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2

녹취문: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_태승철 (누가복음9:49~5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13|조회수6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의 줄거리: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를 따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 이름은 그 자체가 부르기 위한 용도로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예수 이름을 왜 부르고 언제 부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기에 '용도'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떠올린 것입니다. 진정한 용도로 사용하는 예수 이름.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

본문은 두 절 밖에는 되지 않지만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두 번에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49절의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에 주력하고자 합니다. 제목의 ‘예수 이름의 진정한 용도’를 달리 말하자면 ‘나도 예수 이름으로 귀신 내쫓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이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라고 하였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은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를 가진 적은 없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익명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아홉 명의 제자가 간질병 소년에게서 귀신을 내쫓지 못했던 사건을 떠올리자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부재하신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귀신을 내쫓고자 시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쫓았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예수 이름과 귀신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어떻게 귀신을 쫓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께서는 귀신을 쫓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예수 이름 없이는 귀신을 쫓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예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다소 막막하고 황당하실 수 있습니다. 이름은 부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문제는 어떤 용도로 부를 것이냐에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셨습니다.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부르기 위한 이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복이자 큰 은혜입니다. 예수 이름만 있으면 다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 이름 하나만 있으면 다 가진 것입니다. 단 용도를 제대로 알고 부를 때에 비로소 예수 이름은 복이자 은혜일 수 있습니다. 다 가지게 하는 이 복과 은혜가 정말 대단하기에 저는 여러분에게 “예수 이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라고 24시간 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용도는 당연히 예수님의 역할이신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세주 즉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출애굽처럼 출세상을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점을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죄악이라는 교리적 개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은 감기에 걸리면 콧물이 나는 것처럼 죄악의 결과이자 증상일 뿐입니다. 죄악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접촉하여 세상이 들어와서 중독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신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나의 마음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 이름의 용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은 100% 세상 탈출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 이름은 세상 탈출 전용입니다.

몸이 죽는 것을 별세라고 합니다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31절에서 별세라 번역된 말은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탈출을 의미합니다. 단지 몸이 죽는 것은 오히려 세상을 탈출할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갈 기회를 놓쳤기에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일을 걱정하여 탈출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세상을 탈출할 때에 삶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게 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상일은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넘어간 것이기에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상일에 개입할 여지는 제로입니다.

예수 이름에 용도가 있듯이 세상일에도 용도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직장의 문제 혹은 건강이나 돈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세상의 일이라면 나의 개입을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빠짐없이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도를 무시하고 내가 개입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악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이름은 반드시 세상 탈출을 위해서 불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을 용도에 맞게 부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용도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서 제자들이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툼이 벌어진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을 보시고 48절에서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라는 용도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7세 이하의 어린 아이와 같이 무용하다는 뜻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에 이방인의 기도를 경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7~8절을 보면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고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세상일은 단 하나도 내가 책임질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절대로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장갑삼아 움직이시는 상황에서도 나의 육체적 수고와 움직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는 주체가 되어 계시기에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내 일이라는 발상 자체가 거짓임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세상 탈출 전용이신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를 말리지 않으셨다는 것은 이 일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납니다. 예수 이름은 세상 탈출 전용인데 귀신은 왜 쫓겨나가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귀신은 왜 그냥 나가라고 해서는 쫓을 수 없을까요? 또 어째서 우리는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귀신을 쫓아본 적이 없을까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는 이유와 그냥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 이유는 귀신이 하는 일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귀신은 세상에 살고 있는 75억 명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또 귀신 내쫓기는 한 번 내쫓았다고 해서 그로써 끝나는 일회성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장 43~45절에서 한 번 쫓겨나갔던 귀신이 돌아와 보니 깨끗하게 청소되었으나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못한 마음을 보고 일곱 귀신을 데려와 더 악한 상황이 되었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곧 날마다 귀신을 내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귀신이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귀신은 사람의 마음이 세상 바깥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갈 수 없도록 모든 역량을 기울이는 존재입니다. 귀신의 소원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기 위해 세상을 탈출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만을 실제로 느끼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있다고 믿기에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굉장히 섭섭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귀신의 역사입니다. 귀신이 우리의 마음을 속이고 세상을 향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귀신에게 장악된 증거는 세상을 확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세상 바깥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육체의 감각으로 느끼는 세상에만 현실감을 가집니다.

귀신은 이와 관련하여 심지어 영의 세계조차도 세상에 종속되게 만들고자 합니다. 토속신앙에서 조상의 무덤을 잘 써야 후손이 잘된다고 믿는 것, 제사를 잘 드려야 한다고 믿는 것, 장독대에도 귀신이 있고 뒷간에도 귀신이 있다고 믿는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에는 육백만 귀신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귀신들의 최고이자 최대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땅에 붙여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운데 절대자나 초월자나 영의 세계까지도 세상에 귀속시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드린 대로 세상 탈출을 목적하기 때문에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방향성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과 사탄의 사슬을 끊고 세상을 탈출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역할을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예수 이름으로만 세상에 마음을 묶어두려는 귀신의 역사를 제어할 수 있고,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이름의 능력이자 용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을 뿐 “세상에서 형통과 번영하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세상 밖으로 탈출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을 통하여 제시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라는 믿음에 마음이 물들고 중독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죄악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곧 죄악으로부터의 탈출이 됩니다. 죄악이라는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개념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할 때에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죄악에 대한 개념이 분명치 않기에 실질적으로 구원을 받은 표시 또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기준으로 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인도 하지 않고 도둑질도 하지 않고 간음도 하지 않으며 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거짓말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정도가 십계명에 걸릴 내용이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잘 지켰다고 죄악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마음을 자녀와 접촉시킬 때에 마음에는 자녀가 스며들어와 이윽고 중독되게 됩니다. 이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모습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자녀 또한 세상입니다. 아무리 십계명을 지켜도 마음이 세상에 물들고 중독되었으니 죄악이 발생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잘못이라는 개념에 국한시키지 말고 죄는 곧 세상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기에 담긴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과 둘째 그리스도의 역할이란 사람의 마음을 세상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탈출로를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귀신의 역할을 아는 것입니다. 귀신의 역할을 안다면 귀신을 쫓는 것은 공기를 마시고 물을 마시듯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일입니다. 귀신 쫓기는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신을 쫓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늘 귀신을 쫓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이 날마다 말씀을 전하는 목적도 바로 귀신 쫓기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땅에 묶어두고 있는 귀신의 역사를 훼파하기 위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기입니다.

귀신 역사의 증거는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사건이나 일에서 마음을 떼려야 뗄 수 없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세상의 일들이 너무나도 급박하고 중요한 문제로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신의 속임수이자 역사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등지고 책임감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음을 하늘로 보낸다고 해서 관련된 세상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머물고 있으면 충분합니다.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idea)대로 삶의 모든 문제는 이끌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낫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할 자신이 없다면 가능한 빨리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세상의 상황이 긴박할수록 절실할수록 소중하게 느껴질수록 예수 이름을 붙잡고 세상과의 묶임을 끊고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도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한다면 등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것이고 나의 마음에 담고 뜻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안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이삭이었습니다. 여러분께도 이삭처럼 소중한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음으로 꽉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는 가장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부모에게는 자녀가 그러한 대상일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돈이 그러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재정문제를 꽉 붙잡을 때에 재정 문제 또한 가장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자녀든 돈이든 건강이든 취직이든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가장 안전하고 최선의 상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뜻에 맡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셨다면 예수 이름을 붙잡고 빨리 세상을 탈출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 문제에 붙잡혀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귀신의 역사입니다. 나의 마음을 세상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귀신의 역사를 끊어버리고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로부터 나오는 뜻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문제를 넘기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야말로 난센스이자 바보짓입니다.

 

본문에서 익명의 제자는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아내는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완성하신 때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통로가 만들어지기 이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몸으로 함께 하던 제자들조차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제자들 중에는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과 몸으로 함께한다는 것이 절대적 소속의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몸으로 함께하지 않았던 이 익명의 제자는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바로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임금 되셨을 때를 상정하고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과 권세를 보이신 것은 예수님의 임의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오셔서 행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면서 행하시는 능력과 권세와 지혜를 접하면서도 세상에서의 출세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제자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현존하시며 능력과 권세를 행하고 계심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힘은 세상 밖의 세계를 염두에 둔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 밖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귀신의 역사를 알 수도 없습니다. 그저 세상을 전부인 줄로 알고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세간에 “죽는 놈만 불쌍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몸이 죽는 것은 불쌍한 일이 아닙니다. 살아있으면서 마음이 땅에 묶여있는 것이야말로 불쌍한 일입니다. 몸이 죽기 전까지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본 적이 없다면 그보다 불쌍한 일이 없기는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기에 몸이 죽는 것을 제일 큰 불행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신의 역사에 중독되어 세상 바깥의 세계를 전혀 알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에 세상을 담는 것이 귀신의 역사임을 알아챌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도달할 진짜 최고의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익명의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나는 역사를 보면서 그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 안에서 높은 자리로 가려는 마음에 사로잡혀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귀신을 쫓을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 통로를 완성하신 뒤에야 비로소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제자는 예수님의 권능과 능력과 지혜를 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익명의 제자에게는 예수 이름이 곧 세상을 탈출하는 티켓이었고, 제자들에게 예수 이름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로 갈 수 있는 티켓으로 여겼습니다.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 세상 안으로 들어와 계시는 장소가 바로 예수 이름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 이름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함을 통해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익명의 제자는 이렇게 마음을 세상 안에 묶어두려고 하는 귀신의 역사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급소를 찌르듯이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을 실제라 느끼십니까? 세상에 좋은 것이 다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다 귀신의 역사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이 귀신의 역사를 끊어내고 세상을 탈출하여 진짜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져 가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일단 예수 이름을 부르게 되셨다면 마음 또한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탈출할 마음이 없이 이 세상일에 마음이 묶인 채로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마귀에게 동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가질 기회를 잃는 것이고 이 세상일이 하나님의 뜻에 이끌릴 기회를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합니다.

예수 이름을 불렀다면 제자들처럼 세상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제자처럼 세상을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세상을 탈출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탈출로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접촉하여 물들고 중독된 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나, 묵인할 수 없는 나, 괘씸한 나, 천하의 못 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자기부인을 합니다. 이러한 나를 처리하는 방법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함으로써 예수 이름을 제대로 된 용도로 활용하며 날마다 세상을 탈출하고, 세상일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맡겨지는 놀라운 삶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예수 이름 하나만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앞에서도 예수 이름을 부르며 세상으로부터 탈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가 막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