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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한 사마리아인 사랑하는 법>의 줄거리:
이 비유의 메시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논리적으로 자명한 이 메시지를 곡해하여 '되어야 한다'라는 강박감의 사슬이 되어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처지인 사람이 멀쩡한 사마리아인을 사랑한다는 모순(?)을 해명할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사랑하는 법
(누가복음 10:29~37)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사랑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사랑하는 법’
어제에 이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기존의 상투적이었던 이해를 반대방향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동안 본문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해왔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대로라면 우리가 동일시해야 하는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 말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 비유는 이웃 사랑이라는 행위를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사의 질문 자체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내용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하시는 과정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주제 또한 영생을 얻는 법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스스로 이웃 사랑을 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함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율법사의 생각을 전제로 삼아 영생 얻기와 연관된 이웃 사랑 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은 단지 이웃을 사랑하는 법이 아닌 영생을 얻는 법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부분은 율법사의 오해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 율법사가 처해있는 상태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사의 마음에는 세상이 스며들어온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취해있고 정복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음이 돈 문제나 가정의 문제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묵인한 채로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이러한 상태를 묵인하고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기에 율법에 언급된 이웃 사랑의 방법을 문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들이나 친지들만을 이웃으로 한정시켜 생각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자들이나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기에 이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율법사는 예수님께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사가 누구와 동일시되고 있으며, 또 율법사가 사랑해야 될 이웃은 누구와 동일시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비유 안에는 분명한 논리구조가 있습니다. 영생의 조건으로 이웃 사랑을 언급한 율법사는 자신이 사랑해야 될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비유로 답을 주신 후에 이번에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율법사에게 되물으십니다. 이에 대해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즉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대답을 이끌어내시며 율법사와 강도 만난 자를 동일시하십니다. 이 장면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강도 만난 자는 소중한 것을 다 빼앗기고 폭행을 당해서 죽을 지경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이웃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가장 가까운 가족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즉,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는 어떤 사랑도 불가능한 상태요 사랑 불구자의 상태에 처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스스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실제로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태와도 같았던 것입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 사랑이라 여겼기에 율법을 지키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이웃도 사랑하고자 하였고 영생을 얻기 위한 모든 조건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실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랑 불구자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하시고자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눈에 이 율법사는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랑 불구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시선을 염두에 두자면 이 비유의 해석은 전혀 달라집니다. 36절을 다시 보면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대답에 대해 율법사는 37절에서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7절의 하반부를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으로 인해 비유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뀝니다.
지난 시간에 마귀의 이웃 사랑 해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하지도 않은 채 마귀의 해석을 따라 무조건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에 서서 이웃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의해 복음의 진리는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탄할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다시 해석해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논리적으로 보자면 강도를 만난 사람은 사랑 불구자의 입장입니다. 스스로는 어떠한 사랑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마찬가지로 율법사도 가서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논리에는 모순점이 느껴집니다.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이 무엇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의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귀신의 해석은 이 해석의 난점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마리아 사람과 동일시하도록 유혹합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흔하게 사용하는 선행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못된 해석에 의하여 말씀에 담겨진 진짜 복음의 진리는 심각하게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유명한 비유를 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각을 가질 수 있었다면 기독교라는 종교자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논리적 생각을 방해하시기라도 하시듯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서 순차적으로 전개되어 오던 논리는 깨지고 사랑을 하라는 명령만이 뇌리에 남게 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난해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혹은 이 비유를 이해함에 있어서 예수님을 무조건적으로 도우시는 분으로 전제하여 강도 만난 사람과 나를 동일시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기에 이러한 이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복음의 논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담겨진 복음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보다 강도 만난 자의 입장이 되는 것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잘못된 이해가 팽배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요청하신 사랑이란 베푸는 것이 아니고 베풂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간단히 말해 영생을 위한 이웃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어려울진대 율법사에게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개와 똑같이 취급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었기에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고 갈 때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겨서 일부러 먼 길로 우회하여 다닐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사마리아 사람을 싫어하였기에 이들과의 교제나 결혼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식사도 함께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이방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만약 비유에서 강도 만난 유대인이 간신히 제 발로 설 수 있을 정도였다면 절대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행여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으며 손을 내밀었을지라도 오히려 손을 뿌리치면서 “더러운 개 같은 놈이 어디에 부정한 손을 대느냐!”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다급해도 부정한 이방인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이 가진 선민으로서의 자존감과 자부심이었습니다. 하물며 이 비유를 듣는 사람은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이라면 웬만해서는 이방인에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죽을지언정 너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라고 말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은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동족들에게 외면을 당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돕지 못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속한 사회에서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 다가왔고 순순히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방인의 손에 맡기게 됩니다. 이로부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는 무관하신 국외자(局外者)이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죽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내어드리는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강도 만난 자가 할 수 있는 사랑의 방법은 사마리아 사람의 선한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강도 만난 자와 동일시해봅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도 강도 만난 자인 나를 돕고자 하는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강도 만난 나를 돕겠다고 다가오신 분은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이방인이자 국외자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이웃 사랑을 하고자 한다면 그 이웃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 이웃은 모든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이방인이자 국외자이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또한 이방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는 이러한 뜻이 담겨있습니다.
나를 돕겠다고 하는 예수님을 이웃으로 하고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는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형제도 자녀도 그 누구도 세상에서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나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세상에 대해 국외자이자 이방세계인 천국에서 파송되신 예수님만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러하신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강도 만나 죽게 된 자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몸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해서 나의 삶까지 멀쩡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강도 만나 죽게 된 지경이 된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잃었는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이것을 알 수 없다면 국외자이시고 이방인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며,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준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강도는 사탄입니다. 앞서 칠십인 제자가 파송 받았다가 돌아와 보고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사역의 핵심 내용은 귀신을 쫓아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역에 대해 18절에서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강도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빼앗아간 것일까요? 우리의 마음은 공백으로 지음 받았기에 채워짐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됩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을 채우실 대상은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이 세상으로 채울 수 있다는 유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빼앗겼으니 이보다 더 절망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가질 수 없으니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 수도 없습니다. 마음에 이어서 인생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가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가짐으로써 내 마음도 영원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영생을 잃자 땅에서는 인생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탄과 귀신들은 강도가 되어서 우리에게서 영생과 인생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을 가지고 기뻐하고 만족하는 영생의 상태에서는 우리의 인생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뜻에 의해 전개될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잃자 우리의 삶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여가는 것이 아니라 지렁이 같은 나의 주체성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구에 살아가는 75억 명이 75억 개의 영생과 75억 개의 인생을 잃고 물거품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마음의 공허를 채우고자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구걸하는 거지처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영생을 잃었고 인생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도 깨닫게 됩니다. 영생을 잃어버려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직장생활에서 강도 만난 자로서 죽을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국외자로서 회사의 이방인으로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율법사가 받아들여야 될 예수님은 눈앞에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가라는 것일까요? 율법사는 몸으로는 예수님과 마주보고 있었지만 마음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습니다. 예수님은 별세(別世)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별세란 곧 세상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자리로 나가시고 세상 경계를 뚫고 탈출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율법사는 유대사회의 지도자로서 세상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 물리적으로는 예수님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심적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멀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자리를 향하고 계셨고 율법사는 세상의 중심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변두리로 가야만 합니다. 이 세상의 탈출이 쉬운 변방이자 경계선으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다면 세상의 중심부에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고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별세하는 예수님의 자리로 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 바로 영생을 얻기 위한 유일한 이웃 사랑이고 또한 유일한 이웃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염두에 두시고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입니다. 왜 강도 만난 자인지를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마귀에게 속아 영생을 잃었고 인생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우리의 마음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짐으로 아버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절대평강과 절대기쁨의 상태를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서 계획되어진 삶을 순차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갖는 영생을 잃음으로써 인생까지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별세하러 가시는 길을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붙잡음으로써 세상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방인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을 생각하면 이방 땅처럼 낯설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국외자처럼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그 하늘나라가 진짜 좋은 곳임을 받아들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과는 구별된 이방 땅 천국이 가장 좋은 곳임을 알고 나를 온전히 예수님께 드려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일관되게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먼 이방 땅 천국에서 우리가 낯익어하고 익숙해하고 안정감을 얻으려는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방인으로 여기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영생을 위한 이웃 사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희를 택하셔서 십자가를 생활화하게 하시고 이방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이방 땅 천국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변두리 경계에 서 계신 예수님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방인이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가서 영생을 얻고 인생을 얻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