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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지상 교회는 하늘 동호회_태승철 (누가복음 9:51~5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16|조회수64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상교회는 하늘 동호회>의 줄거리: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 여정의 최종목표를 십자가 수난 대신 승천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버림당하고 죽임당하시는 사건도 별세, 즉 세상 탈출이라 하였습니다.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교회는 승천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는 무리를 가리킵니다. 승천하여 하늘 위를 산책하는 자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지상 교회는 하늘 동호회

(누가복음 9:51~56)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지상 교회는 하늘 동호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지상 교회는 하늘 동호회’

동호회란 “같은 취미를 가지고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순교와 함께 해온 교회와 동호회를 비교하는 것은 어렵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비교해보자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취미(趣味)라는 단어입니다. 사전에서 취미를 찾아보면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취미는 즐기기 위함임은 틀림없으나 전문적일 수도 있습니다. 취미에 따라서는 돈을 써가면서 전문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취미란 반드시 즐기기 위한 가벼운 활동을 의미하지는 아닙니다. 즐기는 상태는 가볍지만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 못지않게, 즐기기 위해 돈을 쓰고 전문적으로 취미에 가담하는 사람의 마음은 진지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즐기기 위해 아까운 줄 모르고 돈을 씁니다. 이러한 현실을 염두에 두자면 직업이 돈을 벌기 위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취미는 돈을 쓰기 위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사랑하기를 직업이자 취미로 삼으라는 의미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즐기고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전문적으로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취미는 일견 너무나 약해보이는 단어를 재해석하여 이용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지상 교회는 하늘 동호회”라고 정했습니다. 동호회는 영어로 소사이어티(Society)나 클럽(Club)이라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취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교회도 소사이어티이며 클럽입니다. 이 땅에 있는 어떤 것도 다 버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즐기고 기쁨을 얻기 위해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교회를 하늘 동호회라고 이름 붙여보았습니다. 하늘에서 기쁨을 얻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본문을 보면 참 특이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을 이미 여러 차례 살펴본 바 있습니다.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승천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날렙시스(ἀνάληψις)의 어원은 아날람바노(ἀναλαμβάνω)라는 합성어입니다. 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을 잡아서 끌어올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즉 날개 짓을 하듯이 자력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서 끌어올리시는 모습입니다. 누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끌어올리셨음을 강조하고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끌어올리시기 위해서는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지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활의 지점에 도달하시기 위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 바깥으로 나가시는 과정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상태가 부활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상태가 될 때 하나님께서 하늘로 끌어올리실 수 있습니다.

또 누가는 변화산 사건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했습니다. 9장 30~31절을 보면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말의 원형은 헬라어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탈출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마태나 마가에 있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십자가 사건을 향하시는 길이었습니다. 한편 누가는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한 승천을 목표로 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버림받으시고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과정을 탈출의 사건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단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탈출하셨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기록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승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누가가 염두에 둔 승천이란 단순히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리시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 또한 예수님의 승천을 기점으로 변화된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점으로 성령께서 사도들의 마음을 장악하시자 교회가 만들어지고 사역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누가에게 승천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승천은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련의 사건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과정을 승천이라는 표현에 담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 되는 과정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세상 탈출의 과정이 전제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땅에 있는 나를 끌어올리시는 승천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승천은 세상 탈출이라는 전제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탈출을 이미 구체적으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지기를 통한 세상탈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리심을 당한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물든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다.”고 부인할 때에 그러한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마음이 머무는 상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승천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다가 이 조건을 충족한 자들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면 하늘을 즐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승천이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승천을 위한 과정입니다. 승천에 이르지 못한다면 십자가까지 갔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죄 사함을 받은 의인으로 여겨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태반입니다. 하지만 승천을 목표로 하는 길은 마음이 하늘로 이르기 위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외골수 길입니다. 십자가로 가서 세상을 탈출했다면 부활해야만 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조건을 충족한 자들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시고 비로소 하늘을 즐기는 자의 삶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늘을 즐기는 자로서 살지 못했던 이유는 세상 탈출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거나 탈출을 포기한 채 세상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아직 하늘을 즐기는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즐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늘을 즐기기 시작할 때에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먼저 이 세상의 문제가 사라집니다. 하늘을 즐기는 동안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이끌려지기 때문에 세상의 일들을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설령 세상에서 말하는 형통의 기준과 어긋나 있을지라도 내게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절대 평강 즉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을 즐길 수 있다면 인생은 다 된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늘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위한 최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6장 5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의무감을 주기 위한 율법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즐기기와 기뻐하기를 염두에 두고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즐겨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을 재미있어하라. 하나님이 제일 흥미로운 분이심을 느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승천을 통하여 하늘에 올라가 산책하며 하나님을 즐기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존재하는 모습이 바로 교회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 땅에 붙이게 하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지난 시간에 소속감을 주제로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 조직에 소속되었으니 죽은 뒤에 하늘로 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음은 땅에 붙인 채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일은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소속이 하늘에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진리에 의해 확정되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만 합니다. 진리란 말이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또한 진리는 사람도 아니며 모임이나 단체도 아니기에 “우리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라는 발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진리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승천이라는 사건은 연쇄적 과정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려지신 것은 우리에게는 자기부인이 됩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되고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승천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담고 있는 승천의 사건이 바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론이나 사상에도 흔들리거나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흔들릴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즐겨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즐기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연쇄적으로 일으키신 사건들이 진리임을 굳게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사건 이외에 하나님께 도달하는 길로써의 다른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말들의 묶음이지만 진리는 내 마음을 직접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길입니다. 이 진리는 이론이나 사상이나 깨달음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이 사건을 붙잡을 때에 하늘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어떠한 문제도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우리는 교리적 논쟁이나 신앙적 논쟁에 대해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단들의 교묘한 말장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 신학자들의 사상들이나 크리스천 저널리즘에 혹하여 그들의 논리에 떠내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개신교의 기반이 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조차 마음은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의 차이가 무엇이냐를 따지는 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학교나 예배당에서 배운 각종 교리나 프로그램으로부터 해방되고 단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버림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연쇄적 사건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 안에는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공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말씀과 능력과 지혜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라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세상을 탈출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셨고 하늘로 끌어올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그리스도 통로입니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은 바로 이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승천까지 이어진 사건을 생활화할 수 있다면 성경의 구절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통해서 성경을 조금씩 살펴보고 있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이신 사건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달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승천까지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반복하여 경험하며 걸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되고 나의 삶에서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그러나 이 승천까지의 사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말씀은 껍데기만 남는 상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건이 먼저 있고 말씀이 뒤따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건을 내 사건으로 재현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진리의 사건을 따라서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하나님을 즐기는 사람들이 지상에서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소속감의 근거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상에 있는 것인 한 예배당조차도 소속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즐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즐기지 못한다면 교회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으나 그것조차도 소속감의 근거는 될 수 없었습니다. 제자 무리에 가룟 유다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땅을 탈출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하며 하늘을 즐기고 아버지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인생의 전문적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 소속감만이 진정한 의미의 교회의 소속감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드린 후에 댓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진심어린 염려를 담아 쓰신 댓글이 있었습니다. 그 댓글에는 비난이 아닌 중립적 염려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땅에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물리적으로 함께했던 것조차 소속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면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의 의미는 무엇이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역시도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땅에 대한 소속감을 만들어내는 모임이 아니겠느냐는 염려의 취지를 담은 댓글이었습니다. 소속감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이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지난 시간에 땅에 있는 한 예수님과의 물리적인 관계조차 소속감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익명의 제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에 예수님께서는 50절에서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반대한다는 것은 방향성의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늘을 향하는 방향이 동질감을 갖게 하는 유일한 소속감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비유를 들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서울 광장동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에 와서 공부를 하거나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의 모임을 이름 하여 “재유럽장신동문회”라고 불렀습니다. 말 그대로 유럽에 와서 공부하는 장신대 출신들의 동창회였습니다. 제가 있던 괴팅겐에는 저 외에도 장신대 출신의 목사님이 두 분 더 계셨습니다. 이렇게 셋이서 부부동반으로 일 년에 한 차례 그 동창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때에 프랑스의 파리,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스웨덴의 스톡홀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도 모임이 열릴 때가 있었습니다. 유학생들은 재정적 여력이 없었기에 유럽에서 활동하시는 목사님들이 주축이 되어서 2박 3일 동안의 동창회가 열렸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에서 모이면 부부동반으로 한 40-50명이 모입니다. 하지만 파리에 모였다고 해서 아무도 파리에 소속감을 갖지는 않습니다. “재유럽장신동문회”라는 이름이 의미하듯이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 소속감의 기반이 됩니다. 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모일 때에도 헝가리에 소속감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 모임 자체에 소속감을 갖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헝가리에서 모이기는 했으나 그 저변에 깔려있는 소속감의 근거는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입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이 이와 같습니다. 이 모임은 부다페스트나 파리나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동창회와 같습니다. 하늘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에 아무리 많이 참여하더라도 모임 자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우리가 해왔던 신앙생활이란 이와는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동창회를 주관한 목사님께서 “이제 부다페스트 모임에 소속감을 갖지 않는 분들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탈퇴하십시오.”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기독교에 소속감을 갖지 않고 예배당에 소속감을 갖지 않는 사람은 하늘에 이르는 구원이 없다고 말해왔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 소속감에 뒤따릅니다. 하늘 소속감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유럽에 계신 목사님들이 대한민국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소속감을 두고 파리에서 부다페스트에서 스톡홀름에서 모였던 것처럼, 교회는 하늘에 소속감을 둔 사람들이 하늘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땅에서 모이는 것입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목사님들이 같은 장로회라는 소속감으로 모이면 반가움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흩어진 성도들이 하늘에 대한 소속감으로 모일 때에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90년도에 독일에 갔을 때에 정말 이국적이었습니다. 그러다 93년에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미국은 오히려 외국처럼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TV나 영화를 통해서 자주 접했던 만큼 낯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가 반가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에 소속감을 두고 사는 분들이 세상에 흩어져서 사는 것은 외국에 나가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자녀나 배우자가 하늘 소속이 아니라면 가정에 파송을 나가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직장을 비롯한 삶의 각기 다른 영역으로 파송을 나가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상에서 모입니다. 자신의 파송지에서 삶의 모습을 나누며 기뻐하는 것이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의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누리며 살았고 어떻게 하늘을 즐기며 살았는가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더 많이 즐기고 기뻐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럽에 계신 목사님들이 부다페스트의 동창회에 소속감을 갖지 않듯이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도 소속감은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소속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소속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워졌습니다. 파리 동창회를 개최한 목사님이 “파리 동창회에 소속감을 갖지 않은 사람은 장신대출신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예배당에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배당에 속하지 않고 개신교라는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개신교도 나타날 수 있을 뿐이지 개신교 안에서 교회가 나타나는 뒤집힌 관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속하는 것은 예배당에 속하는 것도 아니며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를 붙잡은 사람만이 하늘에 속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예수님이 만드신 연쇄적 사건을 진리로 붙잡을 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된 후에야 비로소 교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삶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나누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즐길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하여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나보다 하늘을 덜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더 세워주고자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리나 사상은 교회의 모임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예배당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늘을 즐기는 중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의 현장에서 봉사도 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소속감을 느끼고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못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봉사나 충성을 하등에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이웃의 삶의 현장이야말로 여러분의 봉사와 충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선 하늘에 소속감을 갖고 모든 부담과 사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교회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하늘을 즐기는 자들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기쁨을 나누고 하나님을 즐기는 법을 배우고 증진시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하여 이 땅에 교회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온라인교회의 모임일 수도 있으며 지역 내의 모임일 수도 있습니다. 참 교회의 모임으로써의 의미는 이제까지의 예배당주의가 아닌 하늘을 즐기는 동호회와 같습니다. 아무쪼록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탈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보시고 “네가 부활의 자리까지 도착했구나! 세상을 탈출했구나!”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을 하늘로 끌어올리셨듯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고 하늘로 끌어올리시는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승천하여 하늘을 즐기는 가운데 또한 교회로 모여 기쁨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받아서 하늘 기쁨을 배가시키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삶을 여생동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께서 세상 탈출구를 만들어주시고 부활의 자리에 도착한 모두를 끌어올리시는 승천의 역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을 따라서 날마다 하늘을 산책하듯 즐기며 이 땅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를 교회로 붙잡아 주시며 교회의 모임 속에 성령으로 함께하여 주셔서 하늘 기쁨이 오고 가는 기쁨의 교환 장소로 삼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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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道堂.샬롬 | 작성시간 20.11.17 언제나 감사한 마음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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