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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아버지만 소원하고 싶은 소원_태승철 (누가복음 11: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1.30|조회수8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버지만 소원하고 싶은 소원>의 줄거리:

보고 듣는 것과 몸으로 접촉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하늘의 아버지만을 소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주기도의 첫 번째 간구는 다름 아닙니다. 오직 365일 24시간 일 분 일 초도 예외 없이 하늘의 아버지만을 소원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표현합니다.

 

아버지만 소원하고 싶은 소원

(누가복음 11:1~4)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버지만 소원하고 싶은 소원>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버지만 소원하고 싶은 소원’

본문은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주기도입니다. 누가는 마태복음에 비해 주기도를 단순화시켜서 전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누가의 기록이 마태의 기록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원형에 가깝다고 추측합니다. 물론 마태도 누가도 모두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주기도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태복음을 볼 때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에 충실하면 되고, 누가복음을 볼 때에는 누가복음 주기도에 충실하면 됩니다. 때에 따라서 마태의 주기도로 기도할 것인지 누가의 주기도로 기도할 것인지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누가의 주기도는 단순한 만큼 기억하기가 쉽고 그 의미 또한 보다 명확하게 전달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기도가 산상수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초기에 해당되는 부분에 주기도를 위치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주기도를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9장 51절에서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 이후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 중에 있었던 사역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역에 대한 내용이 무려 19장 27절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복음이 24장까지 있는데 그중에서 열 장을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별세 즉 엑소도스(ἔξοδος)가 의미하는 대로 출애굽과 같은 출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출세상은 하늘승천으로 이어지며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이루게 됩니다. 누가는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신 사건을 별세를 위한 여정에 포함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별세의 사건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또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기도에 대한 오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흔히 주기도의 앞부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라 여겨지고, 뒷부분은 삶에 대한 개인적인 간구에 속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간단히 말해 앞부분은 공적인 기도이고 뒷부분은 사적인 기도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투적인 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기도는 첫 번째 간구가 나머지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마치 십계명에서 첫 번째 계명이 나머지 아홉 계명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계명을 위하여 나머지 아홉 계명이 따라붙는 형태입니다. 주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절에 기록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에 나머지 내용들이 부차적으로 따라붙는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첫 번째 간구입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기도가 참으로 정교하게 하나로 짜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서는 4절까지 다섯 개의 간구가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3절을 보면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가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3절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과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구절이 상응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구절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상응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구절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에 종속됩니다. 첫 번째 내용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두 번째도 성립할 수 없는 종속관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두고 누가의 주기도에 대한 기록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그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과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을 위해서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내게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면 그 증거로 저는 제게 잘못을 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의 죄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 삶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 상황이 혹시 세상적인 기준에서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주의 기도를 풀어볼 때 나타나는 온전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 번째 간구에 집중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아버지여 언제든 오직 아버지 한 분만을 소원하게 되기를 소원하나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만 소원하는 상태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첫 번째 기도에서 드러나는 중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갖기를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고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주기도는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소원하는 것을 소원하도록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에 주기도는 영생을 얻고 인생을 획득하는 필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봅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공백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만 채워질 수 있는 마음 공백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는 불변의 요소입니다. 이 공백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1분 1초도 빼놓지 않고 작동하는 힘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공백을 채우고 싶어 하는 흡입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흡입력이 모든 사람에게 본질적 욕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무엇을 소원한다, 무엇을 바란다, 무엇을 희망한다, 무엇을 소망한다를 비롯하여 어떤 단어로 표현되든지 “~하면 좋겠다.”라는 욕구는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공백상태에서 흡입력이 발동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다양하게 목표물을 설정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건강하면 좋겠다고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기를 바랍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의 형통을 바랍니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승진하거나 월급이 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뉴스를 보면 정치권이나 나라에 대해 바라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욕구의 형태는 다양하고도 끝이 없습니다. 큰 소원이든 작은 소원이든 지속되는 소원이든 일시적인 소원이든 모두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생기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아서 공백상태의 마음에서 나오는 흡입력이 크고 작은 소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을 향해 아무런 소원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봅니다. 돈이 없어서 크게 불편을 겪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돈이 아무리 없어도 돈을 소원하지 않습니다. 또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면 그러한 상황에서도 건강에 대한 소원은 생기지 않습니다. 또 가족의 형통을 바라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자 더는 가족의 형통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대표적 사건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순교현장에서 하나님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몸을 돌로 내리쳐 죽이는 동안에도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데반 집사님이 소원했던 것은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이 용서받기를 바라는 중재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진 자들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 생긴다면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마음의 공백에서 나오는 흡입력이 세상에 대한 소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로부터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만드신 본래 의도대로 하나님을 소원하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만드실 때 마음의 공백도 만드셨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은 아버지께서 들어오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오니 창조의 의도대로 마음의 흡입력은 오직 아버지만을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한 분만을 소원하기를 소원합니다.”라는 기도입니다.

 

한편 이렇듯 아버지를 소원하기를 소원하는 기도에서 중심이 되는 단어는 바로 ‘이름’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원할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름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상태를 무서워하여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워보고자 돈을 소원합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발산되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으면 마음은 실제 돈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라는 이름을 붙잡을 때에 건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제 상태를 얻기 위하여 계획하고 추진하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흡입력에서 비롯된 소원은 이름을 붙잡게 됨으로 구체화됩니다. 이름을 통과하여 나오는 흡입력은 그것을 얻기 위한 계획과 추진과 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구조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의 흡입력이 발산되는 입구에 위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흡입력이 나오는 마음의 입구에 있게 하셔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구분됨을 의미합니다. 칼로 잘라내어 구분하듯이 마음의 흡입력이 빠져나올 때 하나님 이름 외에는 모두 칼로 잘라내서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이름도 잘라내야 합니다. 자녀의 형통이라는 이름도 잘라내야 합니다. 회사에서의 승진이나 월급인상이라는 이름도 잘라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흡입력이 나오는 입구에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이 남게 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동료와 상사들이 하나같이 승진이나 월급인상이라는 이름을 마음 입구에 두고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 상황과 실제 대상을 향해 쫓아갑니다. 그럴 때 나는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오직 흡입력이 나오는 마음 입구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음으로써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가족의 형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소원하지만 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을 소원하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구도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입니다.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그곳에서 모든 동료 상인들은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하루 매출의 증가를 소원하며 움직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흡입력이 발휘되는 마음 입구에 하나님의 이름을 둡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외에는 다 칼로 잘라버리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겨지는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그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됩니다. 물건을 팔면서도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시기만을 소원합니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원하는 상태가 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주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을 갖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갖기를 소원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소원이라는 특성에 있습니다. 세상에 돈을 많이 벌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원하는 만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백 사람 중에 한두 명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돈을 벌고 싶다는 소원만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부모들은 자녀의 형통을 소원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소원대로 형통하기만 하고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나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이러한 부모들은 평생 자녀의 형통을 소원하는 형태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간구하신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생 이 세상을 소원하며 살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야 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차이점이라면 하나님만을 소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돈을 소원하는 사람은 때로는 자녀의 형통을 최우선으로 소원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소원하다가도 건강이 안 좋을 때는 건강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흡입력이 빠져나오는 마음의 입구에는 모든 세상적인 소원을 위한 이름들이 다 제거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만이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치 구약시대 성전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만이 존재했던 것과 같습니다.

흡입력이 발휘되는 순간에는 마음의 입구에 있는 이름을 거치게 됩니다. 그럴 때 아무리 세상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결핍된 상황에 있을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곧 구분되는 것입니다. 마치 칼로 잘라서 제거하듯이 다른 이름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이로부터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을 직접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가 유지되기를 소원하도록 가르쳐주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돈을 소원하는 사람이 돈을 못 벌면서도 소원을 지속하는 이유는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소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실제의 모습입니다. 자녀를 대하든 배우자를 대하든 직장에 있든 학교에 있든 정치를 하든 365일, 24시간, 1분 1초도 예외 없이 마음의 흡입력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흡입력의 유일한 표적을 하나님으로 정한 상태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마음 준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내가 아침에 눈을 떠서 침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면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때 가족들을 마주하기 전에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 가족들을 마주하기에 앞서 내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족을 대하는 중에도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 가족을 대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내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들어가기 전에 “직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승진과 월급인상을 소원하며 뛰지만 오직 아버지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소원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오시옵소서.”라는 직접적인 기도는 소원 기도가 끝나고 삶에 나가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삶의 현장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아버지를 직접 소원하는 상태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버지를 소원하는 상태로 삶의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기도인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에는 직접 아버지를 소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버지가 필요하신 만큼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채우시고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실 것입니다. 이 주권을 행사하심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이름을 붙잡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을 붙잡았다는 것은 곧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이름을 붙잡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돈을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에서 돈이라는 이름을 소원하였다면 이미 하나님을 등져버리고 돈과 간음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자녀가 형통해서 그러한 상황에 취한 것이 아닐지라도 마음에서 자녀의 형통을 소원하기만 할지라도 이미 마음에서 간음은 성립하고 더럽혀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흡입력이 나오는 마음의 입구에 다른 이름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만 들어있었던 것처럼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존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마음의 흡입력이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무엇인가를 당기기 전에 이름조차 붙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에는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응답 없는 기도를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도 삶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저의 마음이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시간을 끝내고 세상으로 나갈 때에 아버지만이 들어오실 수 있는 마음의 소원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다면 기도대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반드시 응답 또한 존재합니다.

누가가 별세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 주기도를 포함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제가 오직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소원으로 살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주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응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할 때에 세상의 이름을 붙잡고 소원하는 나를 부인하게 됩니다. 돈을 원하는 나, 건강을 원하는 나, 승진을 원하는 나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거부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나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동일시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잠깐이라도 돈이나 승진이나 건강을 소원했다면 음욕만 품어도 간음을 행한 것이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그 간음을 행하여 더러워진 나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동일시할 때에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한 나는 세상에 대해 어떠한 소원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또 주님은 승천하셨기에 우리 또한 주님을 따라 하늘을 향해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과정에 의식을 집중하는 동안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소원한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가정에 있을 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로 오실 것이고, 직장에 있을 때도 아버지를 소원하고 아버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함으로써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려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오시고자 하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자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으니, 너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마치라.”는 것이 오늘 살펴본 주기도에 담겨진 내용입니다. 이 준비가 바로 아버지에 대해 소원을 갖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소원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라는 것이 주기도의 첫째 구절이고 주기도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를 따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고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가는 곳마다 언제든지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마음상태가 유지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주님이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님에게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진정으로 주님의 승천의 방향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소원하게 하시고, 그러한 마음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언제든지 아버지가 내 안으로 들어오시고자 할 때 아무런 방해나 장애도 느끼시지 않는 상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하루를 시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장소가 바뀔 때마다 상황이나 사건이 바뀔 때마다 만나는 대상이 바뀔 때마다 이러한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마음상태로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처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주님이 별세하셨으니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의 과정을 따라 주님과 동일시하고 주님께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마음상태를 언제 어디서나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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