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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확신에 찬 상황판단의 함정>의 줄거리: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를 조금 시각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백 퍼센트 확신하는 상황판단은 특별히 믿는다는 사람의 경우, 백 퍼센트 인생의 함정임을 알려줍니다. 내가 판 구덩이에 내가 빠지는 격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삶의 상황은 그 어떤 경우도 인생의 함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에 관한 판단이 언제나 문제지요.
확신에 찬 상황판단의 함정
(누가복음 9:10~17)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확신에 찬 상황판단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확신에 찬 상황판단의 함정’
옳음을 100% 확신했던 상황판단은 나 자신에게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무덤을 파는 격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화 하나를 소개해봅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로 향하는 기차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승무원이 승객들의 승차권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사를 할 때마다 혼잣말로 “아이고, 큰일 났네.”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승무원은 큰일 났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한 칸을 다 검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안내방송을 시작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셨습니다. 다음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차 안내방송에 의하면 이 기차는 분명히 브뤼셀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문제는 기차를 잘못 탄 것은 승객이 아닌 승무원이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모든 승객의 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고 자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승무원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빠져서 승객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확신을 하게 된 사람에게는 일말의 의심이나 회의나 반성의 여지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확신의 가장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철학자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속지 않는 자들이 헤맨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연관성 하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적 맥락을 떠나서라도 라캉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헤매는 것은 속는 사람들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속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정작 인생을 헤매는 모습은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속지 않는다는 확신은 이미 속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알고 속든지 모르고 속든지 이 속음의 문제를 완전히 배제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속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 안에만 존재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속느냐 마느냐 하는 세상의 문제를 아예 떠나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문제에 관여할 때에 속게 되고 잘못된 확신도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떠나고도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확신에 찬 상황판단의 함정”입니다. 상황판단이 함정이 되는 이유는 좋고 나쁨의 판단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상황 자체는 좋은 것도 없으며 나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판단함으로 좋고 나쁨이 끼어들게 됩니다. 이렇게 판단을 해나가는 동안 확신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본문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오병이어 사건의 앞부분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칠병이어 사건의 앞부분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2~13절을 보면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어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칠병이어의 사건을 봅니다. 15장 32~33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오병이어 때에는 제자들이 먼저 무리의 먹는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한편 칠병이어 때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무리를 먹이고자 하십니다.
오병이어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상황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식사 시간이 지나고 있었으나 무리가 모였던 곳은 빈 들이었습니다.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 넘었기 때문에 여자와 아이들까지 헤아린다면 만 명이 넘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이들이 마을과 촌으로 흩어져 먹고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만장일치로 이러한 상황판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안을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며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100% 확신했던 상황판단에 대하여 정면으로 부딪히는 의견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결과적으로만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고도 나머지를 열두 광주리에 거두었다는 놀라운 기적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혹은 오병이어의 도시락을 싸왔던 어린이가 자신이 먹지 않고 예수님께 바쳤던 헌신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의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전도여행을 다녀온 제자들의 보고가 이루어진 직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을 쉬게 하시기 위하여 한적한 벳새다라는 고을을 선택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육로를 통해 달려가서 미리 몰려와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을 통하여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뜻하신 바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몰려올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가게 하신 것도 예수님의 의도였으며, 군중들이 몰려든 것도 예수님의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에 대하여 갖고 계신 의도가 따로 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상황판단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보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상황판단을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를 가르치시며 7~8절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본문의 상황에 맞추어 바꾸어 보자면 “필요한 것에 대한 상황판단을 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이미 필요한 것을 아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해서 결론까지 내리게 된다면 확신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삶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내가 다 먹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며 문제를 느끼셨고 그것을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 문제점이란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상황을 판단하고 확신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곧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장에서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곧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받지 못한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메시아이자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합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의 특징은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주권자로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상황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황판단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스스로 고아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해가 저무는 빈 들에 모인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는 마을과 촌으로 흩어 보내어 숙식을 해결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 않을 때에는 100% 옳은 상황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문제입니다. 제자들 앞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 현존해계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판단을 확신한 만큼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되었던 셈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예로 들어봅니다. 아이들은 아무리 큰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을 직접 판단하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면 손잡고 있는 엄마 아빠의 얼굴을 관찰합니다. 엄마 아빠의 얼굴에서 변화가 발견되면 비로소 큰일이 일어났음을 깨닫습니다. 반대로 엄마 아빠의 얼굴에 변화가 없다면 별일이 아니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의 본보기입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 빈 들에 남자만 오천 명 이상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해야 될 일은 스스로 상황을 판단하고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염려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제자들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칠병이어의 사건에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은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문제로 여기시는 상황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상황을 판단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있어서 신경을 써야 하는 유일한 대상은 예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표정 외에 염두에 두고 신경을 써야 될 다른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 스스로 문제를 직면하고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건강문제를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심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건강이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신 예수님의 얼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기도하고자 애를 써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문제로 여기신다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문제로 느끼시지 않는다면 나에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상황은 엄마 아빠의 표정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에게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주어진 상황이란 좋아보여도 관심 둘 대상이 아니며 나쁘게 보여도 관심 둘 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주어진 상황에 관심을 두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확신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는 고아와 같은 이방인의 길로 빠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상황을 판단하는 습관이 체질화되면 하루에 백 번, 천 번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정작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시 예를 들어봅니다. 재정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이 나쁜 것이라는 판단이 생기자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께 이루어달라고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확신에 차서 간절히 구할수록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절대로 상황을 직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왜 이런 문제점을 보이게 되었던 것일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의 전도여행과 의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을 ‘사도’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도(使徒)는 말 그대로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냄을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와 전도여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그 보고를 들으시던 중에 사도들의 마음에 존재하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문제점은 전도여행 전에는 없었지만 전도여행 후에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능력과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귀신을 제어하며 병자들을 고치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히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일이 자신들을 통해서도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사람은 일이 뜻대로 잘 풀리기 시작하면 자아의식에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만을 바라보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전도여행을 떠나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자신들로부터 예수님과 같은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가운데 자아의식이 팽창하고 부풀어 오르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증상이 상황판단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어린아이들은 상황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더라도 엄마 아빠만 옆에 있으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이터를 만듭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면서 자아가 강해지기 시작하면 인생을 짊어지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불평하기도 하고, 유복한 환경에 있는 또래들을 질투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상황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인격적 독립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성장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부모가 아닌 하나님이시라면 독립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결코 자아의식이 팽창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혈루증 여인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음이 분명해지고, 회당장 야이로의 되살아난 딸처럼 세상에 보내졌음이 분명해졌다면 반드시 나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고 단호하게 평강 가운데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들은 맺히게 됩니다.
다만 이 열매들을 하나님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써 받아들일 때 자아의식은 팽창하게 됩니다. 이것을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주어진 상황에 대해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갖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상황판단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면 자아가 팽창되고 있는 것이고 이방인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진실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시고 보고 계시기에 절대로 상황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못 박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날마다 보냄을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보냄을 받음이 분명할 때에 능력과 권세도 따라 나타납니다. 또한 평강이 임하는 가운데 담대함과 단호함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도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열매가 자아의식을 팽창시키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오병이어 사건의 제자들처럼 상황을 판단하게 되고 확신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확신의 함정에 빠지는 일을 피하고 방지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내가 마주하는 상황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재정 문제나 건강 문제 혹은 가족 문제 같은 것들은 내가 바라보아야 할 상황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바라보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엄마가 죽으면 아이도 살 수가 없듯이, 예수님이 죽으신 그 십자가에서 우리도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만이 나에게 허락된 상황입니다. 그럴 때 실제 삶에서 주어진 모든 상황들은 하나님의 상황이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삶의 상황을 직접 대면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팽창된 자아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될 상황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뿐입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상황입니다. 그럴 때에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상황이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에 의해서 처리되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도 나는 끝없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나의 일로 여기게 된다면 자아는 팽창되어서 상황을 판단하고 확신의 함정에 빠져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러한 상황에 빠졌다면 얼른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삶에 주어진 어떤 상황도 내가 관심을 가져야 될 상황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관심을 집중해야 될 상황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언제 어디서든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오직 예수님만이 내가 관심을 쏟을 유일한 상황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삶의 상황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스스로 인생의 함정을 파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