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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사람 관계 쇠사슬을 끊은 자유_태승철 (누가복음 9:59~6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19|조회수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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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관계 쇠사슬을 끊은 자유>의 줄거리: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관계는 사랑일 수 없습니다. 중독입니다. 사람관계는 유대감일 수 없습니다. 쇠사슬로 묶임입니다. 사람관계는 위로일 수 없습니다. 무거운 부담이고 짐일 뿐입니다. 중독이고 묶임이고 부담인 사람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 따르면 됩니다.

 

사람 관계 쇠사슬을 끊은 자유

(누가복음 9:59~60)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람 관계 쇠사슬을 끊은 자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람 관계 쇠사슬을 끊은 자유’

지난 시간에 이어서 사이비 예수 따름의 세 가지 경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제 한 가지를 했고 오늘 나머지 두 가지를 하려 했습니다만 내용이 중요하기에 따로 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은 사람 관계라는 쇠사슬을 끊을 때에 상상도 하지 못할 자유가 주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본문 말씀의 배경을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6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 즉 별세(別世)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별세는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탈출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있어서 ‘죽은 자들’이란 하늘로 수직상승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통로를 전혀 모른 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는 곧 하늘과 연결이 끊어졌기에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기운으로부터 완전히 제외되어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찾아보고자 시도하며 죽음의 기운을 서로 주고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에서 앞에 언급된 죽은 자는 하늘과의 연결이 끊어진 자들이고, 뒤에 나오는 죽은 자는 육체가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하늘과 끊어져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끝내 육체까지 죽어서 장례를 치러야 한다면 그 일은 하늘과 끊어진 자들에게나 맡겨두고,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이라면 하늘과 연결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하여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관계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만남이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기운이 흘러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의 기운이 흐르지 않으면 죽은 자들의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승천의 과정을 로켓이 수직상승하여 대기권을 벗어나는 모습에 비유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수직상승할 때에 모든 죽은 자들의 관계의 영역을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따름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어서 죽은 자의 상태를 묵인한 채 맺어지는 관계는 결국 마음을 얽매는 쇠사슬이 되고 맙니다.

삼손에 대해 잘 아실 것입니다. 삼손은 사랑하는 여인 들릴라에게 자신의 힘의 근원이 머리털에 있음을 발설합니다. 이 일로 인해 삼손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놋으로 만든 사슬에 매여 무거운 맷돌을 돌리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러한 삼손을 노리갯감으로 삼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자면 삼손은 들릴라에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순간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삼손의 마음은 들릴라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잃게 되었습니다. 들릴라와의 관계가 놋으로 만든 사슬이 되어서 마음을 묶었고 맷돌과 같이 무겁게 짓누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관계가 어찌나 무거웠든지 삼손은 들릴라의 성화에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나실인의 비밀까지 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사로잡힘은 삼손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무 주저함 없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배우자든 자녀든 마음을 주는 순간 삼손처럼 진리에 대해서는 눈이 뽑혀 볼 수 없는 소경이 된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대상은 마음을 짓누르는 맷돌이 되어버리고 그러한 대상과의 관계는 여러분의 마음을 묶어버리는 놋으로 만든 사슬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은 채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없는 지옥의 삶을 예행 연습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히기 이전에 이미 들릴라에게 사로잡힌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들릴라와의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이미 마음은 사슬에 묶였고 진리를 볼 수 없게 눈이 멀었으며 무거운 맷돌을 돌려야 하는 인생으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상태의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을 때에는 하늘기운은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관계라는 통로로 서로가 죽음의 기운을 주고받게 될 뿐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중독이고 유대감이 아닌 속박이고 묶임이며 위로가 아닌 부담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연결되지 않은 채로 맺은 모든 관계들은 예수님을 따라 수직상승함을 통해서 무차별적이고 냉혹하게 끊어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붙잡을수록 죽음의 기운만이 오고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오고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중독에 빠지고 사슬에 묶이며 큰 부담을 안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만남과 관계의 형태일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관계는 통로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진 생명의 기운이 흘러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관계는 통로가 아닌 쇠사슬이 되고 맷돌을 돌리는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옳음도 깨달을 수 없고 진리에 대해서 완전히 눈먼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끊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관계를 우선시하는 동안에는 마음은 땅에 묶이게 되어 하늘로 수직상승하신 예수님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맺었던 모든 관계들은 반납되어야만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왜 아버지의 장례를 막으셨는지에 대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앞서 57~58절에서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따르고자 한 사람을 막으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에게는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또 다음 절을 보면 따르라고 하시고는 60절에서는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충돌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게 합니다.

예수님은 승천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통로를 만들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하여 다른 추종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는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체 어디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정작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활동을 멈추시고 승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물론 그 여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늘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만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셨음에도 이 사람에게는 유독 가라고 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난해하다 여겨지는 아버지 장례에 참석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는 사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본문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기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례는 가족 간의 정이라는 점을 떠나서도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관습적으로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율법공부, 성전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우선시되는 것이 바로 장례였습니다. 특히 가부장적 사회였던 유대사회에서 아버지의 장례란 으뜸가는 행사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장례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기에 단순히 장례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사람의 아버지가 지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운 중동 땅에서는 시신의 부패도 빠릅니다. 따라서 장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며칠 길을 돌아다니고 또 그 소식을 듣고 며칠 길을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가 연세가 많으셔서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식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봉양하기를 허락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마음을 나쁘게 보아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염두에 둔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소 이해하기 힘듭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면 이해는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요청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닌 어디론가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예수 따름의 기준을 적용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따름이란 마음이 땅을 탈출하여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을 수직상승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들입니다. 그 첫 번째 요소를 지난 시간에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마음을 지상에서 수평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두 번째 요소는 관계의 문제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계가 마음을 지상에서 수평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배우자나 자녀는 물론이고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하관계를 비롯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신경을 쓰는 동안에 예수 따름은 멈춰지게 됩니다. 수많은 관계들 중에서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삼손에게 있어서는 들릴라가 그러한 대상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 드러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사람마다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관계는 죽음으로써만 끝이 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본문의 제자 또한 아버지와의 관계가 죽음으로써 끝이 나면 비로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하기에 예수님과의 관계는 두 번째로 미루어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따름은 절대로 두 번째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따름은 기본적으로 땅에서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수평방향의 모든 관계는 끊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죽음으로써 관계가 끝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름으로써 끝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이 돌아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봉양하는 것은 영적으로는 죽은 자가 되어서 죽은 자를 상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단, 가는 목적이 다릅니다. 아버지를 봉양하다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론으로 배우는 것으로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수직상승하여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통로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게끔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추어진 의미를 모두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통로가 되고자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이러한 나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승천을 경험하고 하늘과 연결되는 산 사람이 되어라. 그런 후에 하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비롯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가지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라. 단지 장례를 치르기 위한 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늘을 만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티를 내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전파는 이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표정에서 드러나고 말로 드러나고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마음이 하늘에 젖어있다는 티를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비로소 이해가 가능합니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나를 따르겠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네가 그렇게 한다면 아버지에게는 하늘의 기운을 드러내 보일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내가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승천의 통로를 만들 테니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경험하라. 그렇게 마음이 하늘로 젖을 때에 땅에 남아있는 몸과 의식은 하늘기운으로 수직하강의 착륙지점이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께로 가라. 죽은 자들이 장례를 치를 때에도 너의 목적은 장례를 치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례에 참여하면서도 마음에 하늘이 흘러들어오는 티를 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따름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사람 관계에서 나타나는 결과이자 영향력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우선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로서 맺고 있었던 모든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끊어버리고 하늘로 오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삼손이 들릴라를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유지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죽은 자와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삼손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받아들이거나 관계를 형성하는 존재들은 우리에게 맷돌이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끊어지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진리를 못 보게 만드는 소경의 원인이 됩니다. 인연이라 부르지만 실은 마음을 얽매는 쇠사슬입니다.

그러므로 쇠사슬같이 답답하고 맷돌같이 무겁고 나로 하여금 눈멀게 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관계는 하루빨리 끊어져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이 사람은 그 관계의 끊어짐이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여겼기에 장례를 준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끊어짐이 될 수 없습니다. 아들도 아버지도 죽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관계의 대상들이 죽어서 끊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예수님을 따름으로 끊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람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낼 때 모든 관계는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음을 티를 내는 관계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효심 많은 사람에게 진짜 효도를 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셈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에 대한 탈출의 의미를 몰랐던 것은 이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예수님을 좇음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해답을 주십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으나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킨 후에는 마음 놓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것이 이 사람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아시고 진짜 효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너의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먼저 나를 따라와서 육체의 아버지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자. 그래서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한 후에 이 세상의 아버지께 가서 하늘에서 비롯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드러내라. 너의 아버지도 가족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과 끊어져서 죽음의 기운만을 드러내는 상황일 때에, 너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서 살아있고 생명이 역동하는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해드리는 것이 진짜 효도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부모라면 자녀에 대해 이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죽어서 자녀의 관계가 끊어지기 전에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젖어있음을 자녀들 앞에서 티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부모들은 세상의 가치들에 마음이 젖어있습니다. 돈에 마음이 젖은 부모는 돈이 많으면 웃고 돈이 없으면 우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입니다. 건강장수에 마음이 젖은 부모는 건강하면 웃고 아프면 우울해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마음이 젖은 부모는 다른 부모와는 다르게 언제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티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늘을 느끼게 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진짜 자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녀와의 관계부터 끊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마치 타인인 것처럼 여기며 우선 예수를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붙들고 있는 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는 로켓이 될 수 없습니다. 로켓 끝에 쇠사슬을 칭칭 감아둔다면 아무리 올라가려 하여도 고꾸라져서 폭발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나를 묶는 쇠사슬이 되어서 하늘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관계는 전부 죽음의 기운이 오고가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들이 그물망처럼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의 통로를 따라 관계의 그물망을 끊고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들에게 진짜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기회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에 대해 배우자에 대해 자녀에 대해 온전한 만남을 이루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수님과 함께 별세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통로를 따라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가지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듯이 땅으로 내려와서 만남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늘 기운을 흘려보내는 관계는 가능해집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별세하는 그리스도 통로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는 어떠한 만남도 미루어두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로 채워지기 전에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는 죽은 자들의 관계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소식들도 전부 죽은 자들의 일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마주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따라 로켓처럼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따라 만나는 사람과 상황마다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에 젖어있음을 티를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나라 티내기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의식 안으로 들어와서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 가면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회사에 보내신 것일까요? 바로 죽은 자들과의 관계에서 하늘의 티를 내라는 것입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손님 앞에서 하늘의 티를 낼 수 있으면 됩니다. 돈 벌기 위해 일하고 손님맞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를 따름으로 기존의 모든 관계를 끊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하늘로 올려 보내고 ‘가라’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스카이다이빙을 하듯 땅으로 내려와 모든 관계를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표정으로 말로 행동으로 하늘나라 기운을 티를 내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을 통하여 주님을 따라 별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늘에서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서 가라 하시는 명령을 듣고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접하든 스카이다이빙을 통해서 하늘 기운을 전파하는 자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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