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2

녹취문: (S) 내 여생은 어린양 프로젝트_태승철 (누가복음 10:3~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23|조회수71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여생은 어린양 프로젝트>의 줄거리:

예수님을 바로 따르는 사람의 몸이 아직도 살아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파송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따름은 세상 탈출 하늘 입성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한 사람의 파송 받은 여생을 일컬어 '하나님의 어린양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하늘로부터 파송 받은 첩보원, 즉 특수요원들입니다.

 

내 여생은 어린양 프로젝트

(누가복음 10:3~16)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4.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여생은 어린양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여생은 어린양 프로젝트’

어제 예수님께서 칠십인 제자를 파송하시는 내용을 통해서 파송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파송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인생은 예수님이 계획하신 어린양 프로젝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특수요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을 달리 표현하자면 “나는 어린양 프로젝트의 특수요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심을 두고 3절에서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리 가운데 어린양을 보낸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합니다.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마치 핵발전소에서 사고로 방사능이 누출되는 현장에 있는 것과 같고, 시각장애인이 기찻길을 따라 걸을 때에 백발백중 사고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을 묶어 놓아서 어떤 상황에 대해 대응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리 가운데 던져진 어린양의 형국은 문자 그대로 속수무책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양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바톤(πρόβατον)은 보통의 양을 말합니다. 한편 누가는 양을 헬라어 아렌(ἀρήν)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렌은 어린양을 의미합니다. 즉 성장한 양도 아니고 어린양을 보내신다는 의미에서 파송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지상최대의 위기상황을 의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신 상황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던져 넣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의도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제목에서 “어린양 프로젝트”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따를 때에 마음은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을 향해 수직상승하여 승천하게 됩니다. 몸은 여전히 땅에 있지만 마음이 하늘에 있기에 땅에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것들이 없으니 세상을 살 필요도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랐다는 것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져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게 됩니다. 다만 몸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마음은 몸으로 대하는 세상을 향해 파송을 받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삶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저 흘러가는 인생이라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특수요원으로 이 세상에 남은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이 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 프로젝트의 특수요원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남편이나 아내로 사는 것, 자녀들 앞에서 부모로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의 어린양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특수요원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직장이라는 현장에서 어린양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파송 받은 특수요원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 프로젝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린양 프로젝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리 가운데 어린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위험해 보이기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4절에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뿐만 아니라 지팡이라도 챙겨서 자기를 보호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떠나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4절 하반부를 보면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안이란 안부 인사로써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사소통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잘 해나가기 위해서 서로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 안정된 상태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건강상의 안정된 상태, 경제적인 안정된 상태, 자녀들의 안정된 상태 등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린양 프로젝트와는 반대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수없이 많고 치명적인 맹공 속에서도 의도적으로 속수무책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리와 어린양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파송을 받을 때에 이리 가운데 어린양과 같은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잡아먹힘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잡아먹힌다면 어린양의 상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린양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의미를 알 때에 우리는 어린양으로써 파송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 따름이 분명할 때에 몸이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은 파송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파송 받아 이 세상에 참여하는 모습이란 이리들 가운데 던져진 어린양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이리들이 둘러싸고 으르렁거려도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자기방어나 보호를 위한 어떠한 방책도 생각할 수 없고 만들 수 없고 대응할 수도 없는 상태가 바로 어린양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리들 가운데 어린양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절대로 어린양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양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 따름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예수 따름을 통하여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 즉 주체성이 임하게 됩니다.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주체성이 움직여 가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외면한 채 스스로의 주체성을 활성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하였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계획하고 소원하고 추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주체성은 나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막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통로 즉 세상에서 버림받음과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연쇄적 사건에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마음이 세상을 떠나게 된 자들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주체성을 발동하게 된 이유는 비어있는 마음을 세상으로 채우고자 함입니다. 한편 마음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마음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는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은 사라지게 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몸에는 나의 주체성 대신 그동안 밀려나 있던 하나님의 주체성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채우는 상황에서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원하시는 어린양의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삶이란 세력과 세력이 다투고 정복하는 삶이 아닙니다. 나의 주체성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내 삶의 모든 관계와 영역을 채우며 나타나실 때에는 정치싸움 같은 세력다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댐이 무너지면 가두었던 물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나의 주체성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주체성으로 채워지는 것은 인격적 사건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환영함으로써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모든 관계에 하나님의 주체성이 흐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반가워하고 좋아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체성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정치적인 싸움을 통하여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점령하거나, 댐이 무너져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듯이 물리적인 변화에 휩쓸리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일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즐거워하고 반가워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또한 환영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에 참여하는 분들 중에 자녀가 셋인 분이 많으십니다. 이렇게 여러 자녀를 둔 어머니가 예수 따름을 통해 마음을 하늘로 보내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자녀들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본문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사실 자녀들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자면 어머니의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서는 세 자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머니 때문에 자녀가 망쳐질 확률이 잘될 확률보다 70~80%는 더 높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향해서 보일 수 있는 주체성이란 죄악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로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자녀들에게 죄악의 악취를 뿜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참새 한 마리에게까지 임하는 이 세상에서 자녀들은 부모가 없더라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 9절에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대기업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어떤 후계자가 필요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 어느 당에서 누가 나가야만 한다는 생각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상적인 기준에서 나선 사람들이 오히려 득보다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은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주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할 때보다 모든 일이 잘 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빠져나가는 탈출로가 되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주체성을 갖는 것은 나도 못할 짓이고 남에게도 못할 짓입니다. 다만 그렇게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간 상태에서도 우리의 몸은 여전히 세상에 살아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어린양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파송 받은 어머니라면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흘려보내는 역할을 수행하면 충분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자녀에게 내 뜻이 닿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닿아야 하겠습니까? 내가 없어지면 하나님의 뜻은 닿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두신 이유는 내가 자녀와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흘려보내는 수로가 되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좋아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을 한 방울도 소모하지 않고 전달하는 인격적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감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의 어린양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특수요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는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삶에 임하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결코 어린양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 스스로 대응하고 반응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자기 보호의식과 자기 방어의식은 본능적입니다. 힘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경우는 있어도 힘이 있는데도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힘만 있다면 자기보호와 방어를 넘어서 자기영역을 확장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조차 당연시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린양이 된다는 것은 자기방어나 자기보호를 완전히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 어린양의 삶입니다. 일반적인 특수요원이 되기 위해서는 특수훈련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 프로젝트에서는 오히려 모든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단순히 존재하는 자만 되게 합니다. 어린양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존재만 하는 상태가 어린양의 상태입니다.

배우자 앞에 남편과 아내로 파송을 받았다면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배우자에게 대응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 앞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자기방어나 자기변호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배우자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양이란 도무지 자기를 지킬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라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고 사슴만 되더라도 껑충껑충 뛰어서 도망이라도 칠 것입니다. 고슴도치는 맹수의 공격을 받으면 몸의 바늘을 곧추세워서 자신을 지키고자 합니다. 다만 어린양에게도 특수한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이 능력은 사자나 호랑이에게도 없고 사슴이나 고슴도치에게도 없는 능력입니다. 바로 목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든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응능력 제로, 자기보호 제로, 자기방어 제로, 공격능력 제로인 어린양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목자 부르기입니다. 어린양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목자가 개입하듯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정치적 다툼이나 물리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격을 통해 발휘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린양이 될 때에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을 채워나가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삶의 전 영역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 대해 그동안 주체성을 발휘하였습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에는 호랑이 같은 어머니가 되고자 했고, 자녀가 잘했을 때에는 부드럽고 온유한 소 같은 어머니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동물처럼 행동해도 그러한 삶은 목자가 개입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권자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의 삶에 개입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양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양 중에서도 무력한 어린양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양의 삶에는 반드시 목자의 개입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양으로써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입으로는 매일같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또 “주여, 나의 삶에 오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하신다면 먼저 어린양이 되고자 하는 기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어린양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목자로 개입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자녀 앞에서 부드럽고 온유한 소같이 굴어도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이 목자로서 개입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반대로 엄한 사자나 표범 같이 굴어도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이 목자로서 개입하시고 주권을 행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종교는 내가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체가 된 상태에서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다고 여겨지면 그것을 얻기 위해 절대자와 초월자를 끌어당기고자 합니다. 방식만 공손할 뿐이지 실제로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를 어린양으로 만듭니다. 절대자이고 초월자이시며 주권자 하나님을 목자로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어린양 프로젝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에 이리들이 들끓는 세상에 어린양으로 우리를 파송하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 직장에서는 사장님과 동료 직원들 앞에서 어린양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의 반대되는 상태는 이리의 먹이가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성취, 내 밥그릇 챙기기, 자기 앞가림하기를 위해서 사자가 되고 표범이 되고 이리가 되고자 합니다. 적어도 사슴이 되고 고슴도치라도 되어서 스스로를 지켜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이리에게 먹힌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과 의식을 압박하여 스스로 주체가 되게 합니다. 자기방어, 자기보호, 자기변호, 내 몫 챙기기, 자기 앞가림을 하라고 억누르고 요청합니다. 이러한 압박이 바로 이리들이 들끓는 모습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판단하고 생각하며 주체가 되었다면 양으로써의 모습은 이리에게 먹혀버린 것입니다. 양이 되어야 될 사람이 표범이나 사자를 흉내 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끝내 속수무책의 어린양으로 남아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송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어린양으로 남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은 목자로서 개입하십니다.

시편 23편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라면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직 어린양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자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데려다 놓는다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자는 잡아먹을 먹이가 많은 밀림과 초원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형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다 좋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양이 아닌 사자나 표범이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양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통로는 세상을 탈출하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분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내가 세상을 탈출하기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자였음을 기억한다면 세상에 파송 받은 자의 신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힌 자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를 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파송을 받을 때에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의 신분으로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신분이 곧 파송 받은 자의 신분입니다.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고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는 죄인으로써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파송 받아 세상으로 내려올 때에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는 어린양이 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못 박혔으니 속수무책입니다. 어떤 일이 주어져도 방책을 강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 파송 받은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것이 나의 여권에 찍힌 신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써 배우자 앞에 섰을 때에 나의 정체성은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어린양입니다. 자녀 앞에서 섰을 때에 부모가 아닌 어린양입니다. 회사에서 직원이 아닌 어린양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어린양 프로젝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도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하고, 파송된 자로써 살아가기 위해서도 십자가 생활화는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에 물든 죄인 된 나의 죽음이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세상에 파송된 자로써는 어린양으로써 목자이신 하나님을 부르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린양의 자아의식을 가지면 목자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와 관계된 모든 일들에 대해 목자로서 주권을 행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신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어린양으로 세상 어디든 파송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 프로젝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에 물들어 죄로 더러워진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중에 하늘로 올라간 자로서 하늘에서 파송을 받아 세상에 내려올 때에도 십자가에서 못 박힌 자로서 어린양의 신분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 목자를 초청하는 자가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쌍방향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나의 마음이 끊임없이 아버지로 채워지게 하셔서 평강을 누리게 하시고, 이 땅에서의 삶은 어린양 프로젝트를 통해 끊임없이 아버지의 주권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