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파송, 세상 참여의 유일한 방식>의 줄거리:
예수 따름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죽어도 살아도 따라야만 합니다. 예수 따름이 이처럼 절대적인 사실을 부동의 전제로 놓고 보면, 제자가 아직 몸이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어서라도 이 세상 삶에 참여하는 방식은 파송의 형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사물이건 모든 관계에서 파송 받은 자로서만 참여함이 참 자유하고 즐겁습니다.
파송, 세상 참여의 유일한 방식
(누가복음 10:1~2)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파송, 세상 참여의 유일한 방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파송, 세상 참여의 유일한 방식’
우리는 몸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라도 세상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이때 올바르게 세상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은 파송입니다. 우리는 파송의 형태로만 이 세상에 관여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앞서 9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따름의 의미가 집중적으로 말씀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 따름의 잘못된 경우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곧이어 본문에서는 칠십 인의 제자를 파송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러한 연관성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파송은 반드시 따름과 함께 이야기가 돼야만 합니다. 예수 따름이 정확하게 일어났는가를 확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파송도 이야기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따름과 파송은 언제나 함께 생각되어야만 합니다. 파송으로 이어지지 않는 예수 따름은 있을 수 없고 예수 따름을 전제로 하지 않는 파송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칠십’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숫자가 칠십이었고, 당시 최고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공회원 또한 칠십 명이었습니다. 이처럼 칠십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민들을 대표하는 숫자였기에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 제자의 파송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무조건 파송의 형태로만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음을 못 박아 드러내고 계십니다. 파송의 형태가 아니라면 부부관계도 불가능하며 부모자식관계도 불가능하며 직장생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파송의 형태로만 온전한 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파송 받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즉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직장 일을 하면서도 예수 따름이 유지될 때에 파송 받은 상태로 직장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따름을 전제로 한 파송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예수 따름과 파송은 그 방향이 반대입니다.
예수 따름은 이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일으키신 연쇄적 사건들의 경로를 따라서 세상을 탈출하여 승천하는 것이 예수 따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통로를 따를 때는 예수님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의식함으로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이 가신 보좌 우편까지 따라갈 때 마음도 같이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을 가지시는 만큼 나의 마음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가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는 평강이 임합니다. 이 평강은 땅에서는 조건을 찾을 수 없기에 절대 평강입니다. 이것이 파송의 대전제가 되는 예수 따름의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파송하신 칠십 인의 제자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존재할 모든 제자를 대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으로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늘이셨습니다. 이러하신 예수님과 밀착되어 있던 70인 제자가 파송되었다는 것은 하늘과 밀착됨이 파송의 전제임을 드러냅니다.
본문 1절을 좀 더 살펴보면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실 일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 일이 우리의 살아있는 몸을 통해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우리의 마음은 이 땅으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랐는데도 아직도 몸이 살아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있는 몸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영역 안에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송은 곧 세상 참여의 방식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에게는 스스로를 위하여 세상에 관여할 이유도 동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나는 배우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며, 자녀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에 설령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몸이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파송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몸은 하늘에 올라간 인격이 파송 받아 내려와야 할 착륙지점입니다. 파송 이외에는 몸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언제 죽어도 아깝지 않을 몸입니다.
예수 따름과 파송의 관계를 예를 들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부 중 한 명이라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일 경우에 그 사람이 배우자를 마주하는 방식은 파송입니다. 파송 받은 자로서 배우자를 마주할 수 없다면 부부로서 마주하는 시간은 무의미합니다. 세상에 묶여있는 수평관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수평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예수를 따라서 세상을 탈출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면 마음의 수직상승 운동이 일어남을 통하여 세상과 수평을 이루는 부부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 여전히 몸은 살아있기에 부부관계를 해나가기 위한 방법이 필요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파송 받아 내려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든 자녀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면 우선 마음에서는 부모자녀의 수평관계가 끊어져 하늘로 올라감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 따름은 하늘로 수직상승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몸은 여전히 땅에 있기에 부모자녀의 관계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관계는 마음이 파송을 받아 다시 내려옴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관계와 상황들 속에서 예수 따름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관계와 상황들보다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들에 대하여 의식하여 동일시하게 되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기에 회사에서 존재하는 모든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다만 몸은 여전히 회사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몸이 있음으로써 회사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마주 대해야만 합니다. 예수 따름이 분명하다면 이제 마음은 하늘에서 땅으로 파송 받아 회사의 사람들과 일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파송의 본질적인 근거는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밀착상태가 이루어질 수 있고, 그러한 상태에서만 평강과 기쁨은 생겨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 밖에 있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바가 아닙니다. 배우자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의 몸을 살려두고 계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몸에 파송하신 나의 지정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오직 파송을 위해 살아있습니다.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만나고 만족과 기쁨과 평강을 누립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파송하기 위한 착륙지점으로써 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송의 형식으로 세상에 관여하는 마음 상태와, 파송과는 무관하게 세상과 관여하는 마음 상태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요?
파송 받은 자의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해서 마치 방수처리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파송 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배우자가 스며들지 못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파송 받은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가 스며들지 못합니다. 마음은 항상 뽀송뽀송하여 유쾌하고 가볍고 맑은 상태가 지속됩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언제나 신바람에 휩싸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예수님이 이루신 연쇄적 사건들에 묶여있을 때 세상에 대해서는 방수처리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스며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내 주는 그리스도 통로이며, 또한 하늘에서 파송 받은 나의 마음이 이 땅에 내려오는 통로입니다. 이 통로를 통해 세상에 파송 받은 자들의 신분은 세상 바깥에 있는 자이며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이며 언제나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을 의식하는 것은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파송 받아 살 때도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파송 받은 자로서 마음에는 세상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따르지 않아서 세상을 탈출한 적이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요?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와의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자녀의 기운이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마음이 축축해지고 늘어지고 무거워집니다. 우울하고 걱정과 염려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자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자녀에게 어마어마한 부담만 되고 간섭이 됩니다.
파송 받은 부모는 하나님의 신바람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젖지 않아 뽀송뽀송하여 자녀 앞에서 신나고 가볍고 유쾌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송 받은 자이며 증인으로서의 모습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칠십 인은 모든 제자들의 대표이기도 하며 천국의 대표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 모든 참가국의 선수단이 입장을 합니다. 그 광경을 보자면 생전 처음 듣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 선수단을 보며 그 나라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보통 때에는 이름도 모르던 나라의 선수가 혹시 금메달이라도 따면 대단한 화제가 됩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그 나라를 알게 됩니다. 금메달리스트가 단상에 오르고 그 나라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에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이 잠시나마 그 작고 존재감 없는 나라에 쏟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추수의 의미입니다.
추수할 일꾼이라고 하니 낫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곡식을 베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파송되는 근본 이유는 추수 때문입니다. 이 추수란 천국이 실재함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파송 받은 내가 천국을 증거 하는 대표가 되어서 나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실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관계에서 파송 받은 사람은 배우자에게 천국이 실재함을 드러내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선수단 입장을 보며 처음 보는 나라를 인식하듯이, 배우자에게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보면 천국이 실재하는 게 맞네!”라는 말이 나오도록 파송된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3학년 때에 수원의 서둔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아내와 함께 광나루 앞에서 살았는데, 주말마다 수원으로 내려가서 초등학교 3, 4학년과 대학부를 맡아서 교육전도사의 일을 했습니다. 주일날 설교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불쑥 소리를 지르듯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전도사님, 천국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설교를 멈췄고 그 안에 계시던 다른 선생님들과 아이들도 조용해져서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 마음에는 “이제 전도사님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받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면 선생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실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있음을 믿는 것이 신앙의 기본 내용이지만 사실 천국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믿어야지!”라고 말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당시는 85년으로써 아직 여행자유화가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는 미국 가봤어요?”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가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럼 미국이 있어요? 없어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미국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을 안 가봤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지도책에 나온다고 합니다. “맞아요. 지도책에 분명히 미국이 있으니 미국은 있어요. 마찬가지로 성경책에 천국이 있다고 했으니 천국도 있어요. 천국에 대해서는 바로 성경책이 지도책과 같아요.”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선생님들이 와서 칭찬을 해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론 이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대해서는 성경책이 지도책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있다고 하셨으니 있다고 믿는 것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좀 더 구체적인 대답을 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네 앞에 전도사님이 서 있다는 것이 천국이 있다는 증거야. 전도사님은 천국에서 파송 받아서 여기에 있는 거야. 천국이 없다면 파송 받을 수도 없겠지.”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9절을 보면 이와 같은 내용으로 빌립과 예수님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날마다 파송 받음을 통해 세상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는 천국으로부터 파송 받은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삶의 모습을 통해 천국의 증인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천국이 어디 있냐!”고 묻는 배우자와 자녀 앞에서 천국으로부터 파송 받은 자의 증거를 보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파송 받은 자로 살 때 게임밖에 모르던 자녀가 부모의 삶을 보며 천국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제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군 시절에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배치를 받을 때 다른 연대에서 모인 훈련병까지 삼천 명이 운동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땅바닥에 앉아있는데 자대를 부르고 군번을 불러갑니다. 삼천 명을 해야 하니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더니 지프차가 왔습니다. 장교 한 명이 단상에 올라와서 노란 봉투를 뜯더니 목록을 펼쳐서 부르기 시작합니다. 카투사의 미군 교육대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군번을 부르는데 삼천 명이 모여 있는 연병장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한 명 한 명 이름과 군번이 불릴 때마다 기쁨의 환호성이 들려옵니다. 요새는 시험을 봐서 들어가지만 79년 당시에는 무작위 차출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중에 뽑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소위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 군대생활을 편하게 했다지만 카투사 요청 시기와 인원은 미군 관할이었기에 국방부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자대배치 시기에 맞추어 미군부대에서 125명 요청이 들어왔고 국방부에서 직접 지프차를 타고 내려와서 인원을 뽑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세상으로 파송 받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배우자를 대면하고 자녀와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파송 받은 자로서 천국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에서 내려와 따끈따끈한 마음으로 세상에 참여하는 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들으며 예수 따름이 온전한 상태가 되도록 기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연쇄적 사건 속에서 단계마다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이 보좌 우편까지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도 같이 따라 올라가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뽀송뽀송해지고 신바람에 휩싸입니다. 감사와 평강이 가득해집니다. 그럴 때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배우자 옆에 살아있고 자녀 옆에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몸이 있는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그럴 때 배우자와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 파송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끈따끈한 천국의 기운을 느끼며 배우자와 자녀를 대하고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회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여하고 관여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 탈출의 통로에서 예수님과 동일시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 따름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고,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따끈따끈한 천국의 기운을 전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