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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힐링 체험의 왕도, 볼 것만 보기_태승철 (누가복음 11:29~3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09|조회수8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힐링체험의 왕도, 볼것만 보기>의 줄거리:

평생 못 볼 것만 보고 살면서 좋은 날 보기를 기대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볼 것과 못 볼 것의 구분 그 자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인생 별 것 없습니다. 볼 것만 보고 못 볼 것은 안 보면 됩니다. 못 볼 것에 한눈파는 한 인생은 그냥 바닥이 없는 함정에 빠졌다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힘드세요? 지치세요? 그냥 볼 것만 보세요.

 

힐링 체험의 왕도, 볼 것만 보기

(누가복음 11:29~36)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힐링 체험의 왕도, 볼 것만 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힐링 체험의 왕도, 볼 것만 보기’

제목은 볼 것을 보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은 보지 않을 때 마음과 삶에는 힐링이 주어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힐링에는 왕도가 존재합니다.

왕도(王道)란 어려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꼭 필요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말은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다른 쉬운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단어와 문장을 외우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에는 왕도가 없다.”라고 한다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발로 뛰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힐링은 나의 마음과 삶이 치유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의 힐링이란 마음이 가볍고 즐겁고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또 삶의 힐링이란 삶의 요소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힐링의 상태를 얻는 것은 어렵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과 삶에 힐링의 왕도가 있음을 비유로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 왕도란 바로 볼 것만 보고, 보아서 안 되는 것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보아서 안 되는 것에 한눈을 파는 한 삶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의식함으로써 볼 것과 보아서는 안 될 것을 구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즉 의식의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눈에 자녀는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눈으로 볼 때 자녀는 보면 안 되는 대상입니다. 의식의 눈이 육체의 눈과 마찬가지로 자녀를 사랑스럽게 보기 시작한다면 마음과 삶은 힐링과는 반대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연애를 하고 있는 남녀의 눈에 애인은 사랑스럽게 보이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눈에서 애인은 보아서는 안 될 대상이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얻었으면 하늘을 소망할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소망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본문의 등불 비유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등불 비유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듯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몸은 방과 같은 공간이고, 눈은 방에 놓인 등불과도 같습니다. 전깃불을 켜면 방이 밝아지듯이 눈이 좋은 역할을 할 때 몸은 밝아지게 됩니다. 좋은 눈과 나쁜 눈을 결정하는 요소는 육체의 눈의 건강상태가 아닙니다. 의식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의식으로 보는 것과 연결시켜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식의 눈으로도 보고 있느냐를 문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4절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란다는 것은 즉 추구함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이 있어서 채워짐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빨아들이려는 힘을 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는 것을’이라는 목적어가 등장합니다. 의식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마음에 흡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등불 비유는 볼 것을 보고 보아서 안 될 것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볼 것을 볼 때에 마음은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는 곧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거워지고 부족함이 없는 행복감으로 가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삶도 빛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삶의 요소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되면 의식이 붙잡고 있는 것들의 기운이 들어가서 마음에는 어둠이 가득하게 되고 삶에도 혼돈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볼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볼 것과 보아서는 안 될 것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곧, 의식으로 포착해야 할 대상이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아서 안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더는 관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실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대상을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흔히 말하기를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가 진행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지금도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보고 계시는 중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섭리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유일한 피조물로써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그러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눈으로 백합화를 보시면서도 의식의 시선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백합화를 입히시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또한 육체의 눈으로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시면서도 의식의 시선으로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의식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존재로 성격을 규정하셨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만을 좋게 여기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래 모든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이 내 스타일이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변화산의 베드로의 반응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기 위한 존재이셨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가 오른손을 들면 예수님도 오른손을 드셨고 아버지가 왼손을 들면 예수님도 왼손을 드셨습니다. 그 오른손과 왼손을 어떻게 쓰실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 되신 분으로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보고 계신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시선에 의식의 시선이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타락하지 않은 분은 예수님뿐이셨습니다. 타락이란 육체의 시선에 의식의 시선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타락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음의 빛이 되어줄 수 없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마음의 기쁨도 없고 삶에 질서도 없습니다.

자연이 질서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인격적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의식의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기운이 들어오게 됩니다. 소나무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소나무로 존재하고, 말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말로 존재하고, 사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사자로 존재하듯이 인간이 자발적으로 의식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때에 하나님이 본래 계획하고 디자인하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인간 본연의 모습이란 하나님의 빛으로 마음이 가득 차고 하나님의 빛으로 삶의 구석구석이 가득 찬 존재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 외에도 마음의 빛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사람을 유혹했습니다. “하나님만 너의 스타일인 것이 아니다. 돈과 자녀의 형통이 너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스타일이라는 것은 좋게 느껴져서 내 마음에 꼭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탄의 유혹을 믿어서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의식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빛이 들어와서 마음은 행복해지고 삶에는 질서가 생깁니다. 이것이 온전한 힐링의 삶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힐링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했습니다. 바로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입니다. 세상은 육체의 눈으로는 보되 의식의 눈으로는 보아서는 안 되는 대상입니다.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조차 육체의 눈으로는 보되 의식의 눈으로는 볼 대상이 아닙니다. 의식의 눈으로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은 의식으로 바라볼 곳이 아닙니다.

 

의식의 눈이 세상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시선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시선의 충돌은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재앙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보고자 하는 나는 돌출되게 밉상이고 악취를 풍기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고 거슬리는 존재입니다.

예를 들어 육체의 눈으로 보는 재정 상태를 의식의 눈으로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정 상태는 하나님께서 이미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나의 의식의 시선이 재정 상태를 향하게 되자 하나님의 시선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충돌이 재정 상태에 대한 가장 큰 재앙이 됩니다. 정부의 경제 정책이 재앙이 아닙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매출격감도 재앙이 아닙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재정 상태에 대한 가장 큰 재앙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육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의식의 시선까지 머물게 된 상황이야말로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재정 상태 또한 보시기에 좋게 이끌어 가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나의 의식의 시선이 재정 상태를 향하는 동안 하나님과는 다른 판단이 생겨나고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재정 상태를 좋은 상태로 이끄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등불비유의 핵심입니다.

자녀에 대해 가장 큰 재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녀는 육체의 눈으로 보고 있지만 의식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백합화를 보시면서 아버지를 의식하셨듯이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 자녀를 보면서도 의식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의식의 시선이 육체를 따라 움직인다면 이것이야말로 자녀 인생에 가장 큰 재앙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지속적인 의식의 시선이야말로 자녀에게 가장 큰 재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악한 일은 하나님의 시선을 대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선입니다. 인간이 손을 대는 일마다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나고 보시기에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의식의 눈이 붙잡고 보고 있는 상태가 나에게 관계된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재앙이 됩니다. 힐링의 반대 상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의식의 시선이 육체의 시선을 따르는 것이 바로 원죄의 체질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곳은 하나님뿐입니다. 의식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는 말씀대로 마음의 공백에 빛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가벼워지고 기쁘게 됩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행복감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몸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빛이신 하나님의 뜻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유전죄의 체질로 인하여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죄란 육체의 눈으로 보는 대상을 의식의 눈으로도 보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세상이 마음에 스며들게 되고 젖어들고 세상에 정복당하게 됩니다. 악은 이렇게 세상에 젖은 상태를 부인하지 않고 묵인한 상태에서 지정의를 발동시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의식의 시선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으로 본문 말씀 앞부분에 요나의 표적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표적(sign)이란 표지판, 간판, 징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수많은 기적을 표적으로써 보이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이 자의적으로 행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 계신 상태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존재와 모든 행동과 말씀은 전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표적이셨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님을 통해서 느끼고 믿고 우선시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의식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본문 29절에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악한 이유는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을 의식으로도 같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의식하는 동안 마음은 세상에 정복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부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묵인합니다.

이런 악한 상태의 우리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본래였다면 예수님의 기적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세상이 들어온 마음을 잘못된 것으로 여겨 회개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무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세상을 더 확실하게 붙잡는 방편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면 그 기적이 표적이 되어서 예수님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소원을 이룰 표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의식을 미래로 향하게 하여서 세상을 보는 나쁜 눈의 상태를 더욱더 고착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마음은 점점 더 깊은 타락의 구덩이로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기적을 행하셔도 이러한 악함만을 보였기에 악한 세대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일으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합동 프로젝트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세상을 젖혀둔 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을 포착하기 위해서 세상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의식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흡입력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을 의식으로 따라가며 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흡입력이 세상을 포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통해 세상 바깥으로 나가셔서 하늘로 향하는 통로가 되신 것입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한 것이었습니다.

 

의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기적조차도 악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삶은 더욱더 헝클어져서 난장판이 됩니다. 불안하고 걱정되고 화나고 짜증나고 욕심이 생깁니다. 모든 부정적인 상태가 곤죽이 되어 살아가는 동안 삶도 엉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따르기 위한 통로가 되시고자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을 통해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이 향할 수 있는 곳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치 산 너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마을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연기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을을 의식하고 그곳을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꼭 붙잡고 있으면 의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눈으로 보는 것들보다 하늘이 더 확실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면 의식의 시선은 다시 세상을 향하게 되고 마음과 삶은 헝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식의 표지판입니다. 이 표지판을 붙잡고 있으면 나의 의식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힐링은 일어나게 됩니다. 힐링의 체험은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 사람은 죽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의식이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은 결코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삶의 모든 부분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재벌도 안 되고 대통령도 안 되고 철학자도 안 되고 어떤 종교를 택해도 안 됩니다.

오직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을 하나님께 도달하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육체의 눈으로 백합화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의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어여쁜 자녀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우리의 의식으로 보아야 할 분이십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들은 의식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만 의식이 도달하기 원하신다면 표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의식을 붙들어 매신다면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든지 우리의 의식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과 삶에는 힐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께로 나의 마음을 끌고 가는 유일한 표지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나의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의식의 시선이 주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향하고 아버지께 도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유일한 대상인 하나님께만 고정된 의식을 가짐으로써 나의 마음과 삶에 하늘의 빛이 가득하게 들어오는 힐링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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