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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잃은 영생과 인생 되찾기 실례_태승철 (누가복음10:38~42)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28|조회수8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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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잃은 영생과 인생 되찾기 실례>의 줄거리:

우리 각자는 강도 만난 자입니다. 그래서 잃은 것이 영생과 인생입니다. 마음에서는 영원하시고 최고로 좋으시고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영생을 잃었고, 내 삶은 언제나 최선이 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잃음으로써 인생을 잃었습니다.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영생과 인생을 되찾는 실례(實例)를 보여줍니다.

 

잃은 영생과 인생 되찾기 실례

(누가복음 10:38~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잃은 영생과 인생 되찾기 실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잃은 영생과 인생 되찾기 실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는 내용상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마리아의 태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시자 우리의 유일한 이웃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강도 만나 잃었던 영생과 인생을 되찾게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 사랑하기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예수님 사랑하기에 담겨진 영적 원리를 떠올려보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핵심은 도움을 주기가 아니라 도움을 받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강도 만난 유대인처럼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에 대해 물은 율법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도움을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굳이 촉구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의 삶에서 문제는 대부분 도움을 준다는 사람의 손길이 없다는 것이지 절실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는 일에 마다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촉구는 무익한 말씀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굳이 촉구하지 않으셔도 진짜 유익이 되는 도움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진짜 도움을 받기위해서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민의식에 가득 찬 유대인이었기에 자존감과 자부심으로 이방인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국외자로 여기고 개처럼 경멸하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선민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던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가 스스로 세상의 주체가 되려 하는 자부심을 버리고 강도 만난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사에게 진정으로 손길을 내밀고 있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셔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계신 국외자이자 이방인이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생각하고자 했던 자부심과 자긍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이 세상에서는 국외자이자 이방인이셨던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강도 만난 사람인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유일한 이웃이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만이 강도 만나서 잃어버린 영생과 인생을 되찾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오늘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의 기록을 통해 베다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동생들이었습니다. 부모 없이 성인이 된 세 명의 오누이가 한 집에 살고 있었고 이들은 예수님과 이미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들이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집안으로 맞이하였던 것이 이 사건의 시작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하고자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분주하게 일하는 동안 동생 마리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의 마리아는 얌체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남자라지만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시다 여겨질 정도입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을 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마르다를 뻔히 보고 계시면서도 오히려 가만히 말씀만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치가 없으셔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바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 상태입니다. 40절을 보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르다를 향하여 41~42절에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는 대상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주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페리에스파토(περιεσπᾶτο)는 ‘사방으로 끌어당기다, 분산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르다의 마음이 여러 가지 관심사에 의해서 사방으로 분산되어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 ‘근심하다’라고 번역된 토뤼바제(θορυβάζῃ) 또한 ‘군중을 흐트러뜨리다’라는 뜻이며, ‘염려하다’라고 번역된 메리조(μερίζω)도 ‘흩어지다, 나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모두 주의력과 의식이 분산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너는 지금 나와 제자들을 대접하고자 온갖 일들에 주의력과 의식을 분산시키고 있다. 네가 책임지고자 하는 만큼 너의 주체성은 최고조로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너의 주체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은 실제로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너의 주의력과 의식을 쓸데없는 일에 분산시켜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이러한 의도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수고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말씀에 상처받을 사람은 마르다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또한 마르다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해왔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 매몰차고 상처가 됩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판단 기준에서는 손님 대접을 위한 마르다의 열심보다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열심을 훨씬 더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얌체 같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마리아가 100점이고 책임감이 넘치고 손님을 대접하고자 정성을 기울인 마르다는 0점이라니 참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도움을 받아들인 강도 만난 사람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마리아의 모습은 스스로를 강도 만난 사람과 동일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마르다는 여전히 스스로 할 일이 많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치 강도 만난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의식과 주의력을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을 귀한 손님이라 여겼다면 당연히 마르다처럼 분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이 일 저 일 바쁘게 대응하고 처리해나가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의식의 분산이고 주의력이 다양한 관심거리에 나누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마리아는 모든 상황을 등지고 예수님께 의식과 주의력을 집중합니다. 이것이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의 자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주체성으로 가득했던 마르다에게는 강도 만난 사람의 자각이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로 만난 것이 아니라 대접해야 할 손님으로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어도 스스로를 도움 받을 필요가 없는 자로 여기는 한 예수님은 도움을 주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엿하게 독립된 주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결코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순간에는 단 하나의 방식만이 그 만남을 가치 있게 합니다. 그 방식이 바로 강도 만난 사람의 자각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내미시는 도움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미시는 도움은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진 자들에게만 유효합니다. 이러한 자각을 가졌다는 것은 주어진 사람이나 일이나 문제에 대해서 주체성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강도 만나 죽게 된 상태에서는 어떠한 주체성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자신의 죽고 사는 문제를 일임할 수밖에 없었듯이, 우리는 예수님께 죽고 사는 문제를 온전히 바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생사의 문제를 일임 받은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그 이튿날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지불하였습니다. 당시의 여관비는 1/32 데나리온이었으니 요새 돈으로 환산하자면 하루 숙박이 십만 원인 숙소에 640만 원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리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으리라고 합니다.

강도 만나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일임한 결과가 이와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현실에서 표현된 것이 바로 마리아의 얌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이 분주히 움직일 수도 있었습니다. 바쁜 상황을 눈여겨보고 의식하고 관심을 쏟아부어서 할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마리아는 얌체같이 등을 돌린 채 예수님께 모든 의식과 주의력을 집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현장에서 강도 만난 자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유익함을 자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탄이라는 강도를 만나 영생을 잃고 인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생을 잃었다는 것은 마음에서 유일하게 최고로 좋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생을 잃었다는 것은 나의 삶을 최선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끊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최선의 상황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잘 풀리는 상황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최선으로 이끌어 가시는 전지전능하심에서 나오는 계획입니다. 이러한 영생과 인생을 잃어버린 사람이 바로 강도 만난 자입니다.

율법사는 스스로의 행실로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강도 만난 자로서의 자각을 갖지 못했습니다. 어엿이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주체적 행동을 통하여 영생과 인생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며 강도 만난 자와 같이 되기를 요청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의 상태는 의도치 않게 주어지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지면 능동적으로 사랑해야 할 이웃도 없고 사랑할 수 있는 이웃도 없습니다. 내가 대처해야 될 일도 문제도 상황도 없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진 채 할 수 있는 일이란 오로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생과 인생을 회복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하거나 문제에 대처하는 것은 모두 내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주체성을 가지시고 해나가실 일이 됩니다. 그렇기에 나의 주체성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평생 해야 되는 일은 강도 만난 사람의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만남과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상대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자발적으로 누군가와 만나고 어떤 일들을 해나가기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열심히 일했던 마르다는 책망하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였던 마리아는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관계하는 것이든 문제에 대한 것이든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반드시 사마리아 사람으로 등장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마리아 사람으로 등장하신 예수님께만 주의를 집중하면 됩니다.

 

이러한 본문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도 마리아처럼 하는 것이 제일 좋다. 너는 손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임감과 부담감을 따라 주체성을 활성화시켰지만 그것은 0점짜리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너희 집에 들어왔으니 네가 의식을 집중해야 될 대상은 나다.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나에게 의식을 집중하지 않고 대체 무엇에 의식을 분산시키고 있는 것이냐?

먹을 것이 중요하다지만 나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네가 나에게 의식을 집중한다면 나의 주체성이 너의 집안일까지도 지배해나갈 것이다. 내 말을 듣다가 필요하다면 내가 너에게 일을 지시할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찾으면 비로소 그때 움직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손님 대접에 대해서는 주체성을 발휘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질 수 없고 내가 주는 구원 또한 받을 수가 없다. 너의 마음에는 여전히 하나님 대신에 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생을 잃은 것이다. 또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에 삶에 대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을 수도 없게 되어 인생도 잃게 된다.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강도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책임감과 부담감을 감당하는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한 자들은 내가 영생과 인생을 구원하고자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를 받아들인다면 내가 주체가 되어주겠다. 내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으로써 너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을 짊어져주겠다.” 이것이 본문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를 보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께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이 집중되어야 할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가 의식을 집중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깔때기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말은 소리일 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주체성의 본질임을 의미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예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동안에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삶의 영역 구석구석으로 예수님이라는 깔때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하심과 계획이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 사람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일임했을 때에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의식을 집중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영생을 위한 깔때기가 되어주십니다. 또한 나의 인생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임하는 깔때기가 되어주십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집과 같은 상황 속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현장에는 나의 마음을 분산시키고 주의력과 의식을 빼앗아 가려는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 못하게 된 것과 강도 만난 자가 꼼짝 못 하는 상황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로서 도움을 주시려고 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중에 일어난 연쇄 사건으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도 세상에서 버림당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세상이 스며들어온 나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너도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러한 말씀을 따라 세상에 물든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그럴 때에 부활에 자리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너도 나와 함께 부활하고 이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소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 말씀을 따를 때에 우리의 마음은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오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주의를 집중하고 의식을 집중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영생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인생 또한 회복되게 됩니다.

 

언제나 우리의 삶은 마르다의 상황과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바쁘게 움직이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자각을 가지고 세상을 등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일들에 대한 생각이 스며들어 올 때 예수님께 의식을 집중하면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마음 안으로 들어와 영생은 회복될 것이고 절대기쁨과 절대만족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또한 나의 삶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주권과 지혜와 뜻과 계획이 임하면서 인생이 회복되는 삶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마리아의 얌체처럼 보이는 모범을 따라 이 세상에서 마음을 잡아당기는 모든 일들을 등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 주의를 집중하고 의식을 붙잡아 맴으로써 예수님 깔때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영생을 되찾고 또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인생을 되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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