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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_태승철 (누가복음 9:46~4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12|조회수53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의 줄거리:

북한이 쳐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국군이나 미군 때문이 아니라 중2생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었습니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적대적이기까지 한 중2생을 부모나 선생님들이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북한 군도 벌벌떠는 중2생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난, 그래서 예수님 믿어봐야 전혀 소용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

(누가복음 9:46~48)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

제목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예수님보다 더 나을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농담으로 하는 말 중에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국군이나 주한 미군 때문이 아니라 중2생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한 중2생을 그만큼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이러한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믿음 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는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게 되고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대체 어떤 것인지를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이후로는 여러분이나 저에게 이러한 일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 간에 누가 큰가를 두고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다윗 왕국을 재현하시는 임금님의 자리에 등극하시리라 믿었습니다. 그 때 자신들은 예수님을 보필하는 신하가 될 터인데 과연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가를 두고 다투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간질병 소년을 고치셨습니다. 43절을 보면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꼈던 것입니다. 간질병 소년을 고치지 못해 위축되어 있었던 제자들 또한 이러한 광경을 보며 다시 의기양양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의기양양하게 변하는 제자들의 태도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4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넘겨지고 예루살렘 성 바깥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고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깨닫는 것도 두려워하여 말씀의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제자들의 무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제자들 간의 변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거듭 예고하신 수난의 의미는 마치 모세의 출애굽과 같은 출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에 대해 무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하신 일은 출세상을 위한 입구와 통로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일어나는 과정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갖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두고 서로 변론하였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서 얼마나 출세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코스를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태를 앞선 41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마음상태는 이러한 지적을 들은 후에도 조금도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다 쏟아야 하는 실질적 가치의 세계가 이 세상 바깥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늘과 그곳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마음을 다 쏟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고 패역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패역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스트래포(διαστρέφω)는 이유가 있어서 방향을 돌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상을 빠져나가야 할 사람들이 이유가 있어서 세상에 머물고 있습니다. 자녀가 좋아서, 돈 버는 일이 재미있어서, 이런저런 오락거리가 좋아서 마음이 세상에 묶인 채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패역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정리해보면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에 진짜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십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왜 예수님 곁에 서야 하는지 영문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적으로는 어린아이가 예수님 곁에 섰기에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도 함께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본문에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기술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는 것에 대한 교훈을 낮춤에 집중하여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은 마태와는 사뭇 다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각도로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48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자기를 낮추라고 한다면 이해가 분명할 텐데 본문 말씀은 다소 이해가 어렵습니다.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것인지 관계성이 불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이를 반대로 풀어보자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당시의 사회적 기준으로 볼 때 아이는 온전한 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감과 효용성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넘어져 울고 있으면 일으켜 세워줄 수는 있겠지만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말은 사회통념상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셨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접은 마음에 기쁨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생각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은 간질병 소년을 고치시는 기적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놀라운 반응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광경을 보며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꿈같이 여겼던 일들이 실현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고 자신들은 신하가 되는 광경을 꿈꾸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광풍노도를 잠잠케 하신 기적, 군대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 지혜와 권세를 보며 제자들의 확신은 더욱 견고해져 갔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신 어린아이는 이러한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는 무관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의 여성과 아이는 사회적으로는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성인 여성은 가정 일을 책임지는 사회적 효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어린아이는 그 부모에게는 소중할지언정 사회적으로는 아무런 효용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어린아이의 특성을 염두에 두자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두고 변론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시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탈출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세상에서 출세할 궁리를 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어린아이와 동일시하십니다. 세상에서 잘되고 싶어서 예수님을 영접하려는 시도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지혜와 권세를 보이시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으로 영접하는 예수님은 7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이 무용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를 위해 7세 이하의 어린아이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힘은 출세에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의 출세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중2생이 예수님보다 난 경우”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을 탈출하고자 믿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7세 이하의 어린아이만큼의 효용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머무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대신에 근처 중학교에 다니는 2학년 학생을 믿는 편이 낫습니다. 중2생에게 간구하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잘 풀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렴 7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같으신 예수님보다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더 능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코미디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과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고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한 적도 없습니다. 세상에 묶이지 않고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인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머물러 사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머물러 있을 바에는 7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예수님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세상에 머무르고 싶고 세상을 탈출할 생각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예수님은 어린아이만큼 무용하십니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는 지나가는 중2생을 붙잡고 구세주라 부르며 절하고 헌금을 내면서 도와달라고 하는 편이 유익할 것입니다. 이 진실이 기독교이고 그리스도교이고 복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보이신 탁월한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한 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셨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은 바로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통로를 만드시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세상 탈출로를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임을 자청한다면 이 탈출로를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남아서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7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과 지혜와 권세를 한 방울도 세상의 일들을 위해서 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나의 꿈과 소망과 욕망을 위해서는 예수님은 존재감 제로, 능력 제로, 지혜 제로, 권세 제로인 분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탈출하고자 마음먹은 자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능력자이시며 지혜자이시고 권세자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의 차원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세상에서 위대하다 추앙받는 성인이나 철학자나 지도자나 부자들 누구에게도 이러한 능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엉뚱한 일들을 위하여 예수님을 붙잡고 믿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자들을 모으신 후에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조금도 세상에 미련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하늘을 놔두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 탈출구를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 하늘이 그렇게 좋은 곳인가요?”라고 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이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33년 고생만 하시다가 부활하신 뒤에 뭐가 그리 급하셔서 쏜살같이 하늘로 올라가버리셨을까요? 나의 몸은 비록 세상에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좋아하셔서 뒤도 안 돌아보시고 올라가신 아버지의 집에 나의 마음도 늘 가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관찰은 고사하고 본문의 제자들처럼 주관적 욕망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해서 잘 되어보겠다며 믿음 없음과 패역함의 진수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마음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을 영접해보아도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이 무용하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욕망과 소원과 바람과 연관 지어서는 예수님께서는 7세 이하의 어린아이와 같으십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나무라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커질 수 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장 기뻐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든 사람을 가장 큰 자로 여기십니다.

세상에서 크게 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은 무용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크게 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세상에서 무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세상을 탈출할 준비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탈출할 사람에게 세상에서의 효용성이나 존재감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8장 4절의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는 말씀의 의미와 상통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가 세상을 탈출하기에 가장 유리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아지고 가장 작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게 보십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은 세상 욕망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으시기에 아무 소용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소용이 없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세상을 떠날 준비를 위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서 낮아지고 작아지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대해 존재감 제로, 효용성 제로의 사람이 될 때에 하늘에 대해서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욕망을 가지고 아직도 세상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라리 중학교 2학년 학생을 믿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세상 욕망과 소원에 대해서는 7세 이하의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로 하늘로 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면 세상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낮아지시고 작아지셨던 무능한 예수님을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 어린 아이처럼 존재감 제로, 효용성 제로의 사람이 될 때에 하늘에서는 크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작아지고 세상을 떠나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어떤 존재감도 가질 수 없으며 어떤 사회적 효용성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 자리에 머무는 사람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 자리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최적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장 크게 보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세상에 소원이 있으면 차라리 중학교 2학년 학생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세상에 대해서 나를 어린 아이로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고 싶으시다면 예수님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끌어 가실 십자가의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임과 동시에 세상 탈출을 위한 가장 유리한 고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몸에 붙어있는 사지백체처럼 나의 마음이 예수님을 끌어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자리인 십자가를 놓지 않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세상 탈출을 위한 가장 유리한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무나도 큰 자로 여겨지는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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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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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수연 | 작성시간 20.11.12 매일 녹취록을 올리시기도 만만치 않으실텐데
    너무 고맙습니다
    유튜브 설교 들은후에 녹취록을 읽으며 또 저의 기도재료를 만듭니다 자기전에 다시한번
    녹취록을 읽고 잠듭니다 저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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