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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서 주심과 쓰심>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려고 하늘에서 예비하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지요. 주실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쓰실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내가 얻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쓰시지도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내게 주어진 것들 중 주시는 것과 쓰시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심과 쓰심
(누가복음 11:9~13)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심과 쓰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심과 쓰심’
우리는 육체의 목숨이 유지되는 동안에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있고 앞으로 주어질 것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대상들을 내 것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쓰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나의 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영역 안에서 쓰시고자 보관해 두시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기준으로 삼아 이것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죽었음에도 여전히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내 것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육체가 죽었을 때 내게서 없어질 것이라면 내 것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위한 것들입니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것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갖고자 떼를 쓸 때 삶은 엉망진창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성공이나 인기 등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보편적 가치라 여겨집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나 자녀가 그 대상이 될 수 있고, 부모나 형제자매 혹은 친구와의 관계 또한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육체가 죽을 때 없어질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내 것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부터 연관된 모든 가치들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준비하셨고 동원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필요 없는 것이라면 당연히 동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분명히 함으로써 본문의 말씀을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아버지의 핸드폰을 가지고 놓지 않는 광경을 상상해봅니다. 핸드폰은 아버지가 일하기 위한 수단이지 아이의 장난감으로써의 용도는 아닙니다. 대신 아이에게는 집안의 모든 장난감과 인형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동일한 광경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설령 그 대상이 배우자일지라도 내 몸이 죽으면 관계할 수 없기에 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핸드폰으로 뜻을 전달하는 것처럼 배우자는 하늘 아버지가 당신의 뜻을 이 땅에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용하고 계시는 핸드폰과 같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가 몸의 연관성 안에서 당신의 뜻을 표현하시기 위해 쓰시는 핸드폰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한다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다만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것들을 내 것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동안에 삶에는 평강과 기쁨과 만족이 사라지고 꼬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것으로 주신 것에 대해 구하고 찾고 두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결코 아버지가 쓰시려고 하는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는 안 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현재명령형입니다.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살펴보면서 소원이라는 단어를 통해 마음의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발생하는 입구에서 어떤 이름을 붙잡을 때에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을 손에 넣고 싶어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원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하라는 말씀은 곧 내게 없는 것 즉 결핍을 보라는 뜻입니다. 찾으라는 말씀은 그 결핍된 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궁리하라는 뜻입니다. 두드리라는 말씀은 결핍을 보고 그 결핍을 채울 대상을 찾았다면 그것을 실제로 손에 넣기 위해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미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지 찾아내고, 찾았다면 실제로 그것을 얻고자 돌진하고자 합니다.
이렇듯 이미 모든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새삼스러운 요청을 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누가의 탁월함이 느껴집니다. 앞서 본 9장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 또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위해 가시는 여정에 주기도를 가르치신 것과 강청하는 기도를 포함시켰으며, 이에 더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가르침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자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가르침을 주님의 세상 탈출과 연관시켜 생각하기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본문은 별세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이러한 요청을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대상을 거저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정말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적 과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과정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부활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의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라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인정함을 통해서 세상을 탈출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세상을 탈출하기 전에는 마음이 이 세상에 젖어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세상 가치들의 이름을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구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 아래에서 돈을 어떻게 벌지를 생각하다가 장사가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실제로 장사를 할 방법과 수단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두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모습은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지 못한 채 세상 안에 머무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은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때에 더러워진 마음을 부인하지 않고 묵인하고, 세상에서 얻고 싶은 대상을 찾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돌진하는 악을 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세상을 빠져나가는 길을 같이 가는 자들에게만 유효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한 자리에 도달한 상태에서만 비로소 구하고 찾고 두드림은 가능합니다. 죄는 마음이 세상에 젖어있는 상태입니다. 젖어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된 상태입니다. 악은 이러한 죄의 상태를 부인하지 않고 묵인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안에 마음이 머물면서 탈출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 안에 있는 동안에는 구해서는 안 되고 찾아서도 안 되고 두드려서도 안 됩니다. 죄로 더러워진 상태가 묵인되는 동안에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악이 자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세상을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세상에 주저앉은 채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이 가르침을 예수님의 세상 탈출과 연관시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은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활에 자리에 구하고 찾고 두드릴 대상을 예비해두셨습니다.
설에 아이들이 세배하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서너 살 된 아이들은 아직 세뱃돈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세뱃돈을 봉투에 담아 준비해둡니다. 아이는 세뱃돈이라는 개념을 모르기에 딴짓만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기다리다 못해 아이를 데려다 앉혀놓고 억지로 세배를 시킨 후에 세뱃돈을 쥐어줍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신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활의 자리에 도달한 자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아버지가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을 반드시 네 것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좋은 것이란 바로 성령님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악할지라도’라는 표현에는 ‘처음부터 악한 자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의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악하다는 것은 세상을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이 세상에 젖어있는 죄의 상태를 묵인한 채 세상에서 마음 채울 대상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죄악을 행하는 중에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물론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육체를 기준으로 좋은 것을 주고자 합니다. 육체의 기준에서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란 결국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먹을거리입니다. 악함으로 인하여 정신적 차원이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좋을 것을 줄 방법이 없기에, 그나마 육체적으로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데 그 대상이 먹을거리 정도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 또한 과잉될 때에 자녀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기에 악한 자로서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없는 셈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린 생선과 삶은 달걀은 기본적인 반찬거리였습니다. 기껏해야 끼니를 채울 수 있도록 뱀 대신에 생선을 주고, 전갈 대신 달걀 삶은 것을 주는 정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가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한 자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문제는 마음이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하기 전에는 텅 비어있는 마음을 세상의 가치들로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건강하고 오래 살면 만족하겠다, 돈 많이 벌면 기쁘겠다, 자녀들이 형통하면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에 자리에 이르고 나니 세상의 가치들로는 결코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따라온 예수님을 보니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하늘로만 길이 있어서 쳐다봤더니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제 마음 채움을 위하여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실제로 갖고자 추구하는 것이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질 때에 몸은 죽어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령님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복사판이십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2020년 12월 3일에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다면, 그 생각이 그대로 복사되어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0장 38절을 보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복사판이신 성령님이 들어와 계셨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복사판이신 성령님이 들어와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을 복사하신 것과 똑같은 영을 우리에게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부활에 자리에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준비하신 성령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배를 모르는 손자를 억지로 앉혀놓고서라도 세배를 시키고 세뱃돈을 쥐어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부활의 자리에 설 때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으신 성령을 너희 마음 공백에 넣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령님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능력을 성령과 동일시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능력만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능력과 성령을 동일시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으로 기뻐하셨던 것과 같이 기뻐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성령님이 들어오시면 나의 몸과 연관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기쁨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강과 만족함에 요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나의 몸이 죽어도 영원토록 내 것으로 주어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 공백에 들어오실 때는 몸과 연관된 삶의 영역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주권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마음이 절대기쁨, 절대만족, 절대평강 속에 머물게 되면 몸과 연관된 영역에서는 완벽한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성령을 얻기 위하여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탈출해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기만 하면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음 채움을 위해 위의 것이 필요함을 느끼는 것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실제로 갖고자 두드릴 때 성령을 주십니다.
이러한 일은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을 구할 때 성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관계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똑같이 복사하신 영이 바로 좋은 것으로서의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셔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계신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에 이른 사람에게 이 세상 안에 남아있는 몸과 몸의 연관성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표현하시기 위한 핸드폰 같은 것들입니다. 건강이든 가족의 형통이든 재물이든 승진이든 세상 안에 있는 것인 한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대상이 아닙니다. 몸이 죽으면 없어질 것들이고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창조적인 섭리를 위해 쓰실 것들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은 내가 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동원하실 것이고 계획을 따라 사용해 가실 것입니다.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릴 대상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따라 세상 밖으로 나온 마음이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은 당신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령을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또 내일의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오직 내 것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되신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남아있는 이 세상에는 몸부터 시작해서 몸에 주어진 모든 관계를 하나님께서 쓰시면서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상황 전체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할아버지가 손자 머리를 붙잡고 세배를 시키듯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그러기 위하여 세상을 빠져나와 부활에 이르라고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게 해주셔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내게 없는 것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을 찾게 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두드리며 간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때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을 주심으로 절대기쁨 절대만족 절대평강을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너머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쓰시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