지면 됩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 파송은 마치 예행연습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에 대한 예행연습과도 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 사람들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누가는 혈루증 여인처럼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이 보냄을 받았을 때에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제자들의 파송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원주민의 습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일까요? 원주민의 습성은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힘을 쓰고 세상의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힘을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이러한 습성은 버려지게 되고 하나님의 뜻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눈 떠서 일어나 움직이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해결이고 돈이 없으면 문제라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돈은 있어도 문제이고 없어도 문제입니다. 문제시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으로 채워졌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은 문제도 아니고 해결도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면 돈이 적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돈이 많아도 득이라 여기지 않게 됩니다. 돈은 하나님 뜻대로 쓰일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돈을 쓰는 것은 나지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나에게로 쓰임새가 돌아왔을 뿐이지 내가 나를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자녀가 형통해도 문제고 불통해도 문제입니다. 자녀가 대학시험에 떨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큰 문제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다면 자녀가 대학시험에 떨어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대학에 붙었더라도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면 앞으로의 일들을 계속해서 문제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다면 자녀가 대학에 붙은 것을 아무 유익이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어져 나가는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대학에 떨어졌어도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에 교인이 오면 해결이고 안 오면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 교인이 오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교인이 온다고 해서 득이라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손에 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손에 쥔 것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결코 이 세상은 있어도 문제이고 없어도 문제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습관적으로 세상을 소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힘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해 힘을 쓰지 않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돈은 있어도 없어도 문제도 아니고 이득도 아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벌고 가지면 이 세상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꼭 체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뒤나미스(δύναμις) 즉 힘은 날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벌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온라인 교회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말씀을 주고받는 가운데 하나님을 벌기 위함입니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는 진리에 대해 서로의 경험을 통해 나눌 때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십니다. 이렇게 함께 하나님을 버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것이 온라인 교회 모임입니다. 그렇게 힘을 쓰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권세는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로써 “~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어 에크(ἐξ)와 “본질”이라는 뜻의 우시아(ουσία)의 합성어입니다. 즉 궁극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상태가 바로 권세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철학을 한다고 할 때에 자신의 사상을 만들기 위해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원전을 참고합니다. 철학계보에서 궁극적인 시작점이라고 여겨지는 원전으로부터 사상의 출발점을 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에 대해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이 이미 정리해둔 연구서를 보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플라톤의 원전을 읽으며 사상을 정립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원주민의 신분을 버리고 보냄을 받은 자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말씀만으로 지으신 창조주이시자 소유주이신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삶에는 평강과 담대함과 단호함이라는 특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과의 타협함이 없고 흔들리지 않는 평강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랜 수련을 거친 특별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특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을 하늘로 보낼 때에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세가 바로 평강과 담대함과 단호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권세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 원주민의 습성을 죽임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 원주민의 습성을 중단할 때에 세상 원주민의 신분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마음이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비로소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권세가 주어지게 됩니다. 창조주의 허락과 함께 말과 행동이 나타납니다. 전업주부라고 해서 권세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의 허락을 받고 밥을 짓는 것과 허락 없이 내가 가족의 먹거리를 책임지겠다는 의식으로 밥을 짓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삶이 힘들고 지치고 염려되고 불안하고 짜증 나는 이유는 세상 원주민 신분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원주민 신분으로 전업주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부모 노릇을 하려 하기에 힘들고 괴롭습니다.
권세와 연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세상 원주민의 습성은 높아지려 함입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높아지려 합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아직도 세상 원주민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시지 않은 분이기 때문에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높아지고자 하는 세상 원주민의 신분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이미 높은 사람의 측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원주민의 습성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측근이 되려고 하는 원주민의 습성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 7~9절을 보면 분봉 왕 헤롯이 언급됩니다. 7절을 보면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심히 당황했다는 부분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마치 생쥐가 고양이에 쫓겨 도망가다가 막다른 길에서 두려워하는 심정과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활동을 보며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을 떠올리며 불안에 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분봉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 내에서는 최고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원주민으로써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음에도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와 같은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과 제자들은 세상적인 어떤 권세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권세가 함께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8절에서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고 함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측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에 제자들은 아직 스스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측근이 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같은 공간에 머물며 예수님의 측근으로 존재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권세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공중권세 잡은 사탄과 귀신들을 제어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병을 고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권세는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더욱 분명하게 발휘됩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혔을 때에도 보냄을 받은 자로써 말하고 행동하였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예수를 전할 것을 명백히 다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매 맞는 것조차 예수님을 위하는 것으로 여겨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세와 권위입니다. 세상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왕의 위치에서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러나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세상적인 어떤 권세나 권위가 없을지라도 산헤드린공회조차 어찌할 수 없는 권세와 권위를 드러내게 됩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이처럼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을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죽일 때 창조주의 허락을 받은 권세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주부로서 밥 짓고 빨래하는 동안에, 부부가 서로 대화는 동안에, 부모로서 자녀를 대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창조주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나타날 때 마음에서 어떤 평강과 담대함과 단호함이 느껴지는지 꼭 경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절대적인 미래의 보장이 주어집니다. 3절을 보면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보냄을 받은 자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의 준비되시고 예비함이 되시며 보장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한 필수품조차 준비할 필요가 없으며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냄을 받으면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을 얻고자 관심과 힘을 쏟으려는 세상 원주민의 습성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또 이 세상에서 권세를 얻고자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하고 높은 자의 측근이 되고자 하는 세상 원주민의 습성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고 보장을 확보하려는 세상 원주민의 습성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에서 이러한 습성들이 죽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반드시 보냄 받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보내진 사람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고, 창조주의 허락을 받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며, 미래에 대해 전혀 걱정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분봉 왕 헤롯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힘과 권세와 미래에 대한 보장을 확보한 채 세상을 살아가시면서 체험하고 간증하며 누리며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이 죽으면 죽으리라 붙듦으로써 세상 원주민의 습성이 중단되게 하여 주심으로, 원주민의 신분을 버리고 하늘 이주민으로서 세상에 보냄 받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하시고, 창조주의 허락을 받은 권세로 살게 하시고, 미래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움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