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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이비 예수 따름 배제 기준>의 줄거리:
예수 따름의 유사품(?) 즉 사이비를 누가복음은 세 경우나 제시합니다. 예수 따름의 정통과 사이비를 구분하려는 의도는 각자의 예수 따름이 온전하게 됨에 있는 것이지 타인을 판단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구분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이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 따름에서 사이비가 될 위험성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이비 예수 따름 배제 기준
(누가복음 9:57~62)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이비 예수 따름 배제 기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이비 예수 따름 배제 기준’
본문은 예수 따름의 정통과 사이비를 가릴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사이비는 겉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지만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합니다. 예수 따름에도 사이비라 할 수 있는 유사품들이 존재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세 가지 경우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 따름에서 가장 발생 빈도가 높은 사이비 유형을 대표하는 경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비 유형을 잘 이해할 때에 사이비로 전락할 위험성을 배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예수 이름의 용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 따름에 연관하여 예수 이름의 용도와 효용성에 대하여 다시 상기해보고자 합니다. 예수 따름은 원하는 것을 꺼내주는 요술방망이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 따름은 정답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원들은 사장의 말을 따르고 승진을 좇습니다. 그러나 직장에서도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윤을 좇습니다. 그러나 장사를 하면서도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정에서 성실한 배우자 사려 깊은 부모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배우자 앞에서도 자녀 앞에서도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연애를 하는 중에도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언제 어디서든 어떤 과제가 주어졌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따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기준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렇게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따름이 사이비로 전락하는 것을 배제하고자 함입니다. 물론 기준이 있기에 판단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을 의식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았음에도 남을 판단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예수님과는 다른 길을 걷는 예수 따름에 역행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 따름의 세 가지 사이비 경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들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따름의 정통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 따름의 정통이 무엇인지는 바로 본문 직전에 나타난 누가의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준을 구성해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로 앞 단락인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의 성격을 승천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예루살렘으로 가신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승천하려고 가신다.”라고 대답한 셈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신 예수님은 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십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탈출하신 상태에서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연쇄적 사건은 바로 우리의 출세상을 위한 통로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따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향해 가셨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목적 또한 승천이 되어야 합니다. 승천 곧 하늘로 올라감과 연관 지어서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루살렘에서 일어나야 될 일을 별세(別世)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별세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탈출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선민이란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한편 신약의 선민은 예수님을 따라서 출세상 한 예수님의 추종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란 승천까지 따르기 위하여 그리스도 통로를 걸으며 출세상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에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무리는 아직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공생애의 기간이었으며 교회의 머리가 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어떤 부족함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부족함도 없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는 추종자들이 아직 교회를 구성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 교회를 이룰 사람이 없기에 예수님도 교회의 주인이자 머리가 되실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선구적으로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시는 승천의 과정을 이루셔야만 했습니다. 그 선구적 사건이 그리스도 통로가 되기에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의 추종자들 각자가 예수님을 뒤따라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승천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따름과 연관 지어서 아무리 말씀드려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에서 고난의 여정을 겪는 것을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에서 부흥회나 수련회를 하면 마지막 날에는 으레 예수님의 수난의 여정을 재현하는 행사를 합니다. 한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연기를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땅바닥에 끌리며 선을 남깁니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지구평면 위에 고생의 자취를 남기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부담을 안고 고통을 인내하면서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묵묵히 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염두에 두자면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코 세상에서 고된 삶을 지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라고도 말씀하셨고, 17장 13절에서는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자기 십자가를 지기에는 자기부인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나의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었음을 깨닫고 이것을 옳지 못한 상태로 여겨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인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각자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 문제나 건강 문제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인정하는 이유는 각자가 다르고 매순간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십자가 지기는 결코 지구평면상에서 수평방향으로 일정기간 움직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로 솟아오르는 로켓과도 같습니다. 로켓이 불과 연기를 뿜어내면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십자가 지기는 하늘을 향하는 수직상승운동입니다. 나의 마음이 땅에서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것이지, 결코 지구평면 위에 나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 예수 따름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 따름을 실천하는 인생에도 족적은 남습니다. 다만 매순간마다 상황마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심으로 인생의 족적이 남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집에 있을 때에 예수 따름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이때 마음은 집이라는 땅을 벗어나 하늘로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또 직장에 가서도 예수 따름을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직장이라는 땅을 벗어나 하늘로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이때 집이나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내 마음이 수직상승해서 떠난 그 자리를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리스도 통로를 통해서 로켓처럼 수직상승하여 매순간 매자리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면서 인생의 족적과 이력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예수 따름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의식하는 순간 마음은 세상에 젖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마다 세상에 젖은 마음을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함으로써 마음이 수직상승하여 하늘로 승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따름입니다. 예수 따름은 지평면 상에서 나타나는 수평운동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로켓처럼 수직상승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본문을 통해 예수 따름의 세 가지 사이비 경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따름의 기준을 이러한 사이비 경우에 적용함으로써 무엇이 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예수 따름이 땅에서 하늘을 향하는 수직상승임을 골수에 새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를 오늘과 내일에 걸쳐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경우를 살펴보고 내일 이어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57절을 보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58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는 여우의 굴이나 공중의 새의 집에 해당하는 몸 하나 쉴 안정된 장소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석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면 물질적으로 궁핍하거나 사람들의 배척을 받음과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면적 해석은 오히려 영적인 무지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따를 때 이러한 궁핍한 상황은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그러한 가능성이 있으니 따를지 말지를 고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이 사람은 예수를 따르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언뜻 기특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담겨있는 오해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예수를 따름으로써 얻고자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지금 나를 따르려고 하면서 세상의 가치를 얻으려고 한다면 완전히 잘못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따를 때에 네가 기대한 것들은 전혀 얻을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 사람이 기대한 것이 무엇인지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다는 비유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궁궐로 비유될 만한 안정된 삶이 가능한 성공과 출세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궁궐은 고사하고 여우의 굴이나 새의 집에 비교 될 세상의 가치조차도 예수님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수직상승하여 승천하게 되면 마음이 떠난 삶의 빈자리는 하나님의 뜻이 채우시고 이끌어 가시게 됩니다. 그럴 때 여우의 굴 같은 집에 살게 될지, 공중의 새의 집 같은 곳에서 살게 될지, 궁궐에 살게 될지, 그 중간쯤에 살게 될지는 관심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비전을 가져라, 꿈을 꿔라, 미래를 상상하라는 말들을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말들을 모토로 삼아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며 상상하고 걱정하고 소원을 갖습니다. 이 사람도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다가 능력과 권세가 출중하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에서의 삶을 원하는 대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이 상태에서 마음은 이미 땅에서 족적을 남기려는 수평운동의 방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궁궐에 비유될 수 있는 성공과 안정의 상황을 취하고자 하는 수평의 움직임으로는 결코 하늘을 향하신 수직의 움직임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로켓의 수직상승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 땅에서 궁궐로 비유되는 안정된 상황이라는 보장은커녕 여우의 굴로 비유될 수 있는 사소한 안정과도 연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궁궐에 거하느냐 여우의 굴에 거하느냐는 애초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생애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될 일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로켓처럼 수직상승을 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가는 과정 중에 여우의 굴 같을 수도 있고 공중의 새의 집 같을 수도 있고 혹은 궁궐 같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처럼 여우의 굴조차도 없이 살다가 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세상의 상황은 평강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영원한 분깃이자 몫으로 받을 하늘에서의 기쁨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의 실현일 뿐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수직상승한 사람은 땅에서 어떤 삶이 주어지더라도 마음의 평강과 기쁨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광풍노도 속의 일엽편주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신앙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순교자들은 로마의 형틀에서 화형을 당하고 사자밥이 되어도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형태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결정하시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설령 궁궐에서 살게 되더라도 그것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습니다. 왕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세속적 쾌락에 마음이 젖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사로와 같은 거지의 상태에 놓일지라도 평강과 기쁨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로켓이 연기와 불을 뿜어내며 땅을 박차고 올라가듯이 마음을 하늘로 보내야 하는 우리로써는 “이 세상에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 마음은 지금 당장 여기서 하늘로 수직상승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예수 따름의 기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마음이 땅에서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수평방향의 운동은 할 수 없습니다. 미래가 염려되고 걱정되어서 마음이 수평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하늘을 향하는 수직방향으로의 움직임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예배당에서 이러한 거짓말이 버젓이 행해집니다. 비전을 가지라, 꿈을 가지라, 긍정의 힘을 발휘하라, 믿으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수평방향의 운동을 조장하면서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믿게 만듭니다. 이것이 곧 사이비입니다.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수평방향의 운동을 하면서도 예수를 따르고 있다고 믿게 하는 거짓말 때문에 교회는 썩어버렸고 망해버렸습니다. 예배당 조직이 교회라는 이름을 도둑질해서 진짜 교회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 따름의 기준은 명확하기에 정신만 차리면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오해가 있을 수 없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배당이 이 기준을 버리고 수평운동 방향으로 사람들을 끌고 다니며 예수를 따른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따름의 좋은 예가 밭에 숨겨진 보화의 비유와 진주 장사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 44~46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싶으시다면 마음과 의식과 관심에서 미래를 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지구라는 삶의 평면 위에서 미래를 붙잡는다면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버려진 미래는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스스로 미래를 관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미래에 대한 관심을 끊을 때 마음은 하늘로 수직상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수직상승한 인생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의 바구니에 담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진짜 미래는 보장됩니다.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예수 따름을 위하여 미래에 대한 관심을 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따름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수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이외의 다른 관심의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배우자 앞에서 예수 따르기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배우자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수평방향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수평방향으로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따르기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누구 앞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따르기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 따르는 로켓운동을 나의 운동으로 삼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로켓을 올라타고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승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예수 따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봅니다. 로켓처럼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는 것이 예수 따름입니다. 예수 따름을 하는 우리가 관심해야 할 대상은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따르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수평이동을 하며 구해야 할 미래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미래를 관심 밖으로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로켓이 올라가듯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내는 일이 언제 어디서든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가는 곳마다 우주정거장이 되어서 우주인처럼 예수님 로켓을 타고 하늘로 오르게 해주시옵소서. 하늘로 오르기 위하여 가장 큰 방해가 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관심 밖으로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