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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십자가 유령(?)들의 주기도_태승철 (누가복음 11: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02|조회수6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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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유령(?)들의 주기도>의 줄거리:

34년째 공연 중인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흉측한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오페라하우스에 숨어 사는 한 남자를 유령이라고 부릅니다.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비유적으로 의미를 넓혀서 보면 십자가 생활화하는 모든 사람은 유령이고, 이 십자가 유령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주의 기도입니다.

 

십자가 유령(?)들의 주기도

(누가복음 11:1~4)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유령(?)들의 주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유령(?)들의 주기도’

무려 34년 째 계속되고 있는 뮤지컬 공연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입니다. 작중에서 에릭은 흉측한 얼굴로 인해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고 있습니다. 유령이란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을 의미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상이나 기척이나 흔적은 있는데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유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릭은 실존하는 사람이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였기에 유령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유령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염두에 두자면 주님의 기도는 십자가 유령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기도를 문자적으로 외울 수는 있겠습니다만 영생을 얻고 하나님께서 본래 계획하신 인생을 찾는 필살기로서의 주기도는 오직 십자가 유령들만의 기도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령은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유령이란 인간으로서 존재하기는 하나 인격적 핵심이 빠져버린 껍데기의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실체가 되는 인격적 핵심이란 마음의 공백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격체로서 살아있다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소원하기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바라고 욕구합니다. 소원 바람 욕구는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흡입력의 현상입니다. 비어있는 마음에 무엇인가를 빨아들여서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격적 핵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할 때는 이러한 상태에 변화가 생깁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몸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지만 인격의 핵심인 공백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부활의 자리에 도달한 상태에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의 실존입니다. 몸은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의 핵심이 십자가를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에 머물고 있기에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존재하지만 실체를 찾을 수 없는 유령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에릭은 오페라 하우스에 숨어 살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흔적만을 남기는 유령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 또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한 자리에 이르게 될 때에 마음은 하늘에 가 있고 몸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유령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 번째 간구는 소원에 대한 기도라 말씀드렸습니다. 소원하기는 이름 붙잡기와 추구하기의 두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집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작용해서 소원이 생기면 먼저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손에 넣고자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소원의 대상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칼로 베어서 잘라내듯이 구분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에서 다른 모든 이름을 제거하고 하늘에 계신 실제 존재만 가지고 싶어서 마음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의 자리로 가지 않고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을 수 없으며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였고 또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추구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소원하기는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말씀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자리에 이르시기까지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이 과정에 나를 동일시할 때에 마음에서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지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마음의 만족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접하게 되어 그러한 자신이 부인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모습에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돈을 소원하던 마음이 죽어야만 함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에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이제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마음에 담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담았다면 비록 그 대상이 자녀일지라도 마음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부활하여 깨끗해진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추구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의 입장에서 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여,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의 자리를 거쳐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자리에 머물면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자리는 십자가를 거쳐온 자리입니다. 즉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을 붙잡고 소원하던 마음이 죽어서 도착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부활의 상태에서만 삶은 영위되어야만 합니다. 직장에 나가기 전에, 가족들과 마주하기 전에, 다른 모든 일에 앞서서 주기도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주기도의 의미를 재현함으로써 부활의 자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이어지는 간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소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자 돈을 벌어서 마음을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소원을 유지하며 관계를 맺고 일을 해나갑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정에서는 남편도 되고 아내도 되고 부모도 되고 자녀도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모로서 자녀의 형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마음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동창도 만나도 남편도 대하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자리에서 산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하나님만을 추구하면서 직장에도 나가고 가정을 돌보고 학교생활도 하고 군대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서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이어지는 간구가 나타납니다.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뜻이 삶에 내려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본래의 계획대로 임하기를 바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두 가지의 간구가 이어지는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첫 번째 간구를 통해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때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마주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마음은 십자가를 거쳐 세상 바깥으로 나와 있고, 몸은 세상에서 배우자와 만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나와 배우자 사이에 십자가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자를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 자체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돈을 소원하는 사람은 돈을 통해 배우자를 마주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십자가를 안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이 항상 존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배우자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까요? 인격의 실체가 십자가를 지나 세상 밖의 부활에 자리에 있습니다. 십자가가 나와 배우자 사이의 경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바라볼 때 나는 배우자에 대해 죽은 자라는 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죽은 자는 배우자에 대해 소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만약 배우자에 대한 소원이 생긴다면 여전히 죽지 않았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지도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배우자를 볼 때 나의 뜻이나 계획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나의 소원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에 배우자와 연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몸은 배우자와 마주하고 있으나 인격의 실체가 빠져나가 버린 유령과 같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간구는 “배우자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것뿐입니다.

십자가를 놓아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는 별세의 과정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한 부활의 자리에서는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대로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배우자를 마주한다면 나의 의식은 십자가를 통해 아내에게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를 통과할 때에 남는 것은 죽은 자라는 의식뿐입니다. 몸만 살아있는 유령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 대신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임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의 의미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빠져나와서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만이 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다고 믿기에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 자녀를 마주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자녀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에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의식은 죽은 자라는 의식뿐입니다. 유령아버지가 되고 유령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와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 대신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자녀에게 임하기를 바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직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출근하기에 앞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기도를 드리고 직장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부활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출근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동료들은 승진이나 월급인상을 소원하지만 부활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는 그것들이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며 승진에 대한 소원도 월급인상에 대한 소원도 잘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 밖에 나가 있는 유령직원의 상태입니다. 이때 할 수 있는 일이란 회사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이 세상을 탈출한 사람이라면 회사를 바라볼 때 십자가를 거쳐서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할 때에 회사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고 유령입니다. 에릭이 오페라 하우스에 숨어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나는 십자가 뒤에 숨은 유령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사라는 인간 사회에 참여할 수가 없고, 회사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기도의 첫 번째 기도는 부활의 자리에서만 가능한 내용입니다. 오직 부활의 자리에서만 세상의 다른 이름들이 잘려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세상에 남아있는 몸에 대해서는 유령과 같은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은 세상에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십자가도 보이지 않고, 나의 마음이 십자가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 바깥으로 나온 유령과 같은 상태가 되어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관계는 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자녀에 대해서도 직장에서도 몸이 있기 때문에 관계는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누군가가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잘못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내게서 어떠한 반응이 나타나는지를 통하여 내가 지금 부활의 자리에 남아서 유령으로 살고 있는지, 여전히 세상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유일한 가치로 믿고 구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내게 손해를 입히거나 잘못을 했을 때 상실감이나 피해의식이나 손해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십자가 너머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이 진정한 나의 몫입니다.”라고 소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내 것이 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게 잘못했다고 해서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유령 상태에 대한 증거가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 대해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을 갖게 된다면 상대를 괘씸하게 여기고 보복이나 원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은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십자가를 지나서 세상으로 나갔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원망은 생기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에 있게 되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임재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였으나 스데반 집사님은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소원은 하나님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지 않는 한 손해의식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몸을 잃는데도 손해의식과 피해의식과 상실감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중재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간구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나 세상 밖으로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몸과 관련된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세상의 기준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상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은 맞으나 때로는 돌에 맞아 죽는 순교가 일어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빌립보 감옥에 갇히는 형태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보자면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시험에 들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사람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피해의식이나 손해의식은 세상을 떠난 마음에서는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인격의 핵심인 공백의 마음이 십자가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가 하나님만을 유일한 가치로 믿으며 소원하는 상태이고, 이 땅에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만이 내려오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생각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시험에 들었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부활의 자리로 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혹은 부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유지되지 못해서 마음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의 문제와 시험의 문제를 보면 내가 지금 부활에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기도를 다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거쳐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서 오직 아버지의 이름 하나만 붙잡고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십자가 너머의 인간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관련된 관계와 일들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제가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다는 증거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유지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에 살 때 아버지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붙잡았던 죄악을 말끔히 씻어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저의 마음이 부활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있음으로써 결코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고, 아버지의 주권에 반항하고 대항하는 반역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기도문은 바로 이러한 내용의 기도인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되는 주기도는 이 세상에서 유령이 되는 기도입니다. 인격의 실체인 공백의 마음이 부활의 자리로 빠져나간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남은 몸에 대해서는 유령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이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나머지 간구 또한 유령의 상태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이 십자가 너머 세상 밖에 있는 부활의 자리에 머무는 유령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날마다 주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세상 밖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에 나의 자리를 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세상에 대해서 유령으로 살아가며 오직 마음의 소원이 하늘만을 향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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