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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해결하려 말고 탈출하라>의 줄거리:
세상은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탈출의 대상입니다. 세상과 매일 부딪히는 삶의 문제는 탈출만이 진정한 해결입니다. 세상 안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잊고 세상을 탈출하면 나도 나의 삶도 다 제자리를 잡게 됩니다.
해결하려 말고 탈출하라
(누가복음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해결하려 말고 탈출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해결하려 말고 탈출하라’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세상은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해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은 탈출해야 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로부터 탈출해야만 하는 대상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동서남북 어디를 다녀보아도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답과 해결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달려가는 바로 나입니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여기는 일들은 실제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로 여겨지는 일들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계기를 제공해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제일 큰 문제는 돈에 대한 일들을 문제로 여기고 해결하려고 하는 나입니다. 돈 문제가 발생한 이유는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계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상태를 문제로 여기며 해결하려 달려드는 내가 제일 큰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건강 문제를 계기로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탈출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세상을 살지 않고서는 세상을 탈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를 제공하시고자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장관이 되어야 한다, 판검사가 되어야 한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 부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자꾸만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언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말은 다 소용없는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살지 않는 천사들은 세상을 탈출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만이 세상을 탈출할 기회를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는 자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변화산 사건과 세상 탈출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비하여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경향이 특히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30~31절을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중에 나타나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만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 또한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다는 말은 빛이 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빛을 내는 발광체와 같은 모습으로 그 인격을 드러내고 계셨고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깊이 졸다가 깨어나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모습 자체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 분이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가에 대해서는 누가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절 하반부를 보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요약해보자면 발광체와 같은 세 분의 인격체가 모여서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십자가 수난사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십자가 사건을 ‘별세(別世)’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참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별세는 세상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다만 누가는 단순히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 사건을 별세라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별세라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엑소돈(ἔξοδον)으로써 탈출이라는 뜻을 가진 엑소도스(ἔξοδος)에서 비롯된 품사입니다. 아시다시피 엑소도스는 출애굽을 의미하는 단어로써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탈출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본문에 적용하여 다시 해석해 보자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엑소도스는 에크(ἔξ)와 호도스(οδος)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안에서 바깥을 향하는 방향성을 지시하는 접두어이고 호도스는 길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즉, 안에서 바깥으로 길을 따라 나가는 모습을 탈출이라 여긴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 성경으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엑소도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본문에 적용해보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관점에서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십자가 사건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실 사건으로 여기며 의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출애굽이 250만 명의 선민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왔던 대탈출이었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세상으로부터의 대탈출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선민들이란 곧 출애굽을 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신약성경에서의 선민이란 그 의미가 더 넓어져 세상을 탈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출세상한 사람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죄 사함이라는 한 마디로만 이해한다면 세상에 대한 탈출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을 탈출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선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알아야 합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좋아하여 접촉하고 세상이 스며들어온 상태입니다. 죄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죄악입니다. 자녀라는 세상의 대상을 좋아하여 마음이 밀착하게 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밀착한 마음은 마음을 지배하게 되고 이것이 죄에 찌든 상태입니다.
이러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전히 세상과 접촉해있고 간장에 찌든 장아찌처럼 세상에 찌들어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죄 사함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취직 문제, 승진 문제 등을 비롯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에 찌든 상태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어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죄 사함의 사건인 이유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엑소도스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으로 탈출하기 때문에 죄도 사함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이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지도자들에 의해 버려진다는 것은 세상 바깥으로 쫓겨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십니다. 이 과정이 바로 그리스도의 코스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대답에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이러한 코스를 만드는 자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코스는 바로 세상을 탈출하는 코스입니다. 세상에서 버려지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선민들이 홍해를 건너 완전히 출애굽하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세상을 탈출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문제로 삼고 과제로 삼는 한 복음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선민도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문제로 삼았다는 것은 마음이 여전히 세상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이며,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어서 찌들어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결코 세상을 탈출한 것이 아니기에 선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착각일 뿐입니다. 죄 사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본 적도 없고 배워 본 적도 없기에 이러한 착각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단순히 십계명에 나오는 계율들을 어기는 것만을 죄라고 여겼기에 이러한 착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은 죄를 구성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세상에 찌든 마음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입니다. 십계명에 언급된 죄들은 죄의 열매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증상이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여 밀착하고 그 결과 세상 기운이 들어온 상태가 죄악이고 더러움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 문제가 생겨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에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죄 사함과 복음과 교인이자 선민임도 무효가 됩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돈 문제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십자가 사건을 탈출 즉 엑소도스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탈출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세상 탈출 사건으로 이해할 때에 죄 사함의 의미 또한 더욱 명확하고 분명해집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죽으면 별세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굳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 탈출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살다가 죽어도 결국 세상을 탈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육체가 죽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육체가 죽어서 더는 세상에 관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세상 탈출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의 의미는 오히려 세상 탈출의 기회가 끝나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한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지옥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세상 탈출 사건인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탈출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부인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에 접촉하고 세상이 스며든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용납하거나 묵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채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나는 돈 문제에 사로잡힌 이대로 살면 안 되는 존재이다.”라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 자기부인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여기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탈출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부인도 하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도 지지 못한 채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단지 세상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죽어버린 것입니다. 더는 세상을 탈출할 여지가 없기에 지옥과 연결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기 전에 이 길을 따라갈 때 천국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시한부 인생이 끝나기 전에 이 길을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 세상은 세상을 좋아하여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죄악 된 세상입니다. 이 죄악 된 인간 세상은 지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탈출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하여 하늘과 연결된 탈출로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시한부 인생이 끝나기 전에 예수님이라는 탈출구를 통하여 하늘로 통하는 탈출로로 진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천국으로 가는 세상 탈출을 시도하지 못한다면 육체의 죽음은 탈출 기회의 상실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 탈출이 아니며 별세도 아닙니다. 세상에 이어진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별세라는 말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누구나 별세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죽어서 별세의 기회를 놓치고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만들어 놓으신 엑소도스 즉 별세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세상과 접촉한 마음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기부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자기부인을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을 인정하는 자기 십자가 지기가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여전히 육체가 살아있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삶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이렇게 엑소도스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서는 예수님과 같은 기도가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한다는 것은 주기도문을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십자가로 탈출한 사람들의 기도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는 기도가 됩니다.
세상을 탈출했으니 하나님 외에는 마음을 둘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탈출하여 비게 된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이고자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엑소도스 한 사람들이 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셨듯이 우리의 마음 또한 하나님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도란 이렇게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 위하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꼭 눈 감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모든 행위가 기도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탈출한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하나님으로 충만하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삶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문제가 스며들어 와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자기부인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할 때에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소원하던 양만큼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도의 삶이자 기도의 자세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족함을 느꼈던 일들을 해결하여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탈출하여 그만큼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할 수 없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자기부인을 한 사람들이 죽는 자리이며,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엑소도스의 사건입니다. 죄 사함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 뒤에 숨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과연 세상을 탈출했는가를 확인하며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하셨듯이 우리의 인격 또한 변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예수님의 몸과 옷까지도 뚫고 나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된 사건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광경은 예수님께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언제나 하나님으로 충만하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들의 눈에 가려져 있었고 변화산 사건을 통해 제자들에게 특별히 보여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영광은 공생애를 통하여 이미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이라는 인격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인간의 육체를 입고 활동하셨던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빛을 발하고 계시는 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변화산의 사건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빛을 발하는 그 상태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몸소 깨닫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고 황홀해져서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한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그리스도의 코스를 따라갈 때에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코스 따르기는 너무나도 쉽고 가볍고 좋은 일입니다. 내가 나를 감시할 수 있으면 됩니다. 세상과 접촉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면 이런 나는 안 된다고 여기며 자기부인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내가 나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와 접촉하는 동안 마음에 문제가 스며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세상을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비상벨 소리입니다. 삶에서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가 이제 세상을 탈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탈출을 위해서는 먼저 세상과 밀착하고 세상이 스며들어서 장아찌가 되어버린 나의 마음이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나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함께 죽었음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인정할 때에 부활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활한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을 향하여 소원을 발동하던 만큼의 에너지를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탈출 삼인방을 꼽으라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꼽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으로부터 선민 250만 명을 이끌고 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야로 들어가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다만 모세가 탈출한 대상은 애굽이라는 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광야는 인간 세상이 성립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없는 곳입니다.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으며 풀이 있어야 가축도 기를 수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결여된 광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존재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광야는 인간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모세는 자기뿐만 아니라 250만 명을 세상으로부터 탈출시켜서 선민을 선민답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전형적인 그리스도의 예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복지 안에서 세상 탈출을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지는 물이 많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지라는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에 모든 선민들이 타락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부자가 되고자 안달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번영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세상을 탈출한 사람으로서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살아있는 동안에 불말이 이끄는 불수레를 타고 세상을 탈출하여 홀연히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존재는 우리의 뇌리에 남겨져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인으로써의 생각과 잔재를 씻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에서 잘살아보겠다는 시도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을 탈출하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실질적으로 어떤 방식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황홀감에 빠져 그 자리에 초막을 짓고 살아가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음성이 내려옵니다. 35절을 보면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시고 세상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오직 세상을 탈출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만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서야 세상을 까마득하게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런 정도의 대상입니다. 돈이 없는 것이 문제라지만 돈이 있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해서 문제라지만 건강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벌리든 안 벌리든 그것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그것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세상을 떠날 계기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자녀가 말을 듣든지 안 듣든지 형통하든지 불통하든지 자녀의 문제를 계기로 세상을 떠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세상을 탈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 내가 행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제 그대로 따라서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잘되는 것도 못되는 것도 없으며 성공이나 번영이나 실패도 없습니다. 세상은 무조건 탈출해야 하는 곳입니다. 이제까지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사셨다고 생각하시고 안주하신다면 세상 탈출 기회를 놓치고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24~25절에서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탈출해야 될 세상에서 부요하고 배부르다고 웃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잘 사는 곳이 아니라 탈출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와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코스는 탈출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엑소도스의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는 자는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입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복지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과 접하는 나를 끝없이 감시하게 하시고 자기부인을 통하여 십자가를 붙잡게 하시고 탈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