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누가복음-2

녹취문: 귀신은 끊고 기쁨은 수정하라_태승철 (누가복음 10:17~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25|조회수5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신은 끊고 기쁨은 수정하라>의 줄거리: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의 영향력이 내 삶에 실제 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함이 없거나 중단되면 여지없이 사탄과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악한 영향력이 끊긴 증거가 확실하다는 말씀이지요. 절대적인 것 세 가지가 주어집니다. 절대 평강, 절대 기도, 절대 감사입니다.

 

귀신은 끊고 기쁨은 수정하라

(누가복음 10:17~24)

 

17.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귀신은 끊고 기쁨은 수정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귀신은 끊고 기쁨은 수정하라’

귀신은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기쁨이 수정되어야만 합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이들은 파송 받아 활동하는 동안 예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체험을 하게 되었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 드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봅니다. 항복하며 쫓겨나가는 귀신들의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귀신은 아주 더럽고 교활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결코 깨끗하게 항복하지도 않습니다. 항복하고 쫓겨나가는 중에도 그 교활함을 중단하지 않고 소원을 하나 갖습니다. 패색 짙고 암울한 상황을 한방에 전복시키고 역전을 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항복하고 쫓겨나가는 것을 사람들이 기뻐하기를 희망합니다.

귀신은 쫓겨나가며 “아이고 나는 이제 꼼짝 못 합니다. 당신이 예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기를 펼 수 있겠습니까? 보세요. 나는 이렇게 형편없이 힘을 못 쓰고 쫓겨나갑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러니까 제발 내가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라!”고 희망을 갖습니다. 귀신이 바라는 대로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다면 결국에는 귀신이 이기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만약 이러한 모습이 제자들에게서 나타나게 된다면 귀신이 쫓겨나가면서도 이기는 역전극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기쁨으로 돌아온 칠십인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기쁨을 수정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신을 쫓는 현장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귀신이 쫓겨나가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경험이 너무나 신기하였기에 기뻐하면서 보고를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우리 또한 이러한 일들로 기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았듯이 기뻐하는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반응은 석연치 않으십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일은 파송 받은 사람의 삶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쁨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기쁨은 수정되어야만 합니다.

 

귀신을 쫓는 것은 어떻게 보자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에 가장 거룩한 기쁨으로 여겨집니다. 더럽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당연히 거룩한 진영에 속한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 진영에 속한 자들로써 귀신에게 승리했다고 여기며 기뻐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기쁨 자체를 막지는 않으십니다. 단 기쁨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도 땅에서 일어나는 일인 한 기쁨거리로 삼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늘 소속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인간의 가장 본질적 욕구인 기쁨을 추구하는 마음이 하늘에서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공백의 상태이기에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를 발동합니다. 이것이 인간됨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은 이 욕구가 하늘에 소속됨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칠십인 제자를 파송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셨습니다. 다만 이 두 파송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파송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파송의 예행연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행연습을 통해서 앞으로 일어날 진정한 파송의 의미를 밝혀주시고, 그 파송을 계획하시는 하나님 마음의 취지를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파송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뒤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과하면서 진정한 파송은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파송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시고 이러한 파송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의도를 알게 하시고자 파송의 예행연습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제자들이 온전한 상태에서 파송을 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파송의 전제조건은 예수 따름입니다. 다만 이때에는 아직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버림받으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통해 완성하시게 될 연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예수 따름 또한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파송도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임시로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파송하심으로써 앞으로 일어나게 될 파송 받은 자의 삶의 의미를 미리 밝혀주십니다.

파송의 특징은 예수님이 몸으로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파송 받은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님의 이름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가지고 파송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의 모습이 4절에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가장 큰 특징은 사탄과 그 졸개들인 귀신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파송 받았던 제자들의 보고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보고 속에는 우리가 파송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 삶에서 드러날 특징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귀신이 항복하고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고 우리를 해칠 자가 없으며 하늘에 기쁨을 두고 땅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늘에 기쁨을 둔다는 것은 기쁨의 이유가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절대(絶對)는 끊어질 절(絶)에 마주대할 대(對)로서 마주대함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아내 앞에서는 남편이고, 자녀 앞에서는 아버지입니다. 선생님은 제자가 있기에 선생님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관계는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는 상대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누군가로 인하여 규정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를 규정하시기에 절대자이십니다.

절대기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입장에서 보자면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기쁨이기에 절대기쁨입니다. 웃고 있는데 웃는 이유를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자면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절대기쁨, 절대평강, 절대만족, 절대감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기준에서는 기뻐할 이유가 없고, 평강할 이유가 없고, 만족할 이유가 없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는 이처럼 세상과의 상대적인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드러낼 때 천국기운이 운행되는 분위기 속으로 빨려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천국 분위기 속에 들어온 사람에게 말씀이 전달될 수 있고 믿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분위기가 형성될 수 없다면 전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천국 분위기가 가득한 홈그라운드에 끌려온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기쁨과 절대감사와 절대평강의 이유를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말씀의 펀치를 날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렇기에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천국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파송 받은 자들의 특징은 절대기쁨이 절대로 해침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근거를 둔 절대기쁨과 절대만족과 절대평강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발을 묶어 두려는 귀신의 전략이 강하게 밀어붙여도 기쁨의 근거가 하늘에 있기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19절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몸이 상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이해로는 스데반 집사님을 비롯한 순교 사건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통해서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큰 돌덩이를 가져와 머리를 내려쳐서 죽이는 상황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극한의 육체적 괴로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서는 절대기쁨과 절대평강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하늘에서 기쁨을 찾고 누리게 된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기쁨의 근거를 하늘에 두었기에 땅에서 육체가 죽는 상황에서도 기쁨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송 받아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파송 받아 사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예수 이름뿐입니다. 공생애 때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몸으로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과 함께하는 것은 몸으로 함께하는 것보다도 더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과 함께하는 삶은 너무나도 자유롭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데 힘쓰고 땀 흘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불러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그리스도로서 통과하실 연쇄 사건을 덧붙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기에 세상에서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처음 나온 자리에 이 사건을 연결시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역할을 분명히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를 때에는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탈출해서 부활 지점을 통과하여 승천할 생각으로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연쇄 사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로 예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돈 문제가 벌어지는 세상을 탈출해서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계속해서 돈 문제를 붙잡고 있다면 실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수님을 종교의 창시자로 믿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각오해야 합니다. 지금 마음을 아쉽게 만드는 급박한 문제들이 있을지라도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에 마음을 동참시키겠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을 빠져나가기 위해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이름을 부를 때에 귀신은 쫓겨나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사건은 반드시 한 세트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 이름이 세상을 탈출하고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통로임을 알고 부를 때에, 예수 이름 앞에서 버티는 귀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신의 영향력이 끊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귀신이 예수 이름 앞에 꼼짝할 수 없는 이유는 귀신의 유일한 사명이 예수 이름을 통해 무력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을 통해서 귀신의 존재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연쇄 사건과 연결된 상태에서 예수 이름을 부를 때에 귀신이 존재해야 될 의미는 없어지게 됩니다. 귀신의 존재 의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대적할 수는 없기에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통로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통로의 시작점에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올라갈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 세상에 대한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만듭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흑자를 기대하지만 귀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돈이 기쁨이 된다는 믿음을 귀신이 주었기 때문에 흑자를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을 기대합니다. 이 또한 귀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몸이 나으면 기쁘리라는 믿음을 귀신이 갖게 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귀신의 영향력에 의해 자녀의 형통이 기쁨이 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기쁨거리를 찾게 하는 것이 귀신의 역사입니다.

또 귀신은 이러한 기쁨거리를 위하여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장님이 사업에서 흑자를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듯이, 이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다는 지혜와 슬기를 짜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은 기쁨거리가 땅에 있다는 믿음을 줌으로써 이 땅을 탈출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기쁨거리에 대하여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지혜롭고 슬기 있게 행동함으로써 삶의 구석구석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끊어버리고 내팽개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슬기와 뜻과 의지를 끊어버리고자 하는 것이 귀신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귀신의 역사는 지독하게 치밀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귀신의 역사는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은근한 바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래힘줄 같이 끈질기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의 항복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시급한 일입니다.

 

한편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귀신의 왕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에 19절과 20절이 이어지며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아담 이후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모든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 원죄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날 모든 사람 이름에는 빨간 줄이 그어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도장이 찍힌 셈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 땅에 파송 받은 자로서 예수 이름 하나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예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으로 연결되면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 아버지께로 연결됩니다. 그럴 때 앞서 말씀드린 귀신들의 두 가지 역사는 끊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 기쁨거리가 있다고 믿음을 주는 역사와 그렇게 믿게 된 기쁨거리를 위해 지혜와 슬기를 짜내는 주체가 되게 하는 두 역사가 예수 이름을 통해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서 하나님 아버지로 기쁨을 누리고, 땅에서는 아버지의 주권이 이루어지고 통과되는 삶을 살아갈 때 생명책의 빨간 줄은 사라집니다.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있다는 도장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죽기 전까지 이렇게 예수 이름을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어서 마음이 계속 땅에 머물러 있다면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표시가 있는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사탄과 함께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이름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을 한 세트로 묶어서 부르는 삶을 통하여 세상을 탈출하여 아버지께로 가야만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동안에 내 이름에 붙어있던 사탄의 영향력은 완전히 제거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권속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을 대비시키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마치 격투기 선수들 같습니다. 격투기 선수들이 경기장에 오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상대방이 무력화될 때까지 공격하는 것처럼, 세상이라는 경기장에서 세상 것을 기쁨거리로 믿고 쫓아가고 얻는 것에 엄청난 지혜와 슬기를 발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위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그만큼 세상에 열중하고 있기에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예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설령 예수 이름을 부를지라도 세상 탈출을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신으로서 부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결코 파송 받은 자로서 귀신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수정된 절대기쁨과 절대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반면 이렇게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비되는 어린아이들이란 사회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시 어린아이는 인구수에 계수되지도 않았습니다. 여인들 또한 인구수에 포함되지 못했지만 가사를 돌볼 책임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사회적 존재감이 아예 없었기에 한 명의 온전한 사람으로는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어린양과 같이 무력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파송 받은 칠십인 제자들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진출이 이루어질 수 없는 변두리의 존재들이었습니다. 인간 세상의 중심부로 들어오는 것보다도 오히려 세상이라는 국경을 탈출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쉬운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이름을 붙잡고 살기에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미워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세상을 탈출해야만 한다는 진리의 속성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라도 세상에서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이름을 붙잡고 있다면 설령 세상의 중심부에 있더라도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서 세상탈출이 용이한 변두리로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 이름 부르기도 가능합니다.

인간 세상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생임을 자처하고 예수이름을 불러서 세상을 탈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절대평강과 절대기쁨을 누리며 이 세상 가는 곳마다 귀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웃는 이유가 하늘에 있는 자들로써 세상을 멋지게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연쇄 사건에 연결된 예수님의 이름을 언제 어디서나 부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따라 세상 탈출과 세상으로의 파송이 반복되는 가운데 어디를 가든 귀신의 항복을 받아내고 어디를 가든 누구도 해치지 못하는 절대평강과 절대기쁨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