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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땅 소속감은 찌꺼기도 없애자>의 줄거리:
땅에서 가지게 되는 소속감이 다양합니다. 가족, 학교 회사 동호회 등 각종 단체, 그리고 나라 민족, 종교 등등.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지역 예배당 조직의 소속감은 참으로 강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땅의 소속감 중에서 어느 하나의 찌꺼기라도 여전히 내 마음과 의식에 남아 있다면 아직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땅 소속감은 찌꺼기도 없애자
(누가복음 9:49~50)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땅 소속감은 찌꺼기도 없애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땅 소속감은 찌꺼기도 없애자’
제목은 땅에 있는 소속감은 찌꺼기조차 말소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땅에 있는 조직이나 조건에 관계된 소속감이라면 깔끔하게 말소되어야만 합니다. 가족이나 나라는 땅에 있는 소속감의 대표적인 조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설령 가족이나 나라에 대한 소속감일지라도 말소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도 아닙니다. 가정으로 보냄 받은 사람이며 대한민국으로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땅에 대한 소속감의 말소는 교리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제가 요즘 들어 점점 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성도님들에게 기회만 있으면 말씀드리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전에는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않았지만 요새는 “지금 소속되어 있는 예배당 조직으로부터 나오세요.”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소속감을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소속감을 두는 한 믿음은 온전히 완성될 수 없으며 구원 또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배당은 지역에 사는 성도들의 십자가 생활화를 돕는 지원센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예배당에 소속감을 느끼게 하고 예배당 안으로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목회정신은 오히려 구원의 가장 강력한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소속감의 문제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택하였다는 말씀이 본문과 연관되어 중요합니다. 택하셨다는 것은 곧 세상 안에서 세상 밖으로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택함 받음으로써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소속의 조건도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심지어 가정이나 예배당이나 나라와 민족과 직장에 대해서조차 소속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불려내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5~16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함 즉 세상에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에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따른다면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9절의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은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가정에 소속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 속한 남편이나 아내의 신분, 부모라는 소속감에서 비롯되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악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고, 왜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요한의 보고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중에서 49절의 하반부를 보면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 이 말을 전한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다른 제자들도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알고 있었고 한마음으로 동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대표로 나서서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제자들의 영역표시가 강력하게 일어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특권의식으로써의 배타적 소속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되었고 이것을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배타적인 소속감이 발동되어 그 사람의 활동을 금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재미있는 점은 제자들의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에는 누가 큰 자리를 차지할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무리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자 일치단결하여 압력을 가합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민의식이 제자들에게는 특권의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속감의 조건이란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동고동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에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 말에는 더 세속적인 속셈이 담겨져 있습니다. 앞서 제자들은 누가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 예수님과 함께하지도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로서는 강력한 라이벌이 생긴 셈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눈에 띄어서 제자 무리에 영입된다면 장관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될 강력한 후보가 생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싫었기에 그 사람의 활동을 금하였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께 전한 요한은 요한복음의 저자입니다. 요한은 생각이 세밀한 사람이었기에 다른 제자들과 같이 행동을 하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특권의식을 자극하였기에 활동을 금하게 하였으나 그런 중에 요한은 내심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저 사람보다 나은 것일까? 낫다면 어떤 면에서 나은 것일까? 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음에도 귀신을 내쫓았으니 저 사람이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불안을 떨쳐내고자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그 사람보다 나음을 확인받고 싶었고 이 사건을 전하는 대표로 나섰던 것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자신들이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소속감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동고동락하는 것으로부터 소속감을 찾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았지만 귀신을 내쫓았던 사람보다 나은 점임을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우리 제자들이 비록 귀신은 못 쫓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으니 최고 맞지요?”라는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더 나으니 나중에 장관자리 하나씩 챙겨주실 만도 하고, 멋대로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은 저 사람의 행동은 금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50절에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반대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카타(κατά)로써 “~에 대항하다(against)”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음주 운전자가 반대편 차선에서 넘어와 충돌할 뻔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항하는 상황으로써의 카타(κατά)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예수님의 의도에 맞추어 적용해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올 자들임을 아셨습니다.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치 않았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앞날을 전제하시고 본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방향에 대항하는 일이 아니라면 돕는 자이고 동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속감의 기준을 방향으로 정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앞서 살펴보았던 요한복음 17장 15~16절에서도 발견됩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을 사람들의 마음의 방향이 하늘로 유지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방향이 곧 소속감의 문제이기에 이는 곧 세상에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단체든 소속감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방향이 하늘을 향하기 위해서는 땅을 향한 소속감은 말소되어야만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함까지도 소속감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보다 더 정당하고 강력하게 여겨질 소속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조차도 소속감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제자라는 소속감을 바탕으로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라고 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자신들과 같이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지 않음을 이유로 같은 소속이 아니라고 여겨 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다르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조차 육신을 통해 일어나는 땅의 일이기에 소속감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땅에 있는 것인 한 무엇에 대해서도 소속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그 대상은 가정으로부터 시작해 나라와 민족과 직장이나 단체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예배당 조직이나 목회 현장까지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몸으로 함께하던 소속감조차 거부되어야 할 것이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될 땅의 소속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조건으로부터 소속감을 찾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땅에 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하늘로 향하는 방향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방향성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속감의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귀신을 쫓아낸 이 사람은 예수님 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현존하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한 결과 귀신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탐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심을 보고 있었기에,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 귀신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방향성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안에 계신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곧 이 사람의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간 마음이 이제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서 귀신을 쫓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늘을 향하는 방향성이 소속감의 기준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배당에 강한 소속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물며 살아계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던 제자들의 소속감이란 이와 비교될 수 없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소속감을 거부하십니다. 실제로 이러한 땅의 소속감이 거짓된 소속감이라는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을 통하여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의 소속감조차 잘못되었을진대 하물며 우리가 예배당이나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이 옳을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확신을 가지고 예배당에 대한 소속감을 버리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땅에 존재하기에 예배당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온전해질 수 없으며 구원 또한 주어질 수 없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특징은 소속감을 구원의 확신으로 둔갑시킨다는 것입니다. 성수주일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예배당 조직에 소속되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소속감을 구원으로 느끼게 하고자 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역사를 되풀이해왔고 장단을 맞춰주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생애 때에 육체를 입고 살아계시던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던 제자들의 소속감조차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소속감은 땅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그리스도 통로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향하는 방향성만이 우리의 소속감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유일한 소속감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잘못된 소속감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땅을 탈출해야 될 사람들이 땅에서 높은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중에서 요한은 이러한 땅에 대한 소속감을 정당화하고자 예수님께 동의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소속감이 전혀 정당하지 않음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육체적 소속감은 진짜 소속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소속감은 깨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육체적 소속감의 거짓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룟 유다를 제자로 끌어들이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의 육체적 동행조차 소속감의 근거가 될 수 없는데 기독교나 예배당은 어떠한 소속감의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강력하게 붙잡든 은근히 붙잡든 습관적으로 붙잡든 무의식적으로 붙잡든 지역의 예배당 조직을 붙잡고 소속감을 갖고 있는 한 믿음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당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센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권고 드리는 바입니다. 이제까지와 같은 정신으로 유지되는 예배당 조직은 오히려 사람들을 구원의 반열에서 탈퇴시키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드는 변태적 영성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속감은 반드시 땅을 떠나 하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속한 예배당 조직에 소속감을 느끼며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면 변태적 영성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의 소속감만 필요합니다.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로 가야만 한다는 방향성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소속감의 근거입니다. 하늘로 방향을 결정지은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선민이며 예수님의 제자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점에 루터와 츠빙글리와 캘빈의 사상은 신학적 세부사항에서 이견을 보임으로써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충돌로 인하여 천주교로부터 독립하자마자 개신교는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교리적 충돌은 계속해서 발생하였고 이제는 세상에 몇이나 되는 개신교 교단이 존재하는지 셀 수도 없게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천주교가 하나로 유지되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츠빙글리와 캘빈이 신학적 세부사항에서 이견을 보였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소속감에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기로는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가야한다는 방향성 하나를 붙잡고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개신교는 분열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신학적 세부사항에서 이견을 좁힐 수 없었더라도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야만 한다는 대전제를 통하여 연합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사상적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하늘로 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일상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연합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루터와 츠빙글리와 캘빈의 사상 속에서 이러한 공통점은 분명히 발견됩니다. 다만 후대에서 이들의 사소한 사상적 차이점을 관심사로 삼게 되면서 갈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사람은 루터도 츠빙글리도 캘빈도 아닌 예수님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 따라가기는 마음이 삶의 현장에서 탈출하여 하늘을 향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세상에서 하늘로 향하는 방향성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게 길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의식 안에서 주님의 버림받으심을 받아들여서 세상에 물들고 세상에 속한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부인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캘빈도 예배당도 기독교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만든 기독교 교리나 예배당 조직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으며 세상에서 버림받고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를 수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로 향하는 발걸음이 존재할 때에 교회의 의미도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먼저 있고 교회가 구원을 전매특허로 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소속이 될 때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의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보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에 대해 자녀에 대해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직장에서 직원으로 보냄 받아 살아가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냄 받아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필요치 않습니다.
다원주의의 골자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땅에 있는 소속감은 찌꺼기까지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땅에 있는 대상에 대해 소속감을 갖게 되었다면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점차적으로라도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자기부인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가는 방향성만을 유일한 소속감의 근거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하늘을 향하는 방향을 취한다면 피부색이 다르고 사회적 신분이 다르고 지식의 유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의 소속입니다. 소속감을 위해서는 땅을 탈출하여 하늘을 향하는 방향 하나만을 확인할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땅에 속한 소속감의 찌꺼기조차 완전히 말소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 방향에 나의 소속감을 두게 하시고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 있든 보냄 받은 자라는 의식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과 권세로만 이 세상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