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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마음은 사위일체 몸은 장갑_태승철 (누가복음 11:14~2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05|조회수60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은 사위일체, 몸은 장갑>의 줄거리:

때와 장소와 일에 따라 다양한 손가락 장갑이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그곳을 향하시는 하늘 아버지 주권의 손가락 장갑이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 있는 마음이 부활의 자리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가 되면 세상 안에서 내 몸과 혼은 장갑 됩니다.

 

마음은 사위일체 몸은 장갑

(누가복음 11:14~23)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은 사위일체 몸은 장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은 사위일체 몸은 장갑’

마음은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고 몸은 하나님의 손가락장갑이 된다는 뜻의 제목입니다. 본문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치신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 있는 기적의 현장을 참관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사회지도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세불은 사탄의 다른 이름입니다. 사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에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증오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7~18절에서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논리가 터무니없음을 드러내십니다.

한편 이들의 제자들 또한 나름대로 귀신을 쫓기 위한 활동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도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실제로 귀신을 쫓아낼 수도 없었겠지만 적어도 쫓아내고자 하는 시도를 해보았다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겠다는 발상은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비난이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부당한 주장이었음을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20절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헬라어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기회만 있으면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힌트를 얻어 비유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지정의 속성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손가락장갑이 되어있는 상태이셨습니다. 지정의란 곧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통해 나오는 말씀과 감정과 의지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표현되기 위한 장갑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20절의 말씀을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위해 가시는 여정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주기도에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강청하는 기도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간구에 연결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간구는 본문의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내 몸과 지정의를 장갑으로 끼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움직여 가시는 상황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말씀드린 마음이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와 똑같이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마음이 있으셨다는 것은 곧 마음의 공백 또한 갖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마음의 공백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채우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복사판 성령님이셨습니다.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 안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복사판 성령께서 들어와 계시며 삼위일체는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의 몸과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정의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이 상태를 이른바 “마음 따로 몸 따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 상태를 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정의 즉 혼을 통하여서도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는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으로 하나 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22절에서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오실 수 있는 공백이 존재합니다. 이 마음의 공백이 바로 우리의 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마음의 공백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몸을 가지고 계셨고 지정의 속성 또한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을 하늘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끼시는 손가락장갑으로 사용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하신 일이란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은 마음의 공백을 통해서 삼위일체가 유지되는 가운데 예수님의 몸과 혼은 하나님의 주권의 장갑이 되신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수하시고자 하신 것이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혼이 하나님의 장갑이 되셨기에 우리의 몸과 혼도 하나님의 장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이루고 계신 삼위일체 안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우리의 마음이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주권이 끼시는 손가락장갑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삼위일체 안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다른 도움이나 보조수단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셨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영이신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을 만드셔야만 했습니다. 몸을 입은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따름으로 우리의 마음은 삼위일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사건에 나를 동일시합니다. 세상에 젖어있고 세상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고 세상 문제에 대한 생각이 가득한 나에 대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부인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동일시하여 죽은 자로 여깁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그럴 때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이신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복사판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들어와 계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느라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인정한 사람들의 마음에도 임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내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께 임하셨던 성령을 우리들에게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삼위일체에 참여함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참여하게 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부활의 자리에 임한 자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탈출하였기 때문에 또한 십자가를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몸으로 세상을 대하기 전에 의식 속에서 십자가가 먼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에서 나의 주체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있을 때 광교에 하동관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습니다. 이 식당에는 메뉴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기름을 뺀 설렁탕이고 다른 하나는 기름을 빼지 않은 설렁탕입니다. 기름을 뺀 설렁탕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기름을 제거하기 때문에 맛이 무척 담백합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의 자리에서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고 이 세상을 바라볼 때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에 내 시선 속에서 나의 주체성이 빠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곧 나의 주체성이 죽었음을 고백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집안일을 보면 집안일에 대해서도 나의 주체성이 사라집니다. 기름기가 빠지듯이 나의 주체성이 싹 빠져버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고 듣고 만짐에 있어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마주 대하게 될 때 나의 주체성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깨달아지는 바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서 꿈틀꿈틀 움직이듯이 활동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주체성이 완전히 제로가 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눈에 보이는 배우자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이 더 확실하게 보입니다. 자녀보다도 자녀들 위에 임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권이 임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온 천지 삼라만상에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백합화를 보실 때에 아버지의 주권이 더 강하게 느껴지면서 백합화를 입히심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면서도 새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새를 먹이고 계심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얼굴을 만져보면 촉각으로 생김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면 내가 느끼는 촉각에 앞서 하나님께서 내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 참석하시는 분 중에 26살 된 청년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산업자원부에서 제공하는 직업기술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분이 쇠파이프를 절삭하는 공정을 수행하다가 파편이 고글을 뚫고 들어와서 눈을 다치실 뻔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파편이 튀어서 불편한 자기 자신이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오히려 마음에 편안함과 감사를 느낄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그 파편이 눈에 튄 것까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시느냐?”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길을 걷다가 티끌이 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파편이 튄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면 티끌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니 다소 머뭇머뭇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적용해야 되는지 의문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작고 미세한 일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관심과 사랑이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그런 일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난 솜털은 내가 확인해본 적도 없고 세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이 솜털조차 거저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게 하신 것이고 존재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몸에 수억 수조에 이르는 세포들도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면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현미경으로 확대해야만 보이는 바이러스들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역사 되고 있고 만들어지고 있고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애초에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無)인 상태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안에 지구를 만드셔서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없는 상태에서 있게 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장갑 삼으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샐틈없이, 바늘구멍 하나만큼의 빈틈도 없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먼지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별의 숫자도 상상할 수 없이 많은데 하물며 하나의 별에 들어있는 먼지의 숫자를 헤아리시고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면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 아니시겠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먼지와 바이러스 하나까지 알고 계시고 주관하고 계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에 자리에 이를 때에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이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청하는 기도를 가르치시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마음의 공백을 통하여 영이신 하나님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소원이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기를 소원하고, 건강하기를 소원하고, 가족이 형통하기를 소원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모든 소원은 마음의 공백 즉 영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흡입력이 소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은 우리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창세기 6장 3절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육체로 만나는 세상의 가치로 채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 공백의 흡입력으로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을 끌어들이려고 할 때 육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죄의 체질 때문에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멈추기 위해서는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세상 밖에 있는 부활의 자리로 가심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통로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 밖으로 나갈 때 우리 마음의 공백에서 생겨난 흡입력은 세상이 아닌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마음은 세상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 몸은 세상에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마음과 몸이 십자가를 통해 양분돼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의식 속에서 기억된 십자가를 통하여 지정의와 몸은 세상에 남아있으나 나의 마음의 공백 즉 영은 십자가 너머 부활의 자리에 있습니다. 이 상태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시고자 하신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십자가가 의식 속에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제일 우선되고 제일 큰 사건으로 기억하는 중에 영은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마음의 모든 흡입력이 하나님을 갖는 일에 총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몸과 지정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주권이 장갑 삼으시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의식의 중심에서 제일 우선되고 큰 사건으로 서 있어야만 합니다.

 

부엌일을 위해서는 고무장갑을 낍니다. 겨울에는 보온이 되는 장갑을 낍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는 기름이 묻지 않도록 비닐장갑을 낍니다. 의사들은 수술용 장갑을 낍니다. 근로하시는 분들은 고무가 붙은 면장갑을 낍니다. 때와 장소와 일에 따라서 손가락에는 다른 장갑이 끼워지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재정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다면 그에 맞는 장갑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재정문제를 끌어당기고 소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의 중앙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워두면 내 영은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재정문제가 있는데도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 몸과 지정의를 주권의 손에 끼시고 재정문제를 만져가시게 됩니다.

건강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의식에서는 건강문제가 아닌 주님의 십자가가 첫 번째 사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영은 세상을 벗어나 부활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강청하는 동안에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건강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입니다.

의식의 중앙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일 먼저 서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문제나 어떤 상황을 마주할 때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영은 부활의 자리로 보내고 몸과 혼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손가락 장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기준으로 마음 따로, 몸 따로 되고 영 따로, 혼 따로 되는 따로따로의 상태가 되는 것이 온전한 의인의 인격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따라 세상을 탈출한 부활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사위일체를 소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위일체를 이루었다가도 마음에 세상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흡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강청합니다. 이것만 하다 보면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져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고, 내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주권이 끼시는 손가락장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손가락장갑으로 끼시는 상태를 꼭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체험하셨다면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 오셔서 간증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나를 손가락장갑으로 끼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공백의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서 아버지로 절대기쁨과 절대만족과 절대감사를 경험하게 되었다!”라는 간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삶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사건과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보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의식에서 놓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나의 영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자리에 머물게 하시고 그러한 상태에서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마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체성이 제로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의 몸과 지정의를 장갑 삼으시는 일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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